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공과 매복전으로 적의 예봉을 꺾은 흥화진 전투란장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정예 기병을 끌고 고려를 침략한다는 소식을 접한 고려 조정은 1018 년 12월에 급히 방어대책을 강구했다.이미 거란의 침략위협에 대처하여 10 월에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파견되어 가 있던 평장사 강감찬(姜邯瓚)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하여 방어군이 편성되었다. 그들이 거느린 고려 방어군의 수는 20만이 넘는 방대한 역량이었다.강감찬은 영주(寧州, 평북 녕변군)에 지휘부를 두고 관문 요새인 흥화진(興化鎭)에까지 방어진을 폈다. 강감
고려가 대적한 거란침략군은 기병을 위주로 한 기동력이 매우 빠른 강적이었다. 1010 년 11월 거란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계기로 고려의 내정예 간섭하던 끝에 직접 40만의 침략군을 끌고 고려로 쳐들어 왔다.고려군은 적들의 침략기도에 대처하여 적의 압록강 도하장을 틀어쥐고 배후를 위협하면서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 계선에서 결정적 타격을 주어 청천강 이북 지대에서 최종적으로 소멸하기로 계획했다.첫 전투는 고려의 관문요새인 흥화진(興化鎭)에서 벌어졌다. 흥화진 방어자들은 도순검사 양규(楊規)의 지휘 아래 용감히 싸워 성을 지켜냈다
역사에는 강경한 군사외교전으로 강대한 대군을 물러가게 한 전쟁도 있으니 그것이 바로 993년 제1차 고려-거란전쟁이었다.그러나 전장에서의 승리도 철두철미 자기 힘이 강하고 적의 약점을 잘 파악한 상황에서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또한 이 전쟁의 교훈이다.10세기 말 거란 성종(聖宗)은 고려가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하여 동경(東京, 요녕성 요양시) 유수 소손녕(蕭遜寧)에게 고려를 치게 했다. 소손녕이란 장수는 담력이 있고 모략에 능했다고 한다.거란의 침략음모에 대한 통보를 받은 고려조정은 내사시랑 서희(徐熙)를 중군사로, 시중 박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