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본 일본의 역사(2)

극우로 치닫는 일본을 극복하고, 토착왜구를 박멸하자는 운동이 연일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에 일본군국주의의 뿌리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연재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일본에 계신 강성은(康成銀) 조선문제연구센터장의 <조선에서 본 일본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바랍니다.{편집자}

1.일본렬도에서의 주민의 형성,왜의 왕권과 조선삼국
2.일본,천황의 창출과 신라・발해
3.헤이앙・가마꾸라시대의 일본과 고려,몽골의 래습과 동아시아
4.무로마찌시대・쇼꾸호우정권기・에도시대의 일본과 조선-교린,그 허실
5.근대일본의 조선침략 개시-정한론과 강화도조약
6.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제1차 조선전쟁=동북아시아전쟁)
7.대한제국과 로일전쟁(제2차 조선전쟁=동북아시아전쟁)
8.대한제국의 페멸,≪한국보호조약≫의 강요
9.≪무단통치≫와 3.1운동
10.≪문화정치≫와 동화주의
11.≪황국신민화≫정책
12.전쟁동원
13.3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제3차 조선전쟁=동북아시아전쟁)-해방과 분단
14.해방후 제4차 조선전쟁=동북아시아전쟁
15.≪한일조약≫과 랭전의 장기화
16.세계에서의랭전의 종시과 조선반도

<필자 강성은 조선문제연구센터장 약력>

1950년 일본 오사까에서 2세로 태여남
1973년 조선대학교 졸업
그후 조선대학교에서 교원을 함.조선대학교 력사지리학부 학부장,도서관장,부학장을 력임,2017년 정년퇴직,현재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 쎈터장으로 있음

전공은 조선근대사

주요 저서
『一九〇五年韓国保護条約と植民地支配責任―歴史学と国際法学との対話』創史社、2005年刊、2刷2010年。2008년에 선인에서 번역본이 출판(한철호역) <1905년 한국보호조약과 식민지지배책임-력사학과 국제법학의 대화>

『朝鮮の歴史から「民族」を考える―東アジアの視点から』<明石ライブラリー139>、明石書店、2010年刊、2刷2016年。

아스까불교와 조선삼국

6세기에 들어서서 신라의 급성장은 드디어 가야를 통합하고 문자 그대로 고구려・백제・신라에 의한 대항의 양상이 깊어졌다. 게다가 중국의 정세가 크게 변화한다. 북조로부터 나온 수가 589년에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켜 남북조의 분립에 종지부를 찍었고, 7세기에 들어서면 당이 이에 교체되어 한층 강력한 체제를 꾸려나갔다. 강대한 통일제국의 출현이라는 동아시아정세 속에서 왜국도 조선삼국과 함께 긴박한 대응에 쪼들리고 동세기말에 왜국은 ≪일본≫이라는 고대의 통일국가를 완성하는데 이르렀다.

인디아로부터 중앙아시아 경유로 중국에 전해진 대승불교가 조선반도로 전파하는 것은 4세기였다. 372년 중국 북조의 전진(前秦)에서부터 고구려에 중이 파견되고 불상 및 경문이 들어왔다. 384년에는 남조의 동진(東晉)에서 백제에, 5세기에 고구려로부터 신라에로 불교가 전해졌다. 왜국에는 538년과 552년 등 몇 번이나 백제의 성왕(聖王,또는 聖明王)이 낌메이(欽明)천황에게 불상과 경전을 보내었다.

왜에로의 불교 전래는 조선반도의 정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였다. 백제는 고구려와 오래전부터 대립을 계속하였다. 475년 백제는 한산성(지금의 서울)으로부터 웅진성에 천도하고 538년에는 남쪽의 사비성(지금의 부여)에 천도하였다. 551년에는 한산성 탈회에 성공하였으나 이듬해에는 신라에 의하여 한산성이 빼앗기고 554년에 성왕이 전사하였다. 562년에는 신라가 가야를 병합하였다.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의 대립속에서 왜와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일탑삼금당가람배치 호우꼬우지

낌메이천황 밑에서 불교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소가씨(蘇我氏)였다. 소가씨는 도래인(渡來人)과의 관계가 깊고 새로운 문화인 불교의 도입에 적극적이였던 유력한 씨족이었다. 불교의 도입에 반대한 모노노베씨(物部氏)와의 다툼에서 592년에 승리한 소가씨는 592년 수이꼬(推古)천황의 즉위에 영향력을 주었으며 다음 해에는 쇼또꾸(聖德)태자가 섭정한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소가씨의 절로서 건립된 것이 호우꼬우지(法興寺-일명 아스까데라<飛鳥寺>)였다. 이 절은 백제의 지원을 받아 승려나 사공, 기와박사, 화공 등이 파견되었다. 그 후 고구려로부터 불상제작을 위해서 황금 320량이 보내여왔다. 승려로 고구려로부터 혜자(慧慈), 백제로부터 혜총(慧聰)이 왔다. 596년에 완성된 호우꼬우지는 일탑삼금당가람배치(一塔三金堂伽藍配置)형식으로서 고구려의 청암리토성페사, 상오리페사, 정릉사와 양식이 같았다. 혜자는 615년에 귀국할 때까지 쇼또꾸태자의 스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외교의 참모적 역할을 하였다.

백제와 격렬하게 대립하고 왜와도 대항관계에 있었던 고구려가 왜 이 시기에 왜와의 접근을 노렸는가. 고구려가 처음으로 왜국에 사자를 파견한 것은 570년이고 572년과 이듬해에도 사자가 왔다. 6세기에 신라가 급속히 성장하고 영토를 확대하여 552년에는 고구려나 백제를 격파하고 서해안지역으로 진출하여 해로를 통해서 직접 중국과 통행할수 있게 되었다. 589년에 수가 중국을 통일하니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기 수에 조공하여 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수와 고구려 사이의 긴장은 높아지고 598년에 드디어 수의 문제가 30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게다가 이러한 정세에 호응하여 수와의 동맹관계를 강화해온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위협하는 움직임을 강화한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정세, 조선반도의 동향속에서 고구려와 왜가 접근하였다. 600년에왜가 출병하여 신라와 싸운 기사가 있다. 또한 601년 왜는 고구려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공격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그리고 602년에는 쇼또꾸태자의 동생인 구메노미꼬(來目皇子)를 장군으로 한 2만 5천명의 군대를 신라에로 출병하려고 하였으나 구메노미꼬가 병사하였으므로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602년 백제가 신라영토에 들어갔고 603년에는 고구려가 신라에 의하여 점령되고 있었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왜와 고구려・백제 사이에는 연휴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 쇼또꾸 태자

쇼또꾸태자의 외교에 의하여 견수사(遣隋使)가 파견된다. 607년 오노노이마꼬(小野妹子)는 ≪해가 뜨는 곳의 천자(天子)가 서(書)를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 보낸다≫는 국서를 지참한다. 양제는 왜왕이 ≪천자≫를 자칭한 데 대하여 ≪무례≫하다고 불쾌감을 보였으나 귀국하는 이마꼬와 함께 사신을 파견하였다. 왜왕은 기뻐서 ≪우리는 듣는다. 바다 서쪽에 대수례의(大隋禮義)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조공을 하기로 한다. 우리는 오랑캐(夷人)이다. 바다의 구석에 있고 예의를 모른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왜 긴박한 정세속에서 감히 수를 노하게 하는 사절을 보내야 했는가, 어째서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가. 신라가 수에 접근하고 고구려가 수와 신라에 협격 당하고 한편 왜가 고구려・백제와 연휴하여 신라에로의 원정을 실시하려고 하고 있었다. 일부러 상대를 자극하는 국서를 가진 견수사는 바로 이러한 국제정세속에서 파견되었다. 거기에는 쇼또꾸태자의 외교참모였던 혜자, 따라서 고구려의 전략이 반영되어 있지 않았을까. 거만한 태도의 왜를 의식시킴으로써 수의 고구려공격을 견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무례한 사절에도 불구하고 양제가 관대하게 보고 국교를 성립한 것은 왜와 고구려가 결부되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대등한 국가관계를 명시한 국서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고구려의 수에 대한 대결의 기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의 고구려침략은 612년과 614년에도 계속되었으나 을지문덕장군 등의 활약으로 이를 방어하였고 오히려 수는 고구려원정의 실패를 계기로 하여 멸망하였다.

▲ 고우류지 미륵보살상

견수사의 파견은 긴장한 동아시아세계 속에서 왜에 있어서 수와의 관계를 확보하고 신라와의 관계를 호전하는 계기로 되었다. 이후 불교에서도 신라불교와의 교류가 깊어졌다. 교또 우즈마사(太秦)에 있는 고우류지(廣隆寺)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아스까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일본패전 후의 신제도하에서 조각부문의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고우류지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603년에 도래계씨족의 하따노까와까쯔(秦河勝)가 쇼또꾸태자부터 불상을 받아 열렸다고 전해지고 있고 이 미륵보살상이 태자로부터 하사된 것이라고 생각되여왔다. 그런데 이 미륵보살상이 소나무로 제작되고 있다는 것이 판면되고 누가 어디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새삼스럽게 문제로 되었다. 아스까시대의 불상은 거의 녹나무로 만들어졌고 헤이앙(平安)시대 이후는 노송나무가 많아지는데 조선에서는 소나무를 많이 썼다. ≪일본서기≫에는 쇼또꾸태자가 죽은 후 623년에 신라로부터 불상을 보내오고 고우류지에 안치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 미륵보살상도 조선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유력하게 되었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금동제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고우류지의 것과 매우 닮았다. 미륵신앙은 신라에서 유행하였고 출처가 명백한 현존하는 반가상 중에 대형은 거의 신라제로 볼 수 있다. 신라에서의 반가사유상의 양식의 변천속에서 보면 2개의 미륵상은 같은 계통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있다.

어쨌든 아스까(飛鳥)불교가 백제・고구려만이 아니라 신라불교와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있었다는 것을 2개의 미륵보살상이 보여주고 있다. 아스까불교에서 볼 수 있는 조선삼국의 불교와의 연계는 왜국의 외교적인 모색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다이까의 개신과 백강전투

쇼또꾸태자의 시대에 시작한 7세기의 왜국에서는 다이까(大化)의 개신을 거쳐 권력이 집중되고 텐무(天武)천황・지또우(持統)천황의 시기에 이르러 율령체제가 확립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동아시아세계의 동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수가 멸망하자 중국에서는 618년에 창건된 당이 전토를 장악하고 보다 강력한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조선삼국은 사신을 보내여 당의 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긴장관계는 해소되지 않고 당은 본격적으로 고구려에 대한 압력을 강화한다. 당제국의 출현이라는 사태 앞에서 640년대에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국내체제를 강화한다. 642년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고 당에 대한 대결자세를 한층 선명하게 하였다. 전해에 백제에서도 의자왕이 반대파를 일소하고 642년에는 대군을 이끌고 신라에 침공하였다.신라는 이에 대하여 고구려에게 동맹관계를 맺고 백제를 공격하자고 호소하였으나 거절 당하자 643년에 당에 사신을 보내고 구원해줄것을 요청하였다.당은 드디여 645년에 대군으로 고구려에 침공하였다.신라는 이에 호응하여 수만의 군대로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였다. 백제는 이 틈에 신라에게 빼앗겼던 여러 성들을 탈취하였다. 당은 647년, 648년 계속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당의 원정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고 조선삼국의 공방전이 격렬하게 전개되고있는 645년 왜국에서 다이까의 개신이 일어났다. 나까노오오에노오우지(中大兄皇子)를 중심으로 한 그룹에 의하여 소가노이루까(蘇我入鹿)가 암살되여 부친인 에미씨(蝦夷)가 자살하여 권세를 잃은 소가씨가 멸망하였다. 당시의 왜국은 긴급하게 외교노선을 확정하여야 할 정세에 있었다. 고구려나 백제로부터 사절이 파견되어왔고 왜국에서도 고구려・백제・신라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새로 수립된 개신정부는 전통적인 친백제정책으로부터 급속히 신라와의 관계를 깊게 해나갔다. 개신에서 큰 역할을 논 다까무꼬노구로마로(高向玄理)가 646년에 신라에 파견되고 이듬해에는 신라의 김춘추가 왜에 갔다.또 한 김춘추는 648년에 당에 갈 때 개신정부는 그에게 당에로의 친서를 의탁하였다. 왜국의 내부에서는 외교로선을 둘러싸서 대립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드디어 당・신라연합군은 먼저 660년에 백제를 공격하였다. 당의 수군은 금강을 거슬러올라와, 신라군은 동쪽의 육로부터 동시에 수도 사비성을 공격하였다. 사비성은 함락하고 웅진성에 도망친 의자왕이 항복하여 백제는 멸망하였다. 그러나 왕족의 귀실복신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백제부흥을 위한 세력이 봉기하였다. 귀실복신은 왜국에 원군과 함께 왜국에 있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또는 여풍장)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부여풍과 5천 명의 호위군을 맞이한 백제부흥군은 금강하류연안에 있는 주류성을 거점으로 항전하였다. 왜국은 663년에 다시 2만 7천명을 주류성을 향해 증파하였다. 금강하구의 백강에는 당의 수군이, 육지에서는 신라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왜군은 대패하였으며 주류성도 함락하였다. 백제가 멸망하자 화살은 고구려에 돌려졌다.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내부대립이 격화된다. 당・신라연합군과의 전투 끝에 668년 드디어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은 멸망한 백제의 땅에 웅진도독부, 고구려땅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지배하려고 하였다. 신라는 671년 당과의 전쟁으로 전환하고 676년 드디여 당군을 조선반도에서 구축하였다. 조선반도는 신라에 의하여 통합되었다. 고구려의 유민의 일부는 698년에 말갈인과 함께 발해국을 건국하였다.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자칭하였고 이 시대를 남의 신라와 북의 발해가 병립한 남북국시대라고도 한다.

≪일본≫,≪천황≫의 창출-≪일본형화이사상≫

백강전투에서 패배한 왜국은 매우 긴장하였다. 규슈와 서일본의 각지에 사끼모리(防人)나 산성을 구축하는 등 방비와 국가체제를 정비강화하였다. 그러나 당・신라연합군과 고구려의 전쟁을 앞두고 왜와의 관계를 배려하여야 했고 게다가 당과 신라간의 전투가 시작하였기 때문에 왜국의 위기는 회피되었다. 668년과 669년에 견당사가 파견되고 신라와의 관계도 수복되었다.

이런 속에서 672년에 임신의 란(壬申亂)을 거친 후 템무천황과 지또우천황 시기에 율령제도가 확립하였다. 그런데 템무・지또우조에는 견당사가 파견되지 않았다. 한편 이 기간은 신라에로의 사절의 왕래는 빈번하게 있었고 율령의 도입에는 신라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찬황≫이라는 명칭이 성립한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제도로서 성립한 것은 7세기후반 템무・지또우조의 율령제도의 확립기였다고 볼 수 있다.

≪구당서≫에 의하면 702년의 견당사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일본≫의 사자라고 밝혔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698년의 기록에 ≪일본국의 사자가 왔다≫고 쓰이고 있다. 바로 이 시기에 ≪일본≫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 발해, 신라, 일본이 병립되는 동아시아세계의 윤곽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국으로부터 ≪일본≫이 창출되면서 그 수장도 ≪천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칭호는 중국황제를 강하게 의식하여 그에 비기고 창안되었다. 천명을 받은 중국황제가 세계의 중심에 군림하고 주변국의 수장은 이에 조공하여 작위를 받는다. 한대 이후의 동아시아에는 이러한 책봉관계를 축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가 형성한다. 많은 책봉국을 가지는 것으로서 황제의 권위는 높아지고 주변국의 수장들은 책봉을 받음으로써 지배지역에서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아서 군신관계를 맺은 ≪동이≫(東夷) 여러 족의 수장들 속에서도 스스로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의사(擬似)적인 책봉관계를 설정하려는 지향성을 볼 수 있다. 일찌기 고구려의 ≪대왕≫(大王)이 그러한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의 ≪천황≫도 중국의 동방에서 또 하나의 황제가 되고자 하는 칭호로 설정된 것이다. 중화제국의 축소판을 만들려고 하는 지향을 체현한 칭호가 천황이었다. 천황 즉 황제인 이상 조공국이 존재해야 한다. 일본열도 내의 이적(夷狄)으로 에조(蝦夷)나 하야또(隼人)를 자리매김하고 조선반도의 여러 나라들이 조공국으로 설정된다. 천황이란 그 개념의 근본에서 조선을 복속시킨 존재인 것이며 그렇지 못하는 천황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할수 있다. 한편에서는 중국에 대허여 종속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타방에서는 조선의 여러 나라에는 종주국으로서 군림하려는 고대의 상태를 중화사상의 축소판인 ≪일본형화이사상≫(日本型華夷思想)이다고 말할 수 있다.

▲ 일본서기

조선복속을 불가결의 요소로 한 천황칭호가 창출된 시기는 왜의 왕권이 미치는 범위가 최종적으로 일본영도내에 한정되는 것이 결정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때까지의 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제국과 경합하면서 조선반도에도 발자취를 남기었다. 그러나 백강전투에서 패배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합함으로써 왜의 조선반도에서의 활동의 여지가 없어지게 되었다. 왜의 왕권의 활동영역이 최종적으로 일본열도 내에 한정되는 것이 확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 여러 나라의 복속을 불가결의 요소로 하는 ≪천황≫칭호가 창설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처음부터 허구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조선 역대국이 천황의 덕을 흠모하여 조공해왔다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템무천황은 율령제정의 명령과 동시에 역사서의 편찬을 명하고 720년에 ≪일본서기≫(日本書紀)로 완성한다. 이에는 진구우(神功)황후의 삼한정벌이나 미마나일본부의 이야기 등 조선복속의 역사가 묘사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창출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이야기가 그 후의 조선관을 규정하여 왔던 것이다.

그 후 중국과의 관계에서 알본측의 기록은 ≪린국≫에 알맞는 대등한 외교사절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측은 ≪조공사≫로 부르고 취급도 다른 조공사절과 다름이 없었으며 ≪천황≫의 칭호는 쓰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라・발해에 대해서는 ≪천황≫의 칭호를 쓰고 중국황제가 내리는 조서(詔書)와 비슷한 형식의 문서를 발급한다. 그리고 신라나 발해부터의 사자에 대해서는 상표문(上表文)의 지참을 요구한다. 이에 대하여 신라・발해는 강하게 반발한다. 현실로부터 눈을 가리고 오로지 관념의 세계에 틀어박히고 ≪일본서기≫가 정식화한 ≪번국≫(蕃國)관을 보지하여 자기만족을 하려고 한 것이다.

10세기 이후 일본은 어느 나라하고도 정식한 관계를 가지지 않는 시대에 들어간다. 조선번국관은 현실의 외교교섭에서 문제 삼는 기회가 없는 채 천황의 존재와 결부되고 보존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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