5.8광주와 미국의 기밀문서 (2)

▲부마항쟁 당시 진압대에 맞선 마산역에서의 시위
▲부마항쟁 당시 진압대에 맞선 마산역에서의 시위

카터처럼 미 대통령이 제 3국 시민소요 사태에 대해 직접 군 진압 결정을 내린 사례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1980년 그의 ‘광주’에 대한 폭력적 결정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그것은 ‘광주’가 미국 본토의 안보를 위협하는 최고 수준의 위기 상황으로 판단한 결과기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런 점은 당시 미국의 세계핵전략에 대한 미국 유수 관련 연구기관들의 기록을 보면 유추가 가능하다. 미국이 자국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아닐 경우 백악관이 나서는 식의 호들갑을 떨지 않는 것이 미국의 법치였기 때문이다.

광주 항쟁의 경우 시민항쟁 진압에 투입된 제20사단은 평상시 한미연합사(CFC) 작전통제 하에 있어서 한국군 단독으로 이동시킬 수 없었고, 미국의 사전 승인(또는 묵인)이 필요했는데 이에 대해 중요한 부분이 기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고 있다.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보다 구체적인 개입 여부를 밝힐 수 있는 핵심 정보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정보는 아래와 같은 자료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 된다:

우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의 정책 결정 회의록이다. 미 백악관 국가 안보회의 소집권한의 최종 책임자는 미국 대통령이다. NSC는 대통령의 자문기구로, 법적으로는 대통령이 원하는 범위 내에서만 기능한다. 대통령은 국가안보 관련 사안을 검토하거나 결정이 필요할 때, 직접 회의를 소집하거나 소집을 지시한다. 국가안보보좌관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NSC 회의를 주관하거나 소집할 수 있다.

당시 카터 대통령은 광주항쟁을 국가안보와 관련해 NSC를 소집토록 한 것인데 광주 항쟁의 어떤 사유가 미국 본토의 안보를 위협했는지에 대한 것은 비밀로 분류되어 있다. 공개된 체로키 파일자료에 따르면 당시 NSC는 광주항쟁이 미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고 보고 한국군의 무력진압을 승인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수천 km 떨어진 광주에서 발생한 시민항쟁이 어떤 면에서 미국을 위태롭게 한다고 본 것일까?

이에 대한 궁금증은 광주항쟁보다 수 개 월 전에 발생한 부마민주항쟁 사건을 살피면 조금 해소된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미 백악관이 NSC를 소집했다는 기록은 없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해 발생한 대규모 시위로 대학생,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하면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경상남도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했다. 동시에 마산 지역 작전사령부는 마산일원에 군을 진주시켜 시청 등 정부기관과 언론기관 등 공공건물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 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하는 시민과 학생에 대해 강도 높은 진압이 이루어졌으며 부마민주항쟁 직후 1주일도 안 되어 10·26사건이 발생해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이했다. 카터 정부는 부마항쟁 때는 사태를 주시하는 평상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미국 안보를 위협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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