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기업의 국부유출과 재벌 경제의 대외의존성 (16)

해사안전, 해상보안, 선박운항과 관련된 해양환경보호 등의 국제 해사 업무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국가들이 15세기 대항해시대부터 글로벌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왔다.

해사 분야 규범과 제도 설계 및 분쟁 조정자는 주로 영국이고, 글로벌 해운업은 덴마크, 스위스, 그리스 소속 해운사들이 주도하고 있다.

세계적인 설계기업, 선급회사, 보험사도 대부분 유럽국가 소속이다. 배를 만들 때는 국제 선급회사들이 안전성과 법규를 잘 지켜 설계했는지를 확인하고 운행허가를 해 주는데, 이 회사들은 대부분 제국주의 시대부터 해상무역을 장악해 온 영국, 네덜란드 소속으로 텃세가 세다. 세월호 진상규명 시에도 사고원인을 조사한 기관은 네덜란드의 선박 기초설계를 하는 회사였다. 자동차는 도면을 한 번 승인받으면 수백만 대까지 생산할 수 있으나, 선박의 경우 한 개의 도면으로 보통 한 척, 많아야 서너 척을 건조할 수 있다.

선박의 가치도 선급회사가 평가를 하고, 이것이 보험료 산정의 기준이 되는데, 주요 해상보험이나 화재보험 기업도 영국과 네덜란드 소속업체들이다.

선박 건조 기술도 프랑스 GTT가 화물창 특허를 보유하고 있고, 선박 추진엔진 기술은 덴마크와 핀란드가 세계 1위이다.

이와 같이 유럽은 선박 관련 원천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어, 직접 선박을 건조하기보다는 전문인력을 통하여 기술과 용역을 제공하고 높은 기술 수수료를 받는다.

한국은 선박 건조에서 세계 1위이나 해사 부문에서는 전혀 영향력이 없고, 건조에서도 가장 고부가가치 기술인 설계 역량이 취약하다.

조선업 설계에는 기본설계, 구조설계, 의장설계가 있는데, 의장설계는 우리나라가 높은 수준이며 기본설계와 구조설계는 중형선박까지는 한국이 직접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수출용 대형선박 설계는 모두 외국업체에 의뢰하여 로열티를 제공하고 있다.

먼저 한국은 해양플랜트에서 개념설계 역량이 취약하여 커다란 손실을 보았다. 조선 3사는 해양플랜트를 상선 이후 성장 동력으로 보고, 저가 경쟁으로 대규모 수주를 유치하였다. 그러나 기본설계 등 엔지니어 역량이 부족하여 2015년 거액의 배상금을 물고 수 조원의 적자를 보았다. 발주사의 기본설계 변경으로 생산설계 변경 및 공기 지연으로 이어졌다. 결국 선박 인도 기일이 늦어지게 되었는데 당시 유가가 폭락하자, 발주사들은 인도 지연을 이유로 계약을 취소하였다.

다음으로 한국은 LNG운반선의 핵심인 화물창 설계 기술이 없어 해외기업에 로열티로 선가의 5%를 지불하고 있다.

LNG 화물창은 액화천연가스(LNG)를 영하 160도로 유지·보관하는 저장창고인데, 내부 온도가 조금만 올라가도 가스가 급격히 팽창, 폭발할 수 있어 정교한 설계 기술이 필요하다. 현재 국내 모든 LNG선 화물창은 프랑스 GTT의 설계로 건조된다. 2,000억 원인 LNG운반선 한 척을 건조할 때마다 GTT사에 100억 원의 로열티를 내야 한다. 2005년부터 2020년까지 국내 조선사가 GTT에 지급한 로열티만 4조 원이 넘는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LNG선 화물창 기술사용료는 선박 엔진 가격(뱃값의 5%)이나 재료비·인건비 등을 제외한 LNG선 건조이익(100억~140억 원)과 비슷하다”며 “결국 외국기업(GTT)에 좋은 일만 시켜주는 셈”이라고 말한다. 2021년 한국 조선사들도 화물창 기술을 개발하였으나 아직 상용화까지는 길이 멀다. 실제 건조에 적용되어야 기술적 안전성이 입증될 수 있다.

▲ LNG선박과 저장탱크(화물창)
▲ LNG선박과 저장탱크(화물창)

또한 한국 조선사들은 5천억 원에서 1조 원에 이르는 고부가가치 선박인 크루즈선(초호화 여객선)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 부진한 이유는 크루즈선이 ‘선박+호텔·레저’ 개념으로 승객의 편의성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어 기본적인 설계가 선박 및 해양시설과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호텔의 기능을 갖는 상부시설과 선박의 기능을 갖는 하부선체의 기능적 연결이 크루즈선의 가장 중요한 설계 개념이다. 여기서 소음, 진동, 구명 등의 핵심기술이 필요하며, 인테리어와 디자인 역량, 고급 자재 등도 확보해야 한다.

한국 조선사들은 크루즈선의 뼈대와 몸통을 만드는 건조 기술 능력은 충분하지만 설계 역량이 부족하고, 고급 인테리어 장식재를 공급해 줄 업체가 국내에 없어 기자재를 100% 해외에서 사와야 한다. 이런 부분에 로열티를 지불하다 보면 원가 부담 등으로 이해타산이 맞지 않아 크루즈선 제작은 기피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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