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창준 세상돋보기]

30년 전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그랬던 것처럼, 우연한 사건이 역사적 전환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코로나19가 한반도를 급습하고 있는 2020년, 한반도는 우연한 기회를 맞이했다. 한미 양국이 군사연습의 중단을 결정한 것이다. 물론 이 결정이 평화의 메시지는 결코 아니다. 군사연습을 하려했으나 하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연습의 중단은 기회가 분명하다. 코로나19가 발생하지 않았고, 그래서 군사연습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한반도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역설적이게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조건을 만들어 준 셈이다. “전반기 연합지휘소 훈련을 별도의 공지가 있을 때까지 연기하기로 결정”했으므로 적어도 2~3개월의 기회의 시간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지난 해 말 전원회의에서 북한은 “우리는 결코 파렴치한 미국의 조미대화를 불순한 목적실현에 악용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미 대화 중단을 결정했다. 또한 “지금까지 우리 인민이 당한 고통과 억제된 발전의 대가를 깨끗이 다 받아내기 위한 충격적인 실제행동에로 넘어갈 것”이라며 군사행동을 예고했다.
즉 북한은 지난 해 1월 신년사에서 언급했고,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도 강조했던 “새로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새로운 길”은 비핵화대화의 중단이며, 군사행동의 길이며, 핵증강과 보유의 길이다. 미국이 새로운 셈법을 내놓지 않는다면 북한은 이번 전원회의에서 제시한 “새로운 길”을 가게 될 것이며, 북미 관계는 또 다시 심각한 대결과 충돌의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한미 군사연습의 중단으로 3월의 위기는 봉합되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냉정한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 제재하려는 미국과 제재를 돌파하려는 북한, 군사행동을 예고한 북한과 그것을 무시하고 있는 미국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여전히 알 수 없으며 그 어느 나라의 정부도 그것을 중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북한과 미국 두 나라는 자신의 국익을 건 최고 수준의 대결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북미 사이를 중재한다는 사고는 이미 지난 해 하노이 회담 이후 비현실적이라는 것이 판명났다. 백번 양보해서 지난 해 5월 판문점에서의 북미 정상회담이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 노력의 결과였다고 하더라도 그 시도는 실패로 확인되었다. 우리 정부건, 중국 정부건 북미 사이를 중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사고 역시 전환되어야 한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험한 국제정치 현실에서 한국은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힘이 없다. 한반도의 정세와 동아시아의 정세는 북한과 미국, 미국과 중국이 결정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정세가 악화되더라도 그 파국을 줄이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북미 관계가 대결과 충돌의 길로 가더라도 남과 북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즉 지금 필요한 것은 중재론이 아니라 남북관계 발전론이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올해 들어와 내놓은 개별관광 카드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개별관광 카드는 남북관계 정체와 파국의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북한이 수용하지 않으면 북한 때문에 안된다는 논리로 이어질 것이다. 시민들의 호응이 적으면 시민의 통일 의식 탓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포착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해답은 간단하고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첫째, 한미 군사연습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냉전 세력들은 코로나19가 진정되는 대로 군사연습을 강행하려 할 것이다. 군사연습에 동참한다는 것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 동참한다는 메시지를 북한에 보내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남북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미국이 하고자 하는 것을 문재인 정부가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동참하지 않을 권리는 문재인 정부도 갖고 있다. 군사연습을 하지 말도록 트럼프를 설득하는 비현실적인 목표보다 군사연습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목표가 될 것이다.
둘째, 한미 워킹그룹 회의를 해체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개별관광 카드마저 미국은 수용하지 않고 있다. 미국 대사가 개별관광 역시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못박지 않았던가. 한미 워킹그룹 회의는 남측 당국의 대북 정책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워킹그룹회의를 유지한다는 것은 주권을 포기한 것이 된다.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서 벗어났을 때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치적 조건을 확보하게 된다.
문재인 정부는 대북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재조정할 시간을 확보했다. 그러나 시간은 많지 않다. 고작 2~3개월 주어졌을 뿐이다. 이 기회를 살릴 것인가, 이 기회마저 죽일 것인가. 문재인 정부의 선택이 2020년 남북관계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