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1
1950년 8월 10일 서울을 출발한 김일성 수상은 그날 오후 8시에 수안보에 있는 전선사령부에 도착하였다. 7월 31일에 이은 김일성수상의 두 번째 수안보 전선사령부 방문이었다.
북한은 전쟁이 시작된 지 2주쯤 되는 7월 8일 전쟁수행체계를 최고사령부-전선사령부체계로 만들었다. 인민군 최고사령관은 김일성 수상이 맡았으며 전선사령관에는 김책을 임명하였다. 전선사령부는 서울(경무대)에 설치하였다.
이후 전선사령부는 전선이 남쪽으로 더 내려가자 대전전투가 끝난 직후인 7월 하순에 수안보로 이동하였다.
흔히 수안보로 알려져 있는 인민군 전선사령부가 자리한 곳은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 석문동으로 석문경로당 앞 개울 건너편(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송계로 339 일대)이다. 지금의 ‘꿈동산펜션’ 뒤쪽 야산인데 당시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전편에서 말한 로동신문의 2017년 7월 24일자 기사 “길이 전하는 천리전선길...”에서는 김일성 수상의 광주행을 “불길속을 뚫고 헤친 사생결단의 행로”라고 표현하였다.
최고사령관이 최전선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기도 했지만 미군비행기가 수시로 폭격을 하는 상황에서 대낮에도 달리는 먼 길을 나서는 것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일성 수상이 타고 가던 승용차는 수안보를 지척에 둔 충주 근처에서 미군기의 기총사격을 받는 위태로운 상황을 겪기도 했다.
수안보 전선사령부의 지휘관들은 김일성 수상의 광주행을 강력하게 만류하였다. 하지만 김일성 수상은 뜻을 굽히지 않고 수행원 3명만을 동행한 채 그날 밤 10시경에 광주를 향해 수안보에서 출발했다.
김일성 수상이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행을 결심한 것은 서남지역 즉 전남-광주지역의 군대와 당이 사업과 활동에서 여러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고 부족한 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로동신문의 앞서 말한 기사에서는 “... 그런데 광주에 지휘부를 둔 해안방어부대는 조직된지 얼마 안되었고 ... 일군들은 갓 임명되어 아직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김일성 수상은 “서남해안방어대책을 세우고 당과 정권기관 사업을 파악하여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하여”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멀고 위험한 광주로의 길에 나선 것이었다.
수안보를 떠난 김일성 수상이 탄 승용차는 그 다음날 8월 11일 0시경에 대전에 들어섰다. 김일성 수상은 도로에 차를 세우고 로동당 충청북도 도당위원장과 충청남도 도당위원장 그리고 충청남북도 내무부장과 담화하였다.
다시 출발한 승용차는 논산을 거쳐 이른 새벽에 전라북도 전주에 도착하였다. 김일성 수상은 광주로 가는 길가에 잠시 멈춰서서 로동당 전라북도 도당위원장과 전라북도 도내무부장을 만나 전라북도에서 시급히 수행해야 할 과업들에 대하여 알려주었다고 한다.
동틀무렵 전주에서 출발한 김일성 수상의 차가 광주에 도착한 것은 1950년 8월 11일 아침이었다.
김일성 수상은 서남해안방어부대 지휘부를 돌아보면서 당면한 군사작전문제와 관련한 지시를 하고 로동당 전라남도 도당위원회 사무실에 도착하였다.
전라남도 도당위원장방에서 있은 이 자리에는 산업성 전권대표로 와있던 리종옥(산업성 부상), 로동당 전라남도 도당위원장 박영발, 도당 부위원장 김선우, 도인민위원장과 도내무부장이 참석했으며 도 정치보위부장, 인민위원장, 인민군 광주지구사령관 등도 있었다고 한다.
![▲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즈음에 촬영한 36살 박영발. [사진 : 임경석 제공]](/news/photo/202108/12054_25514_2536.jpg)
이 자리에서 리종옥의 보고를 들은 김일성 수상은 당단체를 복구정비하는 사업의 의의의 목적에 대해 언급하고 그 방도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권기관들의 역할을 높이고 토지개혁을 빨리 잘 실시할 것 등에 대해 강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김일성 수상이 광주를 다녀간 이삼일 후 박영발 도당위원장이 도당 조직위원회를 긴급소집하고 도당 전 성원 긴급소집령을 내림으로써 확인되었다.
긴급소집한 이 회의에서 박영발은 김일성 수상이 며칠전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주권은 인민에게로’ 라는 당의 기본정책을 제대로 구현할 것, ‘토지는 밭갈이하는 자에게’ 라는 원칙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할 것, 전쟁피해 복구사업을 등한시하지 말 것, 남북로동당을 합당한 정신에 맞게 당 분위기를 일신할 것에 대한 지시가 있었다고 말하였다.
정지아의 수기소설 ‘빨치산의 딸’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삼일 후 도당 조직위원회가 긴급소집됐고 이어 도당 전 선원 긴급소집령이 내렸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각 부에 연락하여 전원이 모인 것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박영발의 기색이 심상찮았다. 광주로 온 뒤로 밝게 웃는 모습 한번 보인 적이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엄격하고 차가운 얼굴이 유난히 싸늘해 보였다.
“동무들!”
외모야 깡마르고 볼품없는 박영발이었지만 위엄이 가득한 음성이었다. 백여 명의 도당 성원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수일 전 수상 동지께서 우리 남조선 일대와 전선을 시찰하고 가셨소. 전 인민을 고무, 추동해 모든 사업을 전쟁 승리로 이끌어나가야 할 우리 당사업을 면밀히 검토하신 후 수상 동지께서 우리 도당이 허다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시었소.
<중략>
여러 가지 많은 문제를 지적하셨지만 이 네 가지 중요사업은 지금 이 순간부터 즉각 실행에 옮기라는 엄명이셨소.”
다음날부터 주권을 인민의 것으로 하기 위하여 각 주권기관의 선거,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당원 등록이 시작되었고 철도, 도로, 통신수단 복구를 위한 총동원 명령이 내려졌다.
기관이 조직되자마자 바로 시작했어야 할 기본사업들이었다.
김일성 수상이 모든 사람의 반대를 물리치고 천리가 넘는 사생결단의 길에 나선 까닭, 멀리 남도의 광주까지 오게 된 이유가 분명해지는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에 온 장소와 뒷이야기...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