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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찌시대・쇼꾸호정권기・에도시대의 일본과 조선 - 교린, 그 허실조선에서 본 일본의 역사(4)
  • 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 승인 2019.09.2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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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로마찌(室町)시대의 일본과 조선

명의 건국과 중화세계의 재건

원조의 말기가 되면서 몽골의 지배에 대한 농민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백련교를 신봉하는 홍건군(紅巾軍)이 유력하였다. 이 홍건군의 란속에서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낸 것이 주원장(朱元璋)이었다. 주원장은 1368년 금릉(지금의 남경)을 수도로 하여 명왕조를 창건한 직후에 군대를 몰아 대도(지금의 베이징)를 점령하여 몽골세력을 물리쳤다. 오래간만에 출현한 한족의 통일왕조는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기초하여 중화제국의 재건을 목표로 주변제국에 사자를 파견하여 조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1351년에 즉위한 공민왕이 원의 연호 사용 금지, 제주도 및 요동지방에 잔존하는 원세력의 구축 등 반원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명과 국교를 맺고 신흥사대부를 중심으로 국내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은 북원과 결탁하고 힘을 온존하고 있었다. 이 시기 고려는 원과 명에 대한 등거리외교를 추구하고 있었다. 명은 중국 동북지방을 제압한 후 원이 이전에 관할하고 있었던 철령이북(함주 이북)지역을 내놓으라고 강압적인 통보를 해오자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최영은 명의 침략기도를 분쇄하기 위하여 요동원정군을 편성한다. 그러나 원정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까지 진군해오다가 방향을 바꾸어 개성까지 되돌아와 최영 등을 추방하고 일련의 개혁을 단행한다. 그리고 1392년 개혁파관료들에 추대되여 즉위하고 새 왕조를 창설하였다. 이성계는 명에 사자를 보내고 국교를 맺고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수도를 남경에 옮기고 한성(지금의 서울)이라고 개칭하였다. 1401년에는 명황제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이후 명・청과의 사대관계가 조선왕조의 외교의 기축으로 된다.
1336년에 개설된 무로마찌바꾸후(室町幕府)는 그 후 오랫동안 남북조간의 내란이 계속되어오다가 제3대 장군 아시까가 요시미쯔(足利義滿)시기인 1391년에 남북조통합에 성공하였으며 1401년에는 제1차 견명사를 파견하고 이듬해에 명의 건무제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았다. 그후 요시미쯔는 조선국왕 앞으로 국서를 보내고 이에 조선국왕의 회답이 교환됨으로써 1404년에 양국간에 국교가 성립되였다. 8세기후반에 사실상의 국교가 단절된 후부터 600년 만에 국가간의 교제가 부활하였던 것이다.

왜구대책과 다원적인 통행체제

조선과 명이 일본국왕에게 기대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왜구를 단속하는 문제였다. 왜구의 해적행위는 14∼15세기(전기 왜구)와 16세기(후기 외구)를 절정으로 격발한다. 전기는 조선반도로부터 중국의 화북연해지역, 후기에는 중국동남의 연해지역이 주요한 무대로 되었다. 고려에서 본격적인 왜구의 취체의 시작은 1350년이며 이후 70년대로부터 80년대를 절정으로 하여 15세기초에 이르기까지 그 피해가 빈번히 기록되고 있다. 왜구의 공격은 연안지방만이 아니라 내륙부에까지 미치고 있고 주로 조세의 운반선이나 창고가 습격당하고 미곡을 빼앗기고 사람들이 납치되었다. 연행된 사람들은 일본국내에서 노예로 거래되고 류큐(琉球)를 중개하여 동남아시아방면으로 전매되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 조선의 사료에서는 ≪삼도왜구≫(三島倭寇)라고 일컫는 쯔시마(對馬島)・이끼(壹岐)・히젠마쯔우라(肥前松浦)가 왜구의 근거지로 보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의 일본사 및 동양사연구자들 속에서 왜구를 조선인과 일본인의 련합이라고 하는 견해나 왜구의 구성원의 많은 부분이 수척(水尺)・재인(才人) 등 고려의 하층민이였다고 하는 견해가 나오고있다.나아가서 제주도의 어민 등 해양세력과 왜인의 련합을 상정하고 왜구의 본질을 ≪환지나해지역≫(環支那海地域)을 활동무대로 하는 ≪국적과 민족을 넘어선 인간집단≫이라고 한다.그러나 그러한 해역이 국가로부터 자립적이고 완결한 독자의 지역으로 설정할수 있는가,어떤가.공통의 일체성을 가진 해민을 상정할수 있는가,어떤가는 신중하게 검토하여야 할 문제일것이다.
수천명에 달하는 규모의 왜구는 고려의 정규군과 맞서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작전을 취하고있다.강력한 지휘명령체계와 규률을 갖춘 본격적인 전투집단이라고 볼수 있다.우선은 그러한 집단이 형성될수 있는 륙상의 거점과 그를 둘러싼 사회상황이 문제로 되여야 할것이다.남북조의 내란상태에 있는 일본내의 상황과 관련하여 왜구의 실태를 추구해야 할것이다.
≪이 동란에 의하여 산길에는 산적이 있고 해상에는 해적이 많았다.이 적도들은 수천척의 배를 갖추고 원조・고려의 각지에 몰려들었으며 원조・고려의 관민들은 이를 방어하기 어려웠으며 해안에는 사는 사람이 없어지고 황페해졌다≫(일본의 고전문학작품의 하나인 ≪다이헤이끼(太平記)≫)
왜구의 구성원의 많은 부분이 고려의 민중이였다고 하는 견해는 조선사의 전개로부터 보면 당돌한 느낌이 난다.당시의 고려사회에 다수의 민중이 왜구에 합류하는 상황이 생기고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왜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제1의적으로는 일본렬토에 근거지를 두고있는 세력이였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 왜구[사진 : 필자 제공]

왜구의 단속과 다원적인 통교체제

고려 및 조선정부는 1366년 이래 거듭 일본에 사자를 파견하고 왜구의 단속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1404년에 일본국왕과의 통행이 시작하였다. 조선정부는 왜구에 대한 대책을 2가지 세웠다. 하나는 군사적인 대응이다. 1389년 고려의 수군이 100척의 병선으로 왜구의 근거지인 쯔시마를 공격하여 300척의 적선을 불태우고 납치되고 있었던 100여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조선왕조는 더 많은 병선을 건조하고 수군을 증강하였다.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자신이 왜구토벌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다. 1380년의 남원전투에서 왜구의 대군을 격파하여 명성을 떨쳤다. 조선정부는 1419년 병선 227척에 1만 7천명의 대군으로 다시 쯔시마를 공격하였다. 이른바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불리운 작전이다(일본에서는 ≪오우에이노 가이꼬(應永の外寇)≫라고 부른다). 사건의 이듬해 통신사로서 송희경(宋希璟)이 방일했으나 그 통사 윤인보(通事 尹仁甫)는 귀국 후의 보고에서 일본국왕, 즉 장군의 명령은 교또주변에 미치고 있을 뿐이고 국토는 모두 다이묘(大名)들에게 나누어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국왕의 왜구금압에 큰 기대를 거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조선정부는 힘의 정책, 군사적인 대응과 병행하여 왜구의 발생을 누르는 외교적인 수단, 즉 회유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첫째는 왜구에게 투항을 호소하고 이에 응한 자(投下倭人)에게는 토지와 가옥을 주고 정주시켰다. 이로 인해서 조선 내에 정착한 자의 수는 경상도만 하여도 2천명가까이 달하였다고 하며 그중에는 조선에서 관직을 받아서 활약하는 자(受職倭人)도 나타났다. 관직의 수여는 일본열도에 거주하는 자에게까지 미치고 그러한 수직왜인은 정기적으로 관직수여증명서를 휴대하고 조공하였다. 회유책의 둘째는 교역을 허가하였다. 수직왜인의 경우 조공 때 교역이 인정되고 있었으나 그 외에 주로 서일본 각지의 다이묘(大名)나 호족들에게 사절파견의 권리를 주어 해적행위의 취체를 기대하여 교역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다이묘나 호족의 사자라는 명목으로 도항하는 자(使送倭人)중에는 복수의 사자를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교역을 목적으로 래항하는 자(興利倭人)에게도 거래를 인정하였다. 사송왜인이나 흥리왜인 중에는 왜구로부터의 전신자도 많았고 조건이 달라지면 언제라도 해적행위로 변하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였다. 이러한 통교자를 통제하기 위하여 조선정부는 항구를 부산포(富山浦)・제포(薺浦)・염포(塩浦)의 삼포에 한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항구에는 항상적으로 거주하는 왜인(恒居倭)도 많았다.
일본국왕과의 통교만이 아니라 조선국왕이 일본열도내의 여러 세력과 개별적으로 관계를 가졌다는 다원적인 통교체제가 무로마찌시대의 대조선외교의 특징이었다. 각종의 통교자에게는 조선국왕으로부터 도서가 주어졌는데 이것은 조선측에서는 이념적으로 신종(臣從)형식의 관계가 설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쯔시마는 원래 조선의 속주라는 표면상의 원칙에서 통교자의 통제를 위임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조선국왕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가 설정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교역품은 일본으로부터는 동, 유황, 금 등이고 조선으로부터는 무명의 수입이 많았으나 고려대장경, 조선종을 요구하고 도항하는 자들이 많았다. 기록에 남아있는 것만 하여도 대장경은 50부이상이 일본에 건너갔다.

2.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조선침략의 목적과 ≪신국≫사상

쇼꾸호시대(織豊時代)에 들어와서 조선 및 명과의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허물어버린 것이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이었다. 히데요시는 왜 무모한 전쟁을 강행하였는가.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히데요시의 요구는 ≪정명향도≫(征明嚮導)였다. 다시 말하면 명을 정복하기 위하여 선도하라는 것이다.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까지를 정복하려는 것이 히데요시의 구상이었다. 화평교섭에서도 마지막까지 구애된 것은 조선남부의 영토할양이다. 최대의 목적은 영토의 획득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침략이 전국평정전쟁의 연장선우에 이어지고 실시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국다이묘(戰國大名)는 항상 새로운 전쟁에 의하여 획득한 영토를 가신에게 나누어주고 가신들도 그러한 은상을 목적으로 주군에 대한 충근에 힘썼다. 그런데 전국을 평정한 후는 그러한 구조는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다음에는 조선에로, 중국에로 영토획득의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조선침략은 이러한 전국다이묘의 논리로부터 이끌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침략의 구상을 히데요시는 어떻게 정당화하고 근거삼으려고 하였는가. 그는 이 사업을 천황의 명령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에 보낸 문서에서 ≪일본국 관백 히데요시≫(日本國關白秀吉)를 자칭하고 천황의 명령임을 명확하게 하였다. 한성을 점령한 후에 히데요시가 발표한 구상은 명을 정복한 후에는 고요제이천황(後陽成天皇)을 베이징에 옮기고 동아시아시에 군림시키려는것이었다. 히데요시의 구상은 중국황제를 중신으로 하는 중화세계질서를 일본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로 바꾸자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신국≫(神國)사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일본은 신국이다≫, ≪신도(神道)를 알면 즉 불법(佛法)을 알게 되고 또한 유도(儒道)를 알게 된다≫고 하는 것처럼 여기서는 신도가 우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신국사상 밑에서 사무라이(武將)들은 진구(神功)황후의 ≪삼한정벌≫(三韓征伐)의 신화를 들고 저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일본군의 침략과 격퇴

히데요시는 출격의 거점으로서 규슈의 히젱(肥前)에 나고야성(名護屋城)을 축성하고 16만 명의 병사를 9개 군단으로 편성하고 또한 12만 명의 군세가 대기하는 속에서 1592년 4월 12일 선발군이 출범하고 다음날에 부산성을 점령하였다. 전국시대를 싸워온 일본군에 대하여 준비가 부족했던 조선의 정규군은 유효한 반격을 하지 못한 채 5월 2일에는 한성이 함락된다. 6월중에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부대는 평양에 도달하고 함경도의 두만강까지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부대가 진격하였다.
그러나 그 후 각지에서 의병과 수군의 집요한 저항에 부딪쳐 일본군의 진격은 저지되고 수습정비된 정규군이 가세함으로써 일본군은 후퇴하게 된다. 개전 11개월이 지난 1953년 3월 시점에서의 일본군이 소모률은 매우 높았다.


4월 중순 서울에서 철수하는 방침이 나오고 경상도의 좁은 연안에 병력을 남긴 채 강화교섭에 들어갔다. 교섭은 1596년까지 계속되었으나 히데요시가 조선남부의 할양을 고집함으로써 담판은 결렬하였다. 히데요시는 이듬해 2월 다시 출병명령을 내리고 7월에는 14만 여명의 군대가 조선해협을 건너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의병이나 수군이 활약하고 정부군과 명군도 충분한 응전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군은 각지에서 패배를 거듭하고 연안지역에 축성하여 농성하였다. 일본군속에는 염전기운이 퍼져갔다. 이런 때 1598년 8월에 히데요시가 죽었다. 일본군에는 철퇴명령이 전해지고 각지의 군대는 해안선에서 부산을 거쳐 철수하였다.

조선인의 피해

7년간에 걸치는 일본군의 침략은 조선인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우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인명피해를 주었다. 현재 교또시 히가시야마꾸에 있는 귀무덤(耳塚)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남녀노소의 죽인 사람이나 산 사람의 귀나 코를 베여 본국에 보내고 무훈의 표시로서 자랑하였다. 오꼬우찌 히데모또(大河內秀元)가 쓴 ≪조선이야기≫(朝鮮物語)에는 ≪일본의 군대 16부대가 친 조선인의 수급 8만 5738, 명나라의 수급 2만 9014, 서울에서 21만 4752을 평안성(지금의 교또)의 동쪽에 있는 대불전가까이의 땅속에 축롱하고 석탑을 세웠다≫고 쓰고 있음으로 그 일단을 알 수 있다. 전란에 의하여 농토가 황페화되고 아사자가 속출하였고 인구가 감소하였다. 특히 일본군이 지나간 길목에 있던 경상도나 도시에서 피해가 심하였다. 또한 일본군은 도공, 의사, 유생 등 기술자들과 일반인들을 수많이 납치하여 일본 각지에서 농업, 어업, 토목, 도자기 부문에서 종사시켰으며 노예무역으로 동남아시아지역에 매매하였다. 납치자수는 10만 명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귀중한 문화재가 파괴되거나 약탈당하였다. 서울의 왕궁이나 경주의 불국사, 조선왕조실록의 보관고인 4사고가 방화 당하고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았다. 서울의 주자소에서 금속활자 20만자를 약탈하였다. 각지에 있는 귀중한 서적이 약탈 당하였다. 지금의 궁내청의 도서관인 서릉부(書陵部)나 국회도서관 내각문고(內閣文庫), 나고야성 호우사문고(蓬左文庫) 등을 비롯해서 각지의 대학이나 문서관에 보관되고 있다. 또한 수많은 도공을 납치하여 일본에서 자기생산을 강요하였다. 사가현(佐賀縣)의 구로무따야끼(黑牟田燒), 가라쯔야끼(唐津燒), 아리따야끼(有田燒), 후꾸오까현(福岡縣)의 다까또리야끼(高取燒), 온따야끼(小鹿田燒), 고우시와라야끼(小石原燒), 아가노야끼(上野燒), 가고시마현(鹿兒島縣)의 다떼노야끼(竪野燒), 류몽지야끼(竜門寺燒), 오끼나와 즈보야야끼(沖縄壷屋燒), 사쯔마야끼(薩摩燒), 야마구찌현(山口縣)의 하기야끼(萩燒) 등은 조선인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일본사회에 미친 영향

일본군의 조선침략은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도요또미정권이 무너지는 직접적인 계기로 되었다. 7년간에 걸치는 일본군의 전시동원은 도요또미정권과 다이묘들의 경제적토대를 약화시켰으며 도요또미정권에 대한 불만을 조성시켰다. 결과 끝까지 조선에로 출병하지 않았던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 사이의 내전에 의하여 도요또미정권은 붕괴되고말았다. 또한 전란에서 수많은 일본병사들이 전사하여 고향의 일본민중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였다. 가고시마현 센다이시(川內市)의 구미자끼(久見崎)에 전해지고 있는 소우후렝(想夫戀)은 전쟁터에서 죽은 남편을 춤과 노래로 사모하는 행사이다.

▲ 센뇨 리큐[사진 : 필자 제공]

센노 리큐와 조선유교

히데요시의 차노유(茶の湯)의 스승이며 정치에서도 참모적인 역할을 논 센노 리큐(千利休)가 임진전쟁 개시의 전년인 1591년에 돌연히 히데요시에 의하여 할복을 강요당하였다. 리큐 할복의 진상에 육박하기 위한 여러 설이 있으나 아직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리큐가 추구한 와비차(侘茶)는 라꾸차왕(樂茶碗)과 소우앙(草庵)에 의하여 구상화되는데 라꾸차왕을 만든 초우지로(長次郞)라는 사람은 조선에서 온 도래인이고 리큐가 만들었다고 하는 소우앙형식의 차실(茶室)인 다이앙(待庵)은 조선의 민가, 특히 선비가 살고있었던 초당(草堂)에 혹사하고 있다. 미의 의지를 조선에서 찾은 리큐에 있어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은 참기 어려운 일이였고 할복이라는 행동으로 무언의 저항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리큐의 사상적배경은 선종이라고 해온 지금까지의 정설은 재고하여야 할 것이다. 리큐가 좋아한 라꾸차왕과 소우앙은 그때까지의 중국의 가라모노차왕(唐物茶碗)과 서원형식의 차실과는 멋이 전혀 다르다. 거기에는 계승성이라기보다 이풍(異風), 조선적인 것을 모체로 하고 있다. 그것은 그때까지의 선종의 문화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리큐는 선종으로부터 유교에로 사상전환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와비라는 미의식에는 선종보다 검소하고 청렴결백한 선비정신이 보다 깊이 관련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한다. 리큐의 제자 호소까와 다다오끼(細川忠興)는 에도유학의 창시자 후지와라 세이까(藤原惺窩)부터 주자학을 배웠고 리큐의 제자 후루따 오리베(古田織部)부터 차를 배운 고보리 엥슈(小堀遠州)도 유교사상을 자기의 사상으로 만들었다. 후지와라 세이까는 조선의 유생 강항(姜沆)부터 직접 배우게 되면서 선승부터 유생에로 자기변모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세이까와 그 제자 하야시 라장(林羅山)은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부터 이에쯔나(家綱)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장군의 시강을 지냈다. 그 도꾸가와께(德川家)는 자기의 정치, 문화적안태를 노리기 위하여 조선과의 평화적인 교류를 실현하였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서로 조정의 전통문화에 대항하기 위하여 리큐의 이풍적인 차노유를 이용하려고 하였다. 리큐는 히데요시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으나 그의 차노유는 도꾸가와께라는 좋은 리해자를 얻음으로써 에도기에 개화하였다.

3.에도시대의 일본과 조선 - 교린, 그 허실

▲ 조선통신사 [사진 : 필자제공]

교린, 조선통신사외교

도요도미께를 무력으로 멸망시킨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에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고 도꾸가와막부가 시작하였다. 동년에 이에야스는 조선에 국교정상화를 요청하여 1607년에 국교가 회복되였다. 조선으로부터 일본에로의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에 12회 파견되였다. 통신사일행은 약 500명 규모였고 부산을 출발하여 해로로 쯔시마를 거쳐 세또나이까이(瀬戸内海)를 지나 오사까의 요도가와(淀川)를 거슬러 올라가 교또에서 육로로 수도 에도(江戶)까지 갔다. 왕복 6개월 걸렸다고 한다. 그 행정에서는 국가간의 교섭과 의례뿐만 아니라 각지의 영주들의 환대를 받고 문화인들과 교류를 하였다. 당시 일본의 수많은 문화인들이 통신사의 숙소를 찾아가 선진적인 조선의 문화를 섭취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통신사의 수원들은 잠자는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의 사절은 한 번도 조선에 파견되지 않았다. 양국의 교섭은 일방통행이였고 제한적인 교섭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도꾸가와막부는 국내적으로 통신사를 조공사라고 속였으며 그 때문에 민중들이 즐기는 가무인 가부끼(歌舞伎)나 조루리(浄瑠璃) 등의 연목에 ≪진구우황후의 삼한정벌≫ 등 조선에 대한 차별적인 것이 많았다. 양국의 관계는 대등하고 평화적인 교린(交隣)관계였으나 강하고 깊은 관계로는 되지 않았다. 이것은 근대에서의 관계재편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 요시다 쇼잉[사진 : 필자제공]

도꾸가와막부말기의 정한사상과 국체사상

≪정한≫(征韓)사상은 메이지(明治)기에 들어와서 갑자기 대두한 것이 아니라 ≪국체≫(國體)사상과 결부하여 에도막부말기로부터 형성되어나갔다.
조선에로의 침략을 노골적으로 언명한 선구자는 사또 히로노부(佐藤信淵)였다. 그는 ≪우내혼동비책≫(宇內混同秘策.1823년)에서 ≪천황의 나라는 대지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나라로서 세계만국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근본에 따라 전세계를 군현(郡縣)으로 하고 만국의 군장을 모두 신복으로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다가오는 서유럽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여 만주, 조선, 대만, 필리핀, 남양제도의 영유를 제창하였다. 1930년대 후반의 전시체제하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망상의 원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齊)는 ≪신론≫(新論.1825년)에서 ≪국체≫라는 말을 처음으로 정의지었다. 즉 국체란 ①천황의 일계지배 ②천황과 억조(만민)의 친밀성 ③억조의 자발적인 봉공심이라는 3가지 요소를 축으로 하는 국가의 특색(國柄)이라고 하였다. 사또와 아이자와의 주장을 더 전개한 것이 요시다 쇼잉(吉田松陰)이었다. 그는 ≪유수록≫(幽囚錄.1854년)에서 조선을 공격하여 옛날모습대로 조공국으로 만들며 에조, 류큐, 만주, 대만, 필리핀을 지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침략을 정당화한 논리가 국체사상이었다. 그는 ≪천하는 만민의 천하가 아니며 천하는 한사람의 천하이다≫고 하여 만세일계의 천황을 통하여 억조가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는 ≪만방무비≫의 ≪국체≫사상을 강조하였다.
요시다의 ≪국체≫사상과 조선, 아시아침략론은 쵸슈번(長州藩)의 제자들(다까스기 신사꾸, 이또 히로부미, 야마가따 아리또모 등)에 의하여 널리 보급되고 명치헌법에서 근대일본의 국가원리로서 확립되었다.

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webmaster@minplu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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