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열사 신향식 40주기에 부쳐서

10월 8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통일열사 신향식 40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추모제’가 개최되었다.
1976년 2월 29일 박정희 군사파쇼정권에 맞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을 발기한 김병권, 이재문, 신향식 선생의 묘소가 그동안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것을 2019년 3월 30일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장했다.
그리고 43년 만에 발기 3인과 남민전 동지 그리고 통일열사 이재문 40주기를 공개적으로 작년 11월 20일 합동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사형을 구형받고 옥중 투쟁 중 옥사한 이재문 선생은 주로 대구 경북 지역 운동의 중심이었기에 경북대학교 민주동문회, 대구경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대구경북지역대학민주동문(우)회 협의회, 대구경북추모연대, 여정남기념사업회 등이 주최하였다.
올해는 남민전 사건으로 유일하게 사형 집행된, 아니 국가가 살인한 신향식 선생의 40주기를 보다 연대범위를 넓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사월혁명회, 서울대학교민주동문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한국진보연대가 주최하고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가 후원하여 추모식을 개최하였다.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10월 유신’과 긴급 조치 시대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의 패망은 박정희의 ‘10월 유신’ 영구 집권을 위한 결정적 구실을 주었다. 연일 북의 남침 규탄 대회를 개최하면서 이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해 민주화 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다.
1974년 1월 8일에 긴급조치 1호를 시작으로 모든 긴급조치의 결정판이자 산천이 떠는 법률인 긴급조치 9호가 1975년 5월 13일 공표되었다.
긴급조치 9호는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하고 일체의 유언비어 날조 및 헌법 비방 행위의 금지, 학생 집회 및 시위의 금지한 제3의 쿠데타이자 민주정치를 박살내는 핵폭탄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거의 5년, 날수는 1천6백69일(4년 6개월)이나 지속되면서 8백여 명의 구속자를 낳는 공안 탄압의 대기록을 세웠다.
긴급조치 9호의 대상은 물론 대학이었다.
75년 이후의 교내 시위는 학교 곳곳의 경찰의 감시 눈초리로 대개 10분 이내에 끝났다.
짧으면 몇 십초, 잘해야 5분을 넘기기 어려운 시위다운 시위를 하지 못하고 무지막지하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민주 통일인사들에게는 소위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 북과 연결시켜 처형하고 장기 옥살이 시키는 등 너무도 엄혹한 상황이었다.
유신군사독재정권의 말기적 상황으로 일인지배체재가 강고해 통상적 방법으로 도저히 박정희 독재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특히 대학의 산발적 데모 그리고 명망가 지식인 중심의 평화적 시위나 유인물 만들어 살포하는 민주화투쟁으로는 더욱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6‧3한일협정반대 투쟁 당시 최초로 화염병이 나왔지만, 남민전은 그것 이상의 무장투쟁까지 준비해야했다.
남민전은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몸을 희생하는 그야말로 해방공간의 투쟁처럼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비군훈련장 무기 획득과 학교, 버스정류장, 건물 옥상 삐라살포 그리고 투쟁 자금 조달을 위해 보석상과 당시 민중 공분 대상 중 하나인 악덕 기업 동아건설 회장 자택 강탈 등 남민전의 반유신 투쟁은 민중들에게 오히려 희망을 주었다.
이것은 소위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국가 살인하는 박정희 유신체제를 평화적인 시위나 유인물 몇 장으로는 타도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1976년 2월 남민전 산하 조직인 민주국국학생연명은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진압과 이 과정에서 사망한 김경숙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횃불 투쟁’으로 명명된 유인물을 배포 하는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도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10월 4일 김영삼의 제명 결의안이 통과되던 엄중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10월 9일, 10월 16일(이후 박정희 사후 11월 13일) 남민전 사건을 발표하면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로서 폭력에 의해 적화통일을 기도해 온 대규모 반국가 조직체’, ‘자생적 공산혁명 세력’으로 몰아 부치며 84명을 검거한다.
민전과 민자통 이후 최대 전선 조직
남민전은 해방공간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과 4월혁명 공간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이후의 최대 전선 조직으로 볼 수 있다.
남민전을 발기했던 당시 세분 선생의 걸어온 길은 인혁당, 전략당, 통혁당 차이가 있지만 이것을 남민전으로 통합하여 박정희 군사파쇼정권 타도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한 것이다.
이재문(李在汶) 선생은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여 4월혁명 공간에는 통일민주청년동맹 활동과 민족일보 기자로, 1964년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이후 계속해서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구경북지부 활동,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지만 1차, 2차 인혁당에 연루가 된 상태였다.
김병권(金秉權) 선생은 대구에서 출생하여 해방공간에는 대구 대중일보 기자로, 4월혁명 공간에는 사회당 경북도당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전략당) 사건에 연루돼 징역살고 나와 1975년 사회안전법 신고를 거부하며 수배 중이었다.
신향식(申香植) 선생은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졸업 후, 1965년 동아출판사 제작부에 취업하여 임금투쟁과 노조결성 그리고 학사주점 활동을 하였다.
1968년 통일혁명당에 사건으로 구속 되어 1972년 만기출소 후, 1975년 사회안전법 발효에 맞서 신고를 거부하며 지하투쟁에 돌입하였다.
세분 선생은 비밀유지를 위해 1976년 2월 29일. 4년마다 한 번 2월에 29일을 두어 하루를 늘리는 윤년에 남민전을 발기한다. 비록 발기인은 셋밖에 안되지만 과거의 어떤 운동보다 각계각층이 결합하여 목표를 분명히 했다.
남민전 강령 제1조는 “미일을 비롯한 국제제국주의의 일체의 식민지체제와 그들의 앞잡이인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을 수립한다”고 되어 있다.
즉 당시 남민전이 지향하는 것은 이 땅을 억누르고 있는 제국주의가 기본척결대상이고 그 다음에 그를 대리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를 새롭게 수립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적으로 한 전선운동이었다.
김남주 시인의 “전사 2”
남민전 동지 김남주 시인의 신향식 선생 “전사 2” 마지막 구절로 추모의 결의를 대신한다.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투쟁의 길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 죽음이 결코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어머니인 조국의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자유의 나무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쑥스럽게 부끄럽게
이야기 할 것이다

만성 신향식 선생(당시 48세) 약력
1934년 12월 1일 전남 고흥군에서 부 신춘우 님과 모 정정옥 님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958년 2월 전남 고흥군 두원초등하교, 고흥중학교를 거쳐 서울 경복고등학교 졸업
1964년 3월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졸업.
1964년 4월 노동청 산재보험과 서기로 근무
1965년 5월 동아출판사 제작부에 취업하여 임금투쟁과 노조 결성
≪학사주점≫과 ≪60년대 학사회≫ 상무 간사로 활동
1966년 재경고흥군 학사모임인 ≪삼산친목회≫를 결성
1968년 7월 ≪학사주점≫ 봉사부장, 총무부장 역임
1968년 8월 ≪통일혁명당≫사건으로 구속, 징역 3년 6월을 선고 받음
1972년 2월 25일 대구교도소에서 비전향 만기출소.
1975년 7월 박정희 군사독재의 사회안전법 발효에 맞서 간고한 지하투쟁 돌입.
1976년 2월 29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 중앙위원으로 활동.
1980년 12월 23일 법정투쟁을 다했으나 대법원 상고심에서 법정최고형인 사형 확정.
1982년 10월 8일 정오 12시 서울구치소 사형 집행.
유족으로 부인 이계영(2016년 12월 21일 별세) 장남 원호, 따님 선미, 차남 유호가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