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수 박사의 사회경제론

이 시대 경제학은 1%를 옹호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옹호가 사실 경제학의 보수성을 상징한다. 필자는 경제학에 붙어 있는 보수적 학문이란 오명을 벗어던지고자 한다.

우리는 진보의 생명이 항상 근로대중과 함께하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특수성과 연관되어서는 전쟁 반대와 평화체계 구축에 그 의의가 있다. 한국전쟁의 기억은 전쟁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 땅의 근로대중이 쌓아온 노동력 산물을 지켜야 할 우리 사회 진보의 과제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현재 미국화되어 나타나는 경제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미국 경제학이 어떻게 보수화되어 갔는지 역사적 이해를 통해 미국 경제학이 우리나라에 천착되어가는 과정과 식민화의 역사를 고찰하고, 현시대 전 세계에 횡행하는 보수주의 흐름에 반대하고자 한다.[필자서문]

민주노총이 2017년 적용 최저임금 요구안을 가구생계비를 핵심 기준으로 해 시급 1만원과 월급 209만원으로 발표했다. 지난 3월 민주노총은 기자회견을 열어 최저임금제도의 근본 취지인 저임금노동자의 생활안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가구생계비’를 핵심기준으로 하여 최저임금이 결정되어야 한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최저생계비 시급 1만원과 월급 209만원은 최저임금위원회가 참고하고 있는 165만9978원과는 43만원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시간당 6030원으로 결정되었다. 이는 최저임금위원회가 참고하고 있는 비혼 단신노동자 생계실태인 165만9천원에 못 미치는 것이다. 통상 최저임금은 일요일 하루만 쉬는 한 달 209시간으로 계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6030원의 최저임금이 결정되면 209시간×6030원=126만270원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비혼노동자 생계실태분석보고서의 평균생계비 165만9천원과도 약 40만원의 차이가 존재한다. 즉, 비혼노동자 생계실태분석보고서보다 40만원 작은 최저임금위원회의 6030원 결정과 비혼노동자 실태분석보고서보다 40만원 많은 최저임금 시급 1만원 주장과의 차이가 시급 3970원인 셈이다.

최저임금위가 참고한 비혼노동자 생계실태분석보고서의 평균 최저생계비 165만9천원이 2015년 통계이고 보면 최저임금위가 내년도 최저임금을 6030원으로 결장한 배경에 노동자 생계비의 중요성을 충분히 감안한 흔적은 없어 보인다.

과연 어떤 철학에 근거한 것일까 궁금해진다. 임금이 인상되면 취업자가 줄어든다는 생각에 기반하여 인상을 반대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는 이론이 아니라 사실 이데올로기이다.

올해 최저임금 6030원이 결정되고 나서 경영계가 발표한 입장을 보면 이런 입장임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2016년 적용 최저임금이 시급 6030원, 전년 대비 8.1% 인상으로 결정되었다. 저성장이 고착화되는 가운데 특히 메르스 사태 등에 따른 내수부진으로 소상공인과 영세·중소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0.5% 수준의 낮은 물가상승률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 이후 최고 수준의 최저임금 인상이 결정된 것이다.”

소상공인과 영세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음을 최저임금 인상의 문제점으로 제기하고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소상공인과 영세중소기업의 어려움이란 생계비의 어려움이 아니라 사실은 지속가능한 사업 영위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측면도 있기에 최저임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상승 반대의 명목으로 내세우기에는 너무 가혹한 주장이다.

‘임금이 오르면 취업자는 준다’는 이데올로기

미국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왔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의 시간당 급여 15달러 쟁취가 주변부 주장으로 맴돌다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있었다. 지난 2012년 12월 몇몇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민주당 정책포럼에서 시급 15달러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대해 당시 대중은 냉소적이었다. 대중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경제적 혼란이 온다는 주장이었다.

임금인상이 일자리를 줄어들게 한다는 주장은 고전학파 경제학에 근거를 둔 이론이다. 이것은 고전학파의 수요공급법칙이 작동한다는 의미이다. 전 하원의장 존 앤드루 베이너(John Andrew Boehner)는 “일자리 가격(임금)이 상승하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간단히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였던 제임스 뷰케넌(James Buchanan)은 수요공급법칙을 자연법칙과 비교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수요량과 가격간 역(逆)관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선택행동이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합리적이라는 전제를 반영한 경제과학의 핵심적인 가설이다. 마치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고 주장하는 물리학자가 없듯이 최저임금의 증가가 고용 증가를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도 없을 것이다. 그런 주장을 확대해석하면 경제학의 과학성을 거부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극을 예상하는 사람의 확신과 전문가의 기대가 최저임금제도가 만들어진 78년 전에도 동일했다면 이 말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 내에도 많은 입장 변화가 있어왔다는 사실은 이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1938년에 도입된 최저임금은 미국 기준으로 현재 22배 인상되었다. 특정한 주나 도시의 경우에는 100배 이상 인상된 곳도 있다. 하다못해 어떤 해는 87.5% 인상되기도 했다.

최저임금 인상을 반대한다는 주장이 과학에 근거하려면 최저임금 인상으로 실업이 늘어난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하고 실례를 제시해야 한다.

- 1938년 남부지역 산업위원회의 “높은 시급이 일자리 없는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주장

- 1949년 전국요식업협회의 “우리 산업 내의 연방최저임금은 비현실적이고 위험한 수준”이라는 주장

- 1975년 상무위원회의 “최저 2.5달러에서 3.0달러 사이로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200~310만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게될 것”이라는 주장

- 1980년 레이건이 대선유세 중에 한 “최저임금이 대공황 이후 고통과 실업을 야기시켰다”는 주장

- 1996년 하원의원이었던 집 색슨(Jim Saxon)이 “가난하고, 숙련되지 못하고, 젊은 노동자를 도와주려 의도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들을 해친다”는 주장

- 2016년 대선 경선과정에서 한 테드 크루즈(Ted Cruz)의 “최저임금제는 취약계층을 해친다”는 주장

이런 주장들이 근거한 이론은 정말 단순한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그냥 일자리는 줄어들고 실업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하면 일자리 감소? 증거 없다

이것이 이론인지 아니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노동자 생활의 안정성을 가져와 생산성을 제고시킨다는 주장도 있다는 점에서 자본의 편에서 이런 주장만을 받아쓰는 언론의 태도 역시 마뜩잖다. 자본은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해당 산업의 고도화를 원치 않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최저임금제도가 가장 많이 적용되는 산업은 아마 편의점으로 대표되는 유통산업일 것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임금이 높아지면 직접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경영자총협회의 주장처럼 편의점 주인일지 모른다. 그의 고통이 직접적이지만 그 고통은 현재 우리나라 편의점이 운영되는 방식인 프랜차이즈 기업으로 전달될 것이다. 편의점 주인의 고통처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프랜차이즈 가맹점수의 감소로 고통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런 프랜차이즈 가맹점수 축소를 두려워하는 프랜차이즈 기업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을과 병이 싸우는 형상으로 경영자협회는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전형적인 자본의 분할지배방식이다. 이러한 분할지배방식은 자본이나 시장의 영역뿐 아니라 정치영역에서도 일상화되어 있다.

이런 분할지배방식은 사실 신자유주의시대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명백한 독재의 시기,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독재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았던 7~80년대 대학시절 시위하다 붙잡혀 경찰서를 다녀온 거의 모든 사람이 겪은 취조 방식이었다.

당시 함께 시위를 하다가 붙잡혀간 경찰서에서 담당 형사가 옆에 있는 다른 대학교 학생들과 나를 비교하며 취조하던 기억이 있다. 그들의 첫 번째 취조 문구는 “너는 명문대 출신인데 빨간 줄 가면 취업 안 된다. 저 애들은 어차피 취업이 안 되니 시위를 하는 것이다.” “저들은 빨갱이지만 넌 무엇인지 모르고 참여했으니 반성문만 쓰면 내보내줄게.” 이처럼 사람을 가르는 분할방식에 근거한 취조였다. 두 번째 취조는 “여학생도 화염병 던졌다는데 사내자식이 화끈하게 던졌다고 하지. 뭘 안했다고 그러냐”는 식의 차이에 근거한 지배방식이었다.

이런 ‘취조’가 우리 경제에도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 그리고 최저임금제 적용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분할. 우리가 일상에서 전형적으로 맞닥뜨리는 자본의 분할지배방식인 것이다. 일상에서 이것이 이데올로기화되어 갑과의 싸움이 아닌 을과 병의 싸움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연대에 근거한 싸움이고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나는 여기서 주장한다. 이런 ‘더러운 싸움’에 학문의 전문성을 주장하며 수요와 공급법칙이 작용되고 있다는 전제 아래 이뤄지는 일체의 선입견을 버리고 경제학은 힘없는 사람의 친구로 거듭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

# 우리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이야기하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평화로운 의사결정이 평화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평화는 상대방에 대한 동감(同感)의 원리가 작용하지 않는 한 완전한 평화가 될 수 없다. 이제 우리 경제학도 더 이상 수요공급법칙의 비유로서 ‘보이지 않는 손’을 버리고 진정 평화로운 삶의 기반이 되는 시장의 작동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첫 번째 이야기로 우리 사회의 가장 비숙련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최저임금제에 대한 경제학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았다. 경제학은 힘없는 노동자의 친구로 거듭나야 한다.

 

* 김남수 박사는 고려대에서 논문 ‘홀드업문제에 대한 일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고려대 경제학과 강사로 있다. 번역서로 <만화로 읽는 경제학의 모든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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