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사관 파헤치기 8 – 일제가 낙랑군 재평양설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

▲ 지도 : 한사군 위치를 둘러싼 남북 학계의 입장 차이.
▲ 지도 : 한사군 위치를 둘러싼 남북 학계의 입장 차이.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하여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를 꼽자면 한사군 문제를 들 수 있다.  "특히, 우리(남) 학계에선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 내에 한사군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조선(북) 학계에서는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없었다고 보며 한사군의 위치는 남북 학계 간 첨예한 논쟁 소재가 되고 있다."

한사군, 특히 그 중심 군현인 낙랑군(樂浪郡)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낙랑군 재평양설’)은 따져 보면 오래된 주장이다. 중국 북위(北魏) 때 학자 역도원(酈道元)이 쓴 『수경주』에서 ‘패수(浿水)가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오늘날 고구려 수도(평양)는 패수 북쪽에 있다’고 기록하며 그 위치를 평양으로 비정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후, 『수경주』의 해당 구절을 조선시대에 여러 학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상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일제의 낙랑군 재평양설 ‘사실 만들기’

그런데, 일제는 이와 같은 낙랑군 재평양설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역사적 사실로 못 박는 데 공을 들였다. 일제가 낙랑군 재평양설에 눈독을 들이고 집착한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외세의 영향 아래서만 발전할 수 있었다는 타율성론을 퍼뜨려 우리의 민족성과 자긍심을 말살하고 식민지배에 복종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특히, 400년간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며, 한사군을 통해 들어오는 중국 문물을 통해서 조선의 고대사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서사는 임나일본부설과 더불어 일제에 아주 매력적인 소재였다.

“조선은 중국과 왕래가 쉬워 일찍부터 그들의 문화를 수입하였고, (중략) 예로부터 중국 문화의 은혜를 입었고 그 침략을 받아서 항상 그에 복속하기에 이르렀다.”(세키노 다다시, 『조선의 건축과 예술』, 1941년)

이를 위해, 일제는 조선 강점 이전인 1909년부터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당시 도쿄공업대학 건축학 교수)를 필두로 ‘고구려 고적조사반’을 꾸려 평양 일대 유물을 조사케 했고, 강점 직후엔 민속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를 내세워 ‘한대 낙랑군 유적조사’로 확대하며 낙랑군 재평양설을 체계화, 기정사실화하는 작업을 펼쳤다. 이에 따라,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평양 일대 발굴조사 사업(황해도 64개소, 평안남도 186개소, 평안북도 50개소)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렇게 발굴한 유적, 유물들을 어떠한 근거나 검토도 없이 모두 ‘중국 한나라식 또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단정해 버렸다.

또한, 일제는 단순히 평양 일대 유적, 유물을 대대적으로 발굴하는 데서만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일제는 낙랑군 재평양설을 못 박고자 유적, 유물을 날조, 조작하기까지 했다. 기록과 유물에 근거해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닌, 결론을 짜놓고 그에 맞춰 유적, 유물을 조작하는 일본 역사학의 오랜 행태가 이 낙랑군 재평양설에서도 어김없이 재현된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일제가 낙랑군 재평양설을 사실로 못 박기 위해 벌인 유적, 유물 날조의 대표적인 두 사례를 살펴볼 것이다.

점제현 신사비를 둘러싼 의문과 진실

▲ 점제현 신사비 ‘발견’ 당시 사진. 비석 크기와 비교하기 위해 함께 찍은 아이의 모습이 이 비석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을 말해주는 듯하다. 『조선고적도보』
▲ 점제현 신사비 ‘발견’ 당시 사진. 비석 크기와 비교하기 위해 함께 찍은 아이의 모습이 이 비석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을 말해주는 듯하다. 『조선고적도보』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점제현 신사비(秥蟬縣 神祀碑)이다. 낙랑군에 부속된 25개 군현 중 하나인 ‘점제현’에 조성된 산신당에 세워졌다는 이 비석은 높이 1.35m, 너비 1.09m, 두께 0.12m의 큰 화강석에 글씨를 새겼는데, 79자의 예서체(隸書體)나, 점제현에서 산신에게 풍년과 안녕을 바라며 세웠다는 내용을 통해 서기 85년 후한(後漢)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점제현 신사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으로, 세키노 다다시와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평안남도 용강군(오늘날 남포시 온천군) 성현리산성(어을동산성) 근처 들판에서 이 비석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세키노와 이마니시는 이 비석의 내용과 『한서』 「지리지」의 “낙랑군 땅을 흐르는 열수(洌水)가 점제현에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구설과 엮어 비석이 발견된 용강군이 한나라 당시 점제현이고, 열수는 대동강이라 주장했다. 그 후, 일제 역사학자들은 이들이 발견했다는 이 비석을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로 내세웠고, 비석이 발견됐다는 용강군 소재 성현리토성은 낙랑군 점제현의 치소(治所: 행정중심지)였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일제의 점제현 신사비 발표는 이상했다. 세키노 다다시와 이마니시 류는 이 비석을 들판 한가운데 방치된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비석이 발견됐다는 1913년 이전에 편찬된 여러 기록들(『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용강현읍지』 등)엔 이 비석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었다. 수천 년간 들판 한가운데 방치되어 비바람을 맞았다면 선조들이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가 갑자기, 그것도 용강군 일대에서 살지도 않고 이 지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두 일본인 학자가 들판 한가운데에서 우연히 발견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남포시 온천군 일대 위성사진. 지도에서 빨간색 원이 점제현 신사비가 ‘발견’됐다는 곳이다. ⓒGoogle
▲ 남포시 온천군 일대 위성사진. 지도에서 빨간색 원이 점제현 신사비가 ‘발견’됐다는 곳이다. ⓒGoogle

또한, 비석에서는 “산신의 덕택이 태산(泰山)과 숭산(崇山)에 견줄만 하다”는 구절이 있는데, 비석이 발견됐다는 일대엔 중국 본토의 태산, 숭산 급(해발 1,500m)으로 크고 웅장하거나 유명한 산이 없다. 굳이 찾아보면 온천군 동쪽에 566m 높이의 오석산이 있지만 평범한 동네 뒷산 수준에 불과하고 유명하지도 않다. 거기다가, 신을 칭송한다는 비석치고는 앞면만 반듯하고 옆면과 뒷면은 오랜 세월 속에서 마모된 것보다는 어디선가 금방 쪼개서 가져온 것처럼 보였고 마감처리도 매우 조악한 형태였다.

이렇듯 일제의 점제현 신사비 발표는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당시에도 정인보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이 비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해방 뒤인 1990년대에 조선(북) 학계에서 이 비석을 대대적으로 검증하면서 그 진상이 밝혀졌다. 땅을 파보니 비석 아래에 조선시대 사기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비석 기단은 근대에 발명된 시멘트로 만들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다가,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과거에는 밝혀내지 못한 것을 과학적 분석을 통해 밝혀낼 수 있게 되었다. 조선 학계는 비석을 조사하면서 비석에 사용된 바윗돌의 생성 연대와 광물 성분을 분석했는데, 비석이 발견됐다는 남포시 용강군・온천군 일대 화강석과는 완전히 달랐다. 탄소연대 측정을 해 보면 남포시 용강군・온천군 일대 화강석은 대체로 생성연대가 1억 1백만~1억 7백만 년 전으로 나오는데, 점제현 신사비는 1억 2900만 년 전으로 용강군・온천군 일대 화강석과는 2~3천만 년 이상 시차가 있었다. 오히려, 조선 학계에서 한사군 위치로 비정하는 요동지방(요녕성 안산시 해성시) 화강석과 그 성분이나 생성연대가 일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 마디로 이 비석은 서기 85년에 이 지방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요동지방 어디선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근대에 옮겨온 것이 명확했다.

즉, 일제는 1913년 이전엔 실체도 불분명했던 점제현 신사비를 어디선가 가져와 자신들이 발견한 것으로 조작하고, 이를 한사군이 평양 일대에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로 내세운 것이다.

토성에서 쏟아진 봉니의 실체

▲ 평양 낙랑토성에서 출토됐다는 봉니
▲ 평양 낙랑토성에서 출토됐다는 봉니

다음으로 봉니(封泥)에 대해 살펴보자.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사람들은 대나무나 널빤지를 쪼개 이를 끈으로 이어 만든 목간(木簡, =간독(簡牘))에 문자를 기록했는데, 이 목간을 돌돌 말아 끈으로 묶은 뒤 진흙을 붙이고 책임자의 도장을 찍은 것을 ‘봉니’라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편지봉투를 촛농으로 붙이고 도장을 찍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일제는 이 봉니에 주목하여 낙랑군 재평양설의 결정적 증거로 보고 대대적인 발굴에 나섰다. 1918년에 평양 낙랑토성에서 ‘낙랑군 봉니’를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일제는 1937년까지 평양 일대에서 200개 이상의 엄청난 양의 봉니를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일제의 발표대로라면 평양 일대에서 봉니가 ‘땅만 파면 물 쏟아지듯’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일제가 평양 일대에서 발굴했다고 내놓은 봉니들은 모두 가짜였다. 애초에 봉니는 수신자가 받아 뜯으면 부서지게 되므로 그 형태가 온전하게 출토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특히, 서신 왕래가 빈번했던 중국 한나라 수도 낙양(洛陽), 장안(長安, 서안) 일대에서도 온전한 형태의 봉니 유물은 매우 드물게 발견되었다. 그런데, 수도도 아니고 동쪽 변방의 일개 작은 군현에서 봉니가 200개 이상이나 쏟아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한, 일제가 발굴했다는 봉니를 살펴보면 낙랑군 산하 군현에 국한되어 있다. 사서를 보더라도 낙랑군이 본국 조정과 요동군 등 인접 군현, 고구려・부여・선비 등 주변 다른 국가와도 교류한 내용이 확인되므로 본국, 다른 군현, 타국 봉니가 함께 출토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본국, 타 군현 및 타국 봉니는 하나도 없고 소속 군현 봉니만 나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역으로 평양에 있던 낙랑이 한나라와는 별개의 독자 세력임을 입증하는 유물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리고 봉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형태나 규격이 하나같이 제각각이고, 찍힌 관직명도 당시와는 전혀 맞지 않고 엉뚱한 시대의 관직 제도에서 따온 경우도 많다. 가령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나라 때 만들어졌다는 봉니에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이라 적혀 있는데, 정작 신나라 때는 낙랑군을 ‘낙선군(樂善郡)’이라 불렀던 것, ‘동이장인(東夷章印)’이라 찍힌 2개의 봉니가 그 규격이 서로 맞지 않는 것(하나는 한 변 길이가 2cm, 다른 하나는 2.1cm) 등이 대표적이다.

결정적으로, 과학적으로 검증한 결과 일제가 공개한 봉니들은 모두 낙랑토성 일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북) 학계에서는 앞서 본 남포시 온천군에 있었다는 점제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점제현봉니들(‘점제□인’, ‘점□장인’, ‘점□승인’ 등)의 성분을 조사했는데, 그 결과 온천군・용강군 일대 진흙이 아닌 평양 낙랑토성 인근 진흙과 똑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봉니를 출발지에서 찍어서 보내고 도착지에서 뜯는 것을 생각해 보면, 출발지인 용강군 일대 진흙으로 구성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출발지 진흙이 아닌 엉뚱한 도착지 진흙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100% 위조품일 수밖에 없다.

이미 그 당시에 평양 일대에서 봉니를 전문적으로 위조해 팔던 골동품상이 판을 칠 정도였고, 오죽했으면 낙랑군 재평양설을 주도하던 이마니시 류도 ‘낙랑토성에서 수집한 봉니는 대부분이 가짜다’라고 인정했겠는가? 이를 증명하듯, 해방 이후에 조선(북) 학자들이 일제가 봉니를 발견했다는 평양 인근의 토성들을 재조사했는데 단 하나의 봉니도 새롭게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듯, 일제는 수많은 가짜 봉니들을 만들고선 이를 가지고 ‘낙랑군 재평양설의 결정적 증거’로 대대적인 선전을 했던 것이다.

맺으며

이외에도, 일제가 낙랑군 재평양설을 사실로 만들고자 벌인 날조, 조작 사례는 수없이 많다. 평양 일대에서 발굴된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을 가지고 전형적인 중국 한나라식 무덤이라 발표한 것, 1911년 10월 황해도 사리원에서 발굴된 무덤을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의 무덤으로 발표한 것(2010년에 정인성 경북대 교수가 재검토한 결과 4세기경 고구려 무덤으로 밝혀졌다), ‘왕광(王光), 왕우(王旴) 무덤’에서 출토된 나무도장을 가지고 한나라 시기 도장이라 조작한 사례(정작 한나라 땐 도장을 나무가 아닌 옥, 금, 은, 청동 등으로 만들었다) 등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이렇듯, 낙랑군 재평양설을 사실로 만들고자 일제는 날조와 조작도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앞선 시간에 보았던 구석기 연대를 끌어올리고자 유물을 조작하다 걸려 망신당한 사건처럼 현재진행형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그것이 일본 역사학의 타고난 버릇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역사학계는 일제의 낙랑군 재평양설 확립을 위한 날조, 조작의 영향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고질적인 역사 자료 부족이나 분단 체제로 인해 직접 평양에 가서 유적, 유물을 발굴, 연구하기 어려운 역사학계의 고민은 있겠으나, ‘일부 조작은 있을 수 있어도 연구성과 전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주장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진정 식민사관을 극복하자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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