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국회 교통소위 ‘철도민영화 촉진법’ 심의
철도노조 지도부 삭발.. 총파업 태세 준비
2013년 박근혜 정권의 철도 민영화 정책에 맞서 23일간 파업해 승리한 철도노동자.
2023년, 그들이 또 한 번 철도 민영화를 촉진하는 법안을 막기 위해 여의도 국회 앞에 모였다. 전국철도노동조합(철도노조) 지도부는 삭발로 ‘총력 투쟁’을 결의를 밝혔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교통소위가 오는 21일, ‘철도 시설유지보수업무를 철도공사로부터 분리’하는 철도산업발전기본법(철산법, 38조) 개정안을 심의할 예정이다.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이 발의한 이 개정안의 핵심은 ‘시설유지보수 시행업무는 철도공사에 위탁한다’는 단서 조항을 삭제하는 것이다. 이를 삭제할 경우 시설유지보수업무의 민간위탁이 가능해진다. 즉, 철도의 운영과 시설을 완전히 분리하는 게 법안의 골자로, 개정안이 통과되면 철도 민영화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철도노동자들이 이 개정안을 “철도 쪼개기”, 일명 ‘민영화 촉진법’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철산법 38조 단서 조항은 지난 2003년 노사정이 참여한 사회적 합의로 탄생했다. 당시, 단서 조항을 철산법에 명시한 이유는 시설유지보수업무의 무분별한 외주화와 민영화를 막는 조치였다. ‘시행령’으로 두면 언제든 정부 입맛에 따라 외주화나 민영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철산법 안에 단서 조항을 둔 것.
당시에도 외주화와 민영화는 엄청난 사회적 갈등과 고통을 발생시켰고, 이에 노무현 정부와 국회, 철도공사 노사 간 논의 끝에 만들어진 합의가 바로 철산법 단서 조항이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시점에 단서 조항 삭제 개정안이 발의됐다. 빠르면 11월 21일(혹은 12월 5일) 국회 교통소위에서 논의된다.

‘철도 안전’을 민간기업에 맡긴다?.. 영국 사례 주목
지난 2000년 당시 건설교통부는 ‘철도민영화 실행방안 연구용역’ 보고서를 발주한다. 말 그대로 민영화를 염두에 둔 보고서였다. 보고서는 “철도운영사가 유지보수를 담당할 경우, 장기적으로 운영 부문을 분할하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즉, 유지보수업무부터 떼어내야 민영화 추진이 수월하다는 게 보고서의 핵심이다.
시설유지보수업무는 ‘철도 안전’의 핵심이다. 철도노조는 “적절한 인력, 시설, 절차는 안전관리 체계를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라며 “철도산업 특성상, 운행 및 유지보수 업무가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야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이 철도의 운영과 시설을 분리해 민영화로 치달았던 사례가 있다. 1997년, 영국은 철도를 민영화했다. 운영과 유지보수가 나뉘어 지면서 열차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2000년 영국 해트필드 열차 사고가 대표적이다.
당시 유지보수 전담회사인 레일트랙은 업무를 외주화했고, 외주업체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선로 관리를 소홀히 해 탈선 사고의 원인을 제공했다. 민간회사는 이익에 침해된다는 이유로 영국 정부 안전감독기관의 지시를 묵살했다.
철도노조는 “우리 철도도 영국 사례를 답습하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미 비슷한 사고 경험이 있다. 2018년 12월 강릉선 KTX 탈선 사고가 그 예다.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는 당시 사고원인인 “시공-신호설비 테스트 과정이 철저히 진행되지 않은 배경에 ‘철도공사’와 ‘철도공단’으로 분리된 이원적 체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철도를 쪼개면 쪼갤수록 안전이 취약해진다는 반증이다.
민영화 결과 철도 운임은 높아지고, 사고가 끊이지 않자 영국은 5년 만인 2002년, 민영화한 유지보수업무를 다시 국영화했다. 운영과 시설유지보수업무 통합은 세계적 추세다. 독일, 프랑스, 미국, 영국, 중국, 캐나다, 러시아, 일본 등 대부분 국가가 통합 운영 중이다.

9천여 노동자 생존권 달려.. 철도노조 “총파업 태세”
시설유지보수업무 쪼개기를 막는 것은 철도노동자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 유지보수를 전담하고 있는 전문인력은 9천여 명.
“2017년 입사해 7년 차 철도노동자로 살고 있다”는 박진용 청년 노동자(철도시설)는 “철산법 개악 상황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국회 교통소위가 시민들의 안녕, 노동자의 소중한 일터를 무시한 채 우리의 앞날을 결정하는 것에 경악스럽다”고 분노했다.
최명호 철도노조 위원장은 “철도민영화를 막고, 철도 안전을 지키는 것은 시민이 부여한 철도노동자의 사명”이라며 “민영화 촉진법(철산법 개정안) 폐기”를 요구했다. 그는 “오늘 이후 철도노조 모든 조직이 총파업 태세로 전환하고, 지구별 집회와 지부별 총회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앞서 철도노조는 지난달 26일 ‘민영화 촉진법’ 폐기를 위한 입법청원에 나서기도 했다. 청원 시작 열흘 만에 5만 명 시민의 동의를 얻는 등 시민들의 지지 또한 뜨겁다.
윤석열 정부 민영화 3종세트 중 하나.. 법안 폐기 요구
윤석열 정부 국토교통부는 철도 시설유지보수 및 관제권 분리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철도안전체계 심층진단 용역’을 진행 중이다. 이달 안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다. 철도노조는 이 연구용역에 대해 “국토부의 정해진 결론(철도 쪼개기)을 뒷받침하는 용역”이라고 꼬집었다.
철도노조는 “시설유지보수업무와 관제권을 분리하려는 것은 국토부를 비롯한 민영화 추진 세력의 오랜 열망이었다”며 “윤석열 정부의 철도민영화 3종세트(고속철도 쪼개기 확대, 차량정비 민간 개방, 시설유지보수-관제권 분리) 중 하나가 바로 시설유지보수업무 분리”라고 강조했다.
철도노조는 사회적 합의로 탄생한 철산법 38조 단서 조항을 사회적 논의나 합의 없이 국회 교통소위 몇몇 의원 주도로 삭제하려는 데 반대하며 “개정안 폐기”를 촉구했다.

철도노조는 이날 총력 결의대회를 시작으로 21일 교통소위 일정에 따라 총파업에 나설 예정이다.
한편, 최명호 위원장을 비롯해 지방본부 본부장 등이 삭발하며 투쟁 의지를 분출했다. 대회를 마친 철도노동자들은 여의도 민주당사까지 행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