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76주년 기획 ②
제주 4.3은 냉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발생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미국은 자신의 냉전 정책을 위해 한반도 분단을 획책했고, 제주 4.3은 그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항쟁이었다. 미국은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4.3 항쟁을 진압해야 했고, 조작과 공작을 동원해서라도 제주도민들을 초토화해야 했다.
제주 4.3 항쟁은 미군정의 탄압과 분단에 맞선 반미항쟁이었다. 제주 4.3평화공원 평화기념관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백비가 누워있다. 백비 앞 안내문에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
누워있는 백비가 세워지고 비석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는 날이 올 때, 거기엔 “자주 독립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제주 반미항쟁”이라고 적어야 한다.

미군정, 응원경찰 보내 총격 사건 일으키고 ‘빨갱이 섬’으로 몰아가
1945년 9월 9일 미군정이 시작되자마자 미군이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하는 것이었다. 조선 인민의 자주 독립 의지가 인민위원회로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미군정에 제주도민들은 눈엣가시였다. 제주인민위원회는 38선 이남 지역에서 가장 강한 자주 독립 국가 건설 역량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 도민들의 자주 독립 열망을 꺾어야 38선 남쪽 지역에 대한 미군정의 지배는 완성될 수 있었다. 미군정은 1947년 3.1 대회가 준비되던 시기부터 이 대회를 파탄 내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미군정은 육지에서 제주 3.1 대회를 진압하기 위해 육지의 응원경찰을 파견했다. 미군정의 희망대로 응원경찰은 제주 도민에 총격을 가함으로써 3.1 대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제주 도민들은 발포자 처벌 등을 주장하며 3.10 총파업으로 미군에 맞섰다.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제주 도민의 투쟁 의지를 꺾기 위해 미군정은 좌익 색깔 공세를 강화했다.
“3월 10일 총파업이 좌익 빨갱이들의 소행”이라는 3월 14일 미군정의 정보보고서는 조작된 것이었다. 3월 10일 발생한 총파업이 ‘좌익 빨갱이’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이었다는 결론을 4일 만에 내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미국은 제주 도민에 대한 ‘빨갱이 사냥’을 위해 정보보고서를 조작한 것이다.

그 이후 미군정은 자신은 뒤로 빠지고 친일 경찰 출신, 서북청년단 등을 대거 제주도에 내려보내 ‘레드 헌터’(빨갱이 사냥)에 착수한다. 제주도민의 자주독립 의지를 ‘빨갱이 색깔’을 입혀 분쇄하려고 했던 것이다.
47년 12월 미군 보고서, 경찰이 진압 못하면 군대를 파견한다는 결론 내려
‘레드 헌터’라는 극단적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미군정에 대한 제주 도민들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은 제주 도민의 투쟁을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진압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냉전 정책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애초 미국의 전후 아시아 정책은 장개석 국민당 정부를 파트너로 하여 미국 중심의 아시아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7년 중반을 거치면서 장개석 국민당군과 모택동 공산당군 사이에 전세가 역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모택동 공산당군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양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시아 정책을 새롭게 수립해야 했던 미국은 장개석 정부를 대신해서 일본을 새로운 파트너 국가로 설정했다. 그 결과 한국의 중요성도 더욱 커져갔다. 일본을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한반도 남쪽에서만이라도 확실한 반공 정권을 수립해야 할 필요성이 강화된 것이다.
미국이 1947년 하반기부터 단독정부 수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이 이렇게 바뀌자 38선 이남의 미군정은 더욱 다급해졌다.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단독 선거가 치러지기 전에 제주 도민의 투쟁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하에서 1947년 12월 13일 제주도 정세에 대한 미군 CIC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이 보고서에서 미군정은 만약 현재와 같은 혼란 상황이 경찰이 수습하지 못하면 제주도는 더 큰 혼란 상황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보고서가 아니었다. 경찰이 수습하지 못하면 더 강력한 공권력으로 제주도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는 ‘지침서’였다. 경찰보다 강력한 공권력 즉 군부대 투입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군대를 동원한 제주 항쟁 진압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4.3 항쟁 일어나는 즉시 계엄령 선포, 경비사령부 설치
4월 3일 제주도민은 역사적인 세 번째 항쟁 즉 4.3 항쟁에 돌입했다. 완전한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애국적 반미항쟁에 나선 것이다.
미군정은 즉각 군부대 투입에 착수했다. 4월 5일 제주도에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각 도에서 대규모 군대와 경찰, 반공단체 회원들을 제주도에 급파했다. 제주 해상교통은 차단되었고, 미군 함정은 해안을 봉쇄했다. 군병력으로 제주 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4월 27일 미군정은 경비대의 진압 작전 투입을 결정했다. 이로써 제주 항쟁의 진압 주체는 경찰에서 군부대로 바뀌게 되었다. 미군정의 지휘를 받는 군대가 제주도민을 학살하는 것이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다.
그런데 4월 28일 미군정이 미처 상상하지 않았던 사태가 발생했다. 진압부대의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책임자 김달삼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경비대와 무장대 쌍방은 3일 동안 교전을 중단하고, 무장대는 3일 안에 무장을 내려놓고 하산하면 경비대는 그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 평화협정의 요지였다. 미군정에 있어 평화협정의 이행은 제주 도민들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행위가 된다. 미군정에 있어 제주 도민들은 언제 다시 항쟁에 나설 지 모르는 불안한 세력이다. 따라서 그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미군은 4.28 평화협정을 파탄내기 위한 공작에 착수한다.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 제주 도민 초토화를 위한 미국의 조작
5월 1일 제주도 오라리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으로 4.28 평화협정은 폐기되었다. 미군정은 제주도 좌익 세력이 4.28 평화협정을 파기하기 위해 오라리 방화사건을 일으켰다고 결론내리고, 초토화작전을 본격화한다.

그러나 오라리 방화 사건은 우익청년단의 소행이었다. 우익청년 30여 명이 오라리(지금의 연미마을)의 5세대 12채 민가를 불태웠던 것이다.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 후 우익청년단체의 방화라고 미군정에 보고했으나 미군정은 이 보고를 묵살했다.
당시 오라리 방화 사건은 미군 촬영반에 의해 촬영됐다. 미군 비행기가 불타는 오라리 마을을 공중에서 찍은 것이다. 이 영상 필름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되어 있다. 미군정이 사전에 방화정보를 입수하지 않았다면 항공 촬영은 가능하지 않았다. 미군의 촬영은 미군정의 조작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미군정은 오라리 방화 사건 이후 김익렬 연대장에게 초토화작전 전개 필요성을 강조했다. “10만 달러를 주겠다”, “가족과 함께 미국 이민을 알선하겠다”라며 유혹했으나 김익렬 연대장은 끝내 초토화작전을 거부했다. 5월 6일 미군정은 김익렬을 연대장에서 해임하고 박진경을 새로운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미군정의 충실한 하수인 박진경에 의해 초토화작전은 시작되었고, 이 초토화 작전은 1948년 이승만 정부 수립 후에도 계속되었다.
제주 4.3: 자주 독립과 통일 그리고 주권을 강탈하기 위한 미군정의 학살
미군정은 본격적인 초토화작전은 이승만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해왔다. 그러나 초토화작전은 미군정의 오라리 방화 사건 조작으로 본격화되었다. 미군정에 의해 시작된 학살이었다.

또한 이승만 정부 수립 후에도 미군의 학살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은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체결하여(1948.8.24) 한국군에 대한 사실상의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협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군에 대한 지휘책임을 갖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의 학살 역시 미군정이 지휘 책임을 갖는 한국군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
제1조 주한미군사령관은 본국의 지시나 자신의 직권 범위 내에서 대한민국 국방군을 계속적으로 조직, 훈련, 그리고 무장할 것에 동의한다.
제2조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미 공동안전에 부합될 경우에 점진적이며 가급적 속히 전 경찰, 해안경비대, 현존 국방경비대의 지휘 책임을 대한민국 정부에게 이양하기로 동의한다.
제주 4.3은 반미 항쟁에 나선 제주 도민에 대한 미군정의 학살이었다. 자주 독립과 통일 그리고 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제주 도민의 투쟁은 미군의 학살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