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7주년을 맞고 있다. 제주4·3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사대주의 근성과, 대통령이 되겠다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승만 세력에 맞서 제주 도민이 자주독립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 전쟁이었다.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군경, 서북청년단 등 반공 세력을 동원해 제주 도민을 ‘빨갱이’로 낙인찍었고,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살인허가증까지 쥐여주었다.
이 풍경, 낯설지 않다. 오늘날에도 윤석열 파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과 집회 현장에 어김없이 등장해 폭력을 행사하는 내란 동조 세력의 입에서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고, 그러한 문구가 적힌 피켓과 방패가 거리에 등장하고 있다.
작년 11월, 국군방첩사령부는 ‘계엄-합수본부 운영 참고 자료’라는 문건을 만들었다. 이 문건은 비상계엄 선포의 역사적 사례로 ‘제주폭동’과 ‘48년 여수·순천 반란’을 제시했다. 즉, 4·3 당시의 계엄 선포를 12.3 비상계엄의 정당화 근거로 삼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비상계엄 역사는 4·3으로 시작된다. 4·3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 주둔 14연대에 제주 출동 명령이 내려졌으나, 2,000여 명의 애국 군인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에 10월 21일 여수와 순천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항명군 진압에 나섰다. 작전 종료 후인 1949년 2월 5일, 비상계엄은 해제되었다.
두 번째 비상계엄은 1948년 11월 17일 제주 지역에 발령되었다. ‘도민 초토화 작전’을 위해서였다. 작전 종료일인 12월 31일에 해제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은 곧 학살이었다. 여수·순천 지역의 항명군과 민간인, 제주 도민, 광주 시민 모두가 비상계엄 하에서 무참히 학살당했다.
비상계엄은 또한 반동이었다. 자주독립과 통일 정부 수립을 가로막고, 박정희 사후 ‘민주주의의 봄’을 무력으로 짓밟았다.
비상계엄은 전쟁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단독 정부를 세우고 전쟁 구조를 완성했으며, 전두환 정권은 반공·반북 체제를 강화하며 한미 전쟁동맹을 공고히 했다.
비상계엄은 미국의 내정간섭이 낳은 결과였다. 미국은 그 계획을 알고 있었고, 침묵으로 동의했으며, 때로는 이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다.
12.3 내란도 마찬가지다. ‘비상계엄’을 명분으로 한 이 쿠데타 기도는 학살이었다. 처단, 수거, 사살, 폭파, 종이관, 영현백 등 민간인 학살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문건 곳곳에 등장한다.
12.3 내란은 반동이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으로 세운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다시금 파쇼 체제를 세우려 했다.
12.3 내란은 또한 전쟁이었다. 내란 성공을 위한 무력 충돌을 유도한 흔적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만약 내란이 성공했다면, 정당화 명분을 위해 더 큰 전쟁까지 불사했을 것은 자명하다.
12.3 내란에서도 미국의 개입 흔적은 분명히 드러난다. 평양 무인기 침투 등 군사적 긴장을 유도하는 활동을 묵인함으로써 내란 계획을 사실상 지지했으며, 내란이 실패한 이후에는 한덕수와 최상목 권한대행 체제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내란 척결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1948년 첫 비상계엄 선포부터 2023년 12.3 내란 음모에 이르기까지, 비상계엄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평화를 유린하며, 국민의 생명을 짓밟아온 폭력의 역사였다.
내일, 4월 4일은 윤석열 탄핵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는 날이다. 윤석열 파면은 복잡한 헌법 해석이나 정밀한 법리 판단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이는 상식의 영역이다.
하지만 파면 결정은 시작일 뿐이다. 내란 가담자는 철저히 조사해 법정 최고형에 처해야 하며, 내란 동조자 역시 엄단해야 한다. 내란에 연루된 정당 또한 해체되어야 한다.
다시는 이 땅에 비상계엄과 내란이 반복되지 않도록, 더 단단하고 건강한 민주주의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비상계엄과 내란의 그림자 뒤에서 대한민국 정치를 농단해온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이제는 자주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12.3 내란에 마침표를 찍는 길이며, 제주 4·3 영령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