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와 가야 분국설

신간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가 나왔다.

전문연구서라 책소개를 이러저러하게 하기 보다는 내용자체를 입문형식으로 요약해설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출판인의 글을 직접 소개한다.

▲ 북한학자 조희승이 쓴 '가야사'를 도서출판 말에서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 북한학자 조희승이 쓴 '가야사'를 도서출판 말에서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북한의 역사서 《조선단대사》(고조선에서 조선사까지 총 25권으로 구성) 중에서 ‘가야사’편을 뽑아서 출간한 책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도서출판 말)이 출간됐다. 《조선단대사》 ‘가야사’편의 저자인 조희승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북에 건너가 한일고대사 연구에 매진한 역사학자다. 스승인 김석형의 ‘분국설’을 계승한 조희승은 1988년 《초기조일관계사》에서 지금의 오카야마 기비 지역에 가야의 분국인 임나가 있었다고 논증했다. 2011년에는 ‘분국설’을 일반 독자에게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임나일본부 해부》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조희승이 쓴 ‘가야사’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것처럼 “일본렬도에 건너간 가야사람들의 발자취도 더듬었다. 그 과정에  《일본서기》에 반영된 임나일본부의 정체도 밝혀낼 수 있었다.”(《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3쪽)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조희승이 쓴 ‘가야사’(《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북한학자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에 기초해서, 북한학자의 가야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남한과 일본의 역사학계와 어떻게 다른지, 특히 임나일본부설과 분국설에 집중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야사의 건국시기-1세기 대 3세기

가야사에 대해 흔히 ‘수수께끼의 역사’라고 말하곤 한다. 그 이유는 후대에 알려진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려 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서기 562년 신라에 흡수된 가야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은 데도 그 책임이 크다 하겠다. 조희승은 ‘경주김씨의 자손’인 김부식이 신라를 중시하고 “가야를 아주 하찮게 취급”하였으며, “그리하여 마땅히 《사국사기》로 되어야 할 책이 《삼국사기》로 되고 말았다.”(《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385쪽)라고 적었다. 발해의 역사를 지워버린 김부식이 가야사마저 말살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료가 부족한데다가 일본이 조선침략을 위해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해내면서 가야사의 진실을 파악하는데 더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가야사를 둘러싼 학계의 주요한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 건국 연대, 둘째, 영토, 셋째, 임나의 위치와 임나일본부라 하겠다. 

먼저 건국시기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모두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했다고 적고 있다. 조희승도 《가야사》 머리말 첫 줄에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후부여와 함께 1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경까지 락동강 하류 일대에 존재한 봉건국가의 하나이다.”라고 썼다. 구체적으로는 BC 1세기경부터 변한 지역인 김해 일대에 가야봉건소국이 형성되었으며, 1세기 중엽경에는 금관가야(김해가야)를 중심으로 가야봉건국가들의 연맹체(6가야-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녕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비화가야)를 이뤘다고 보았다.

그런데 남한의 학계는 대체로 3세기 이후 건국설을 주장한다. 주류사학계의 입장을 반영한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은 “서기 2세기경에는 이 지역에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3세기에는 12개의 변한 소국들이 성립되었으며 그중에 김해의 구야국(금관가야)이 문화 중심으로서 가장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일본 학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건국시기를 끌어내리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따른다.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 사학자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가야 1세기 건국설을 인정했다. 조희승도 일본과 한국학계의 이 같은 주장을 ‘가야사 연구’에서 비판했다.

“일제 어용사가들은 일본 야마또정권이 남부조선을 타고 앉자면 백제와 신라, 가야가 락후해야 한다고 인정한 나머지 이 나라들의 건국 년대를 인위적으로 낮추었다. 그들은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 신라, 가야의 건국 년대는 다같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일축하고 3~4세기의 건국으로 만들었다.”(《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391쪽)

일본 학자들이 임나 강역을 최대한 넓히려는 이유

가야의 영토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조희승은 《가야사 연구》에서 가야의 영력을 밝히는 것은 “가야력사 발전 자체를 정확히 해명하는 데서도” 아주 중요하며, “지난날 일제가 조작해낸 반동적인 임나일본부설의 허황한 궤변을 짓부시는 데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말했다.        

일본 학자들은 임나의 강역을 최대한 넓히려고 한다. 자신들이 직, 간접적으로 지배했다는 임나의 영역이 넓을수록 일제의 조선침략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임나라는 말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일반인에게 임나는 생소한 단어인데 《일본서기》에도 임나라는 표현이 나오며 이는 가야의 별칭이다. 가야를 가리키는 말에는 임나 외에도 가라, 가락, 임나가라, 구야, 아야, 아라, 아나 등이 있다.) 

일제 패전 후에 《임나흥망사》(1949)를 쓴 스에마츠 야스카즈는 임나가 경상남북도는 물론 충청도 일부와 전라남도의 거의 대부분을 포함했다고 주장했다. 임나의 영역이 이렇게 넓다면 백제는 발붙일 곳이 없게 된다. 이처럼 일제 사학자들이 가야의 영역을 최대한 넓히려는 시도를 조희승은 일제의 ‘지배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가야의 령역을  《일본서기》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지명들에 기초한다고 하면서 가야의 령역을 오늘의 전라도와 지어는 충청도까지 포괄한다고 하면서 억지주장을 하였다. 그것은 가야의 령역이 넓어야 일본의 이른바 식민지 지배령역이 넓어진다는 지배주의적 관점에 바탕을 둔 궤변이었다.”(《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60쪽)

“가야의 령역을 밝히는 것은 가야사를 정확히 정립하는 데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라고 본 조희승은 가야의 최대 영역을 “대체적으로 동쪽으로는 경상남도 양산 일대의 가야, 북쪽으로는 경상북도 상주의 가라(부곡), 남으로는 김해와 거제도의 가라, 서쪽으로는 소백산 일대의 가야산계선”이라고 보았다.

▲ 일제가 고령에 세웠던 임나대가야 기념 비석. 조선총독부는 고령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일본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의 설에 따라 고령읍 객사에 임나일본부 현판을 설치하고, 제 7대 총독(1936~1942) 미나미 지로가 자필로 쓴 비석을 세웠다.
▲ 일제가 고령에 세웠던 임나대가야 기념 비석. 조선총독부는 고령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일본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의 설에 따라 고령읍 객사에 임나일본부 현판을 설치하고, 제 7대 총독(1936~1942) 미나미 지로가 자필로 쓴 비석을 세웠다.

제국시대 일본육군참모부가 창안한 임나일본부설

가야사를 둘러싸고 남북한, 일본 학계는 건국시기, 영역 등에서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임나일본부설’(남부조선지배론)을 둘러싼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말하는 임나일본부란 한마디로 말하여 고대시기 기내 야마토(大和, 日本)정권이 조선의 가야지방에 설치하였다고 하는 식민지 통치기관을 말한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메이지시대 일본의 참모본부가 만들어낸 학설이다. 1880년 일본 육군본부에서는 《황조병사》라는  책을 출판하였고, 여기에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등의 항목을 설정해 고대일본이 조선을 정벌하고 종속시켰다는 내용을 조작해서 집어넣었다.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임나일본부설의 핵심 내용은 “첫째는 서기 369년에 야마토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562년까지 통치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위치로서 한반도 남부의 가야가 곧 임나라는 ‘임나=가야설’이다.”(《이덕일의 한국통사》, 109쪽)이라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북한학계는 “4~5세기에 일본렬도의 사회경제적 단계, 권력수준으로 보아 기내지방에 있던 야마또 정권이 서부 일본도 통합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바다 건너 조선에 몇 백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유지할 군사력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탁상공론의 유치한 론리이며 황당무계한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조희승은 “임나일본부설은 일제의 조선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한 반동학설”로서 내용적으로 보면 다음의 두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하나는 조선민족의 넋을 빼앗아 사대주의와 민족허무주의를 심어놓음으로써 조선사람의 민족자주정신을 말살케 하려는데 있었으며, 또 하나는 일본이 옛적에 잃었던 땅(조선)을 되찾는다는 복고주의적 야심을 심어놓음으로써 일본을 대륙침략에로 내모는데 유효하게 리용하자는데 있었다.”( 《북한학자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 67쪽)

▲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어용사학자들이 가야지역 고분을 샅샅이 발굴(도굴)하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를 입증할 유물을 찾으려 했으나 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진은 경남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어용사학자들이 가야지역 고분을 샅샅이 발굴(도굴)하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를 입증할 유물을 찾으려 했으나 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진은 경남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북한 김석형의 분국설-임나는 일본에 있던 가야의 분국

일제가 창안한 임나일본부설을 둘러싼 논쟁에는 여러 쟁점이 있다. 임나일본부설, 임나=가야설을 비판하는 조희승은 임나설 창안 배경의 불순함, 일제강점기에 일본사학자들이 조선남부 가야 지역을 샅샅이 발굴(도굴) 했으나 임나일본부를 증명할 유적 유물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함,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의 위치를 무리하게 짜 맞춰 한반도 남부로 비정하는 문제, 광개토왕릉비 탁본의 조작 논란, 4세기 말까지 서부일본을 통일하지 못한 야마토 정권, 백제에서 하사한 칠지도,  일본 서부지방에서 발견되는 가야 유물·유적 등을 지적하며 임나일본부설이 사이비 어용학설이라고 비판한다. 이 같은 비판에 추가해 임나일본부설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북한학자 김석형의 분국설이다. 

▲ 북한 역사학자 김석형은 《초기조일관계연구》(1963)를 통해 임나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일본 서부 지역에 있는 가야의 분국이라 주장했고, 일본 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 북한 역사학자 김석형은 《초기조일관계연구》(1963)를 통해 임나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일본 서부 지역에 있는 가야의 분국이라 주장했고, 일본 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북한 역사학계가 내세운 분국설은 임나일본부가 애초에 조선 땅의 가야가 아니라 일본 땅에 있었다는 학설을 말한다. 김석형은 1963년 <삼한 삼국의 일본 열도 내의 분국설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분국설을 최초로 주장했다. 이를 이어받은  조희승은  《임나일본부 해부》에서 “요컨대  《일본서기》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를 아무런 타당성과 근거 없는 조선 땅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일본 땅에서 찾는 여기에 굳게 닫혀진 ‘임나일본부’ 해결의 열쇠가 있다.”라고 말하고, 임나일본부는 “조선의 가야가 아니라 서부일본에 존재한 가야인 것은 자명”하기에 일본열도 내에서 가야의 소국(분국)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조희승은 임나일보부 위치의 후보지로 “가와찌(河內) 일대, 기비(吉備) 일대, 이즈모(出雲) 일대, 규슈(九州) 일대”를 꼽았다. 이는 임나=가야이며, 임나일본부는 한반도의 남부 지역, 가야 땅에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학자와 남한의 강단사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그 궤를 달리하는 학설이다.

북한학자들이 임나가 한반도가 아닌 일본 서부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희승은 《가야사》에서 1)일본렬도 서부지역에 남아있는 가야계 지명 2)가야식 산성 3)가야계 유물을 통해 가야인의 일본열도 진출 및 정착에 대해 설명했다. 이를 통해 일본열도에 진출한 가야 사람들이 가야 소국을 이루고 살았음을 입증했다.

조희승은 《가야사》에서 특히 이또지마와 기비 지방에 진출한 가야인들의 활동을 그 사례로 제시했다. 이또지마에는 많은 가야계 지명이 남아 있는데 가야, 신라계 이름의 신사만 보아도 우로오신사, 이또 신사, 우까즈 신사, 요시다 신사, 야사까 신사, 시라야마 신사, 오오세 신사, 니노미야 신사, 야구모 신사 등 그 숫자가 꽤 많다.

이또지마 반도에는 또 가야 소국 사람들이 방어시설로 축조한 산성이 있다. 수문 구조, 산성의 위치 선정, 견고한 수문돌담과 같은 특징을 지닌 이런 산성을 일본학자들은 ‘조선식 산성’이라 부른다. 조희승은  ‘가야사’에서 “큰 산성은 막대한 재부와 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권력이 안받침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축성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조선계통 소국의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  판축기법, 수문 구조 등을 볼 때 조선식 산성으로 보이는 일본 오카야마의 키노죠 산성. 이 정도의 산성을 지으려면 국가권력이 안받침 돼야 한다.
▲  판축기법, 수문 구조 등을 볼 때 조선식 산성으로 보이는 일본 오카야마의 키노죠 산성. 이 정도의 산성을 지으려면 국가권력이 안받침 돼야 한다.

《일본서기》를 봐도 임나는 일본서부 지방

조희승은 ‘가야사’에서 “백 번 양보해서 소국(분국)론은 제쳐놓고도 기비지방에 가야가 있었고 가야국조(加夜國造)가 있었다고 한 것은 일본 측 기록(구사본기-국조본기)에도 있는 사실이며 고대시기(일본의 력사시대) 가야를 임나라고 부른 것도 사실”이라고 쓰면서 이러한 모든 역사적 사실은 “《일본서기》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임나국사, 임나일본부, 아라일본부 등이 일본서부의 기비 지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399쪽)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서기》의 웅략기, 계체기, 흠명기 등에 나오는 임나는 조선의 임나(가야)가 아니라 기비지방에 있었던 가야라는 것이 북한학계의 주장이다. 조희승은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405쪽)에서 “ 《일본서기》의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산, 마을, 강 등 여러 지명들을 조선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니 기비지방에서는 적지 않게 비정할 수 있었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이뿐 아니라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인물을 살펴보아도 “그것이 조선의 가야가 아니라 일본렬도 기비지방에서 찾을 수 있는 인물이였음을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이처럼 역사 자료, 유물, 유적지를 근거로 북한학자들은 일본 서부에는 가야의 소국이 있었으며, 이것이 바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 ‘임나일본부’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봐야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이나 기사들을 사실에 부합되게 해석할 수 있으며, 조선 땅에다 갖다 맞추면 억지로 꿰맞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한학계에서 임나 분국설에 동조하거나 유사한 입장을 밝히는 학자는 대부분 재야사학자들이다. 남한 내의 민족사학자들의 상당수(최재석, 문정창, 이병선, 황순종)는 대마도가 임나라 주장하고, 일부(김문배, 김인배)는 규슈라 보고 있다. 윤내현(단국대 사학과 명예교수)은 최근 오카야마가 임나라는 견해를 밝혔다. 

▲ 일본 오카야마의 기노죠산성에 전해져 내려오는 우라전설은 기노죠 산성의 축조자가 가야의 주민집단임을 증명해준다. 사진은 기노죠산성 부근에 있는 우라유적비.
▲ 일본 오카야마의 기노죠산성에 전해져 내려오는 우라전설은 기노죠 산성의 축조자가 가야의 주민집단임을 증명해준다. 사진은 기노죠산성 부근에 있는 우라유적비.

북의 분국설 비판하는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

반면 강단사학계에서 북의 분국설에 동조하는 학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은 북한의 분국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김석형의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론’은 관련 자료를 일방적으로 한국 측에 유리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2010

“김석형의 분국설은 북한에서는 아직도 정설이며, 한국에서도 모자란 복제품 수준의 주장이 이따금씩 제기된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이제 학설로서 생명력을 거의 상실했다. 그의 학설이 성립하는 결정적 근거였던 일본열도 내 ‘조선식 산성’이 6~7세기 대 유적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위가야, 《욕망 너머의 한국고대사》, 2018)

‘조선식 산성’이 6~7세기에 세워진 유적이라는 주장은 일본학자들이 먼저 했다.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셈이다. 이에 관해 조희승은 이미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1990)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학자들은 그것이 조선식 산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든지 묵살해보려고 애써오다가 산성이 틀림없다고 인정되자 이번에는 또 그 축조시기를 6세기 중엽 이후로, 다시 말하여 야마또정권의 서부일본 통합시기와 일치시키면서 서부일본의 수십 개 조선식 산성을 모두 6세기 이후로 끌어내리고 말았다.”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임나는 가야가 아닌 일본 서부지역이라고 보는 북한학계의 분국설을  남한의 학자들도 비판하는 것에 대해 조희승은 “설상가상으로 일본에 추종하는 남조선의 일부 친일학자들이 이 부분 관계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지도 않으면서 우리 학계의 정당한 학설을 ‘과학을 민족적 감정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느니 뭐니 하면서” ( 《북한학자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131쪽) 헐뜯었다며 반박을 가했다.

여전히 위험한 임나일본부설

지금까지 가야사를 둘러싼 남북한, 일본 역사학계의 입장을 살펴봤다. 가야의 건국시기, 영역, 임나의 위치를 정확히 하는 것은  임나일본부설을 제대로 비판하는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백여 년 전 조선침략을 위해 일본군 참모본부가 창안한 임나일본부설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이 지금 시기에 왜 중요한가. 

일본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에 근거해 동조동근론, 내선일체론, 정한론을 펼쳤다. 이들은 식민 통치 기간에 “(한일) 병합은 결코 이 민족을 새로 결합한 것이 아니라 일단 떨어져 있었던 것을 본래대로 된 사정을 서술”, “제국에 복귀한 이상 빨리 일본국민으로 동화하여 함께 천황폐하에게 충량한 신민으로 되어야 한다.”, “조선이라는 것들에 쓸데없는 자부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설교하면서 한국 사람들에게 한국역사 발전의 후진성, 타율성, 외인론, 반도사관을 주입했다.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일본학자들은 말로는 황국사관을 뿌리뽑는다고 하면서도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의 지배통치기관이었다는 ‘남부조선지배론’에 대해 근본적인 수정을 하지 않고 있다. 조희승은 이 같은 일본학자들의 비양심적인 태도에 대해 “1980년대에 들어서는 일시적으로 반성하는 척 하던 체면도 벗어던지고 ‘이전의 견해주장이 옳았다.’라고 우기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남한의 일부 사학자들도 근래는 임나일본부를 야마토왜의 식민지 지배 통치기관이라 말하지 않지만 교역기관, 외교기관, 군사활동 등의 표현을 빌려 임나일본부설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2019년 12월~2020년 3월 사이에 국립박물관에서 진행한 가야특별전 ‘가야본성(本性)’을 둘러싸고 가야사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 4월 민족주의계열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가야본성 전시회의 일부 연표와 지도, 설명문이 《일본서기》, 임나일본부설, 일본 극우파 역사관을 반영해 작성한 것이라며 감사원에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 전시회의 역사왜곡 경위 감사 청구’라는 공익감사청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가야사, 임나일본부설을 둘러싼 ‘역사전쟁’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남북한, 남북일 학술대회를 통해 임나일본부설과 임나=가야설, 가야 분국설 등에 대해 심층적인 학술토론이 전개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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