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혁명 60주년과 오늘(2)
4‧19혁명은 사대보수 부패특권의 일백년 철옹성을 깨뜨린 민중혁명의 전취물이었다. 자주 민주주의의 민중적 염원을 신생독립의 통일주권국가 수립으로 민족역사의 새 지평, 국민 단합의 무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었던 해방 국면은 격랑과 노도의 시절이었으나 분단과 독재가 초래된 좌절의, 또 다른 비극의 분기점으로 귀결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체한 새로운 패자 미국 지배세력이 등장하고 이것에 의존한 통치 세력은 참으로 국민 대중에게 거칠고 사나운 전제적 폭력이었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공화제의 헌정 합의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독재는 전세기적 폭압이었다. 명목상의 삼권 분립에도 불구하고 입법부 국회는 발췌개헌, 사사오입, 삼선개헌, 종신권력의 법제적 추인으로 정부의 시녀에 지나지 않았고 경찰, 검찰권력과 차별되지 않는 사법부도 정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한 횡포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전 반공 매카시즘으로 독립투사를 빨갱이로 때려잡았던 일제 통치 시기의 관료를 그대로, 민주주의 압살에 써먹었던 친일파 지배구도의 연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2차대전 종결의 전승 강대국의 동아시아 새 질서는 전쟁범죄자 일본을 대신, 식민 고통의 한반도를 갈라 쪼개 먹는 것이었다. 소위 미국의 마샬 플랜이란 것으로 일본에게는 경제를 복구하는 구제정책, 한국에는 미공법 480호에 의한 잉여농산물 처리장으로 농업을 망치고 산업을 지체시키고 심지어는 정부 재정도 밀가루와 원면 원조물자라는 것을 대충자금으로 대체하여 자립경제를 망쳐먹는 형국이었다. 절대적 빈곤, 만성적 실업의 악순환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는 민생고가 이승만 정권의 말기적 현상이었다. 멸공 북진통일의 그 엄혹한 공포 속에서도 평화통일을 공약으로 한 진보당 조봉암 대통령 후보에게 사실상 압도적 투표를 던졌고, 그래서 정치적 대항마를 죽여버렸다. 그것은 정적을 제거하는 이어져 온 정치적 모략의 사법살인이었다. 민중의 고통과 국민의 불만은 쌓여갔고 저항을 누르는 전가의 보도는 국가보안법과 그 개악이었다. 그리고 경향신문 폐간을 자행한 언론 탄압이었다. 끝내 대통령 선거가 종신권력의 차단과 독재정권의 종언으로 왔다. 부정선거 음모, 불법 투개표 진행, 가짜 당선의 조작이 국민 항거의 활화산으로 터졌다. 그것이 1960년 3‧15 대통령 부정선거의 진상이었다.
4‧19혁명은 오랜 민중 저항의 축적력을 바탕으로 2‧28 대구학생데모, 3‧15 마산시민항쟁, 김주열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가 바다에서 인양되는 것을 기폭제로 재연한 4‧11 2차 마산시민봉기 그리고 들불로 전국으로 확산된 국민궐기의 정점, 경무대 권부로 진격한 4‧19혁명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계엄이 선포되고 광화문에 군대 탱크가 포진되고도 시민 항쟁을 제압할 수 없었다. 4‧25 대학교수단 시위가 이어지고 드디어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라는 이름으로 권좌에서 쫓겨난다.
독립투사로 국부로 치장돼 미주로부터 건너와 완벽한 지도자로 각색되었던 그 카리스마의 이승만이 역사에서 퇴출될 것을 세계도 국내에서도 감히 상상할 수 있었으랴. 그러나 역사의 심판은 엄정했고 민중의 위력은 막강했다. 이승만 후계자로 무리수로 부통령으로 만들었던 이기붕과 그 일가는 권총 자살로 패가망신하고 자유당은 산산이 해체되었다. 이어 대한노총 어용조직이 무너지고 민주노조가 싹이 돋고 전국 방방곡곡의 토호권력 척결의 농촌 농민의 부활이 전개되었다. 반민특위로 좌절된 친일파 척결의 새로운 시도가 가동되고 민주주의 민중의 의지는 이제 자주와 통일의 정방향으로 전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4‧19혁명의 민주주의 전취물은 또 다른 사대 수구 기득 보수 특권 정치집단이 걷어먹는 것이었다. 혁명의 주체 세력과 대체 권력의 이반, 이것이 혁명의 좌절과 역사의 반동을 가져오는 아킬레스 건이다.

4‧19혁명은 1차적으로 신구파 보수야당 민주당의 집권 정쟁으로 혼란에 빠진다. 이어 2차적으로 친일세력 친미질서 분단반공 군사독재의 5.16 쿠데타로 좌절되고야 만다. 그것을 일컬어 미완의 4‧19혁명이라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이 공화제 시민권력을 인류사에 헌정하고도 테르미도르 반동과 나폴레옹 독재정권의 등장으로 귀결되고 다시 빈 국제 반동질서로 고착되었던 혁명의 전진과 반동의 역사적 경험칙과 다를 바 없다. 나치 점령 치하 레지스탕스로 투옥되었던 역사학자 르페브르가 감옥에서 써낸 프랑스대혁명사의 세기적 저작은 삼부회 귀족혁명, 국민회의 시민혁명, 노동자혁명, 농민혁명의 네 단계로 혁명의 주체세력과 지속적 발전단계를 서술하고 있다. 우리 4‧19혁명도 1960년 4.19로부터 1961년. 5.16, 13개월 동안은 역동적이며 발전적이었으며 그것의 진수는 자주 민주 통일이었다. 그 성취는 드디어 우리 현행 헌법에 그대로 명시되어 있으며 이 질서와 가치를 거역하는 그 어떤 것도 역사에서 패배하고 소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추동될 수 있었던 것은 혁명 주체 세력의 정치조직 결성과 역할에 기인한다. 시민혁명의 중심 역할을 했던 정치적 주도 세력, 국민의회 오른쪽 자리가 온건파 지롱드당, 왼쪽이 급진파 자코뱅당, 이것이 좌우익의 기원이다. 냉전분단 고착의 통치술로 좌우대립, 이데올로기 대립의 확대재생산,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을 그대로 연장한 언필칭 좌익이니 종북이니를 정치적 도구로 통치의 술수로 써먹는 것은 역사 구태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4‧19혁명의 통한의 장은 당시 혁명주체 민중을 껴안는 조직적 정치세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반세기가 지나도록 이렇게 미완의 4‧19혁명을 현재적 역사 과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자 농민의 민중적 조직의 성장, 그리고 그것을 결집하는 진보적 정치세력이 중심 자리하고 있다. 길고 험난한 투쟁을 거쳐 전진하고 있는 4‧19정신을 담지하고 있는 불굴의 정치세력 진보정당이 장성하고 있다. 오늘의 진보정당은 민중승리 민주주의 승리의 확실한 대들보이다. 연면한 4월혁명, 현재 진행형의 4월혁명은 노동자투쟁 민중항쟁에 대한 온갖 물리적 법적 탄압을 박차고 고양되는 진보정치역량의 단합속에서 기필코 자주적 평화통일 민주주의 민중승리의 금자탑 4월혁명완수를 쟁취할 것이다.(끝)
![▲ 조영건 서울법대생(3년,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안경 쓴 이)이 1960년 4월 19일 오후 2시 서울 경무대 앞에서 시위중 총에 맞은 중학생을 부축해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사진 : 인터넷 캡처, 수유리 4.19혁명 자료관에도 보관되어 있다.]](/news/photo/202003/10190_20363_2114.png)
조영건
전 사월혁명연구소장
6·15실천남측학술명예위원장
경남대학교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