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본 일본의 역사(3)

1.헤이앙・가마꾸라시대의 일본과 고려-자존과 동경

북방민족의 대두와 고려욍조

번영을 자랑하던 당제국도 안사(安史)의 란 이후 동요하여 드디어 907년에 멸망하였다. 이에 계속하여 926년에 발해가 멸망하였다. 조선반도에서는 신라왕조가 지방호족들의 반란에 의하여 통제력을 잃고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정권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지방호족의 한 사람인 견훤은 남서부지역에 세력을 확장하여 후백제를 세워 북방에서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칭하고 신라・후백제・후고구려가 분립하는 후삼국시대가 되었다. 이 속에서 918년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이 송악(지금의 개성)지방을 본거지로 하여 새로 고려를 창건한다. 935년에 신라가 항복, 다음해에는 후백제가 멸망하여 또한 멸망한 발해의 유민 수만 명이 고려에 합류함으로써 조선반도는 고려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당이 멸망한 이후의 중국에서는 여러 왕조가 분립하는 이른바 5대10국의 시대로 되었다. 그 속에서 960년에 송이 창건되고 979년에는 전토를 평정하고 중국의 통일을 회복하였다. 고려는 송에 입조하여 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동아시아세계는 당의 시대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변모되어갔다. 특히 북방민족이 대두하여 한족왕조에 대한 압력을 강화시킨 것이다. 10세기에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거란족이 세력을 증대하였다. 907년에 건국한 후 발해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료(遼)로 하고 936년에는 화북지방에 침입하여 지금의 베이징부근까지 지배하였다.

12세기가 되면서 이번에는 중국 동북부를 중심으로 여진족이 대두하여 1115년에 금을 건국하여 1125년에 료를 멸망시킨 후 1127년에는 송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킨다. 송왕조는 일단 멸망하고 장강의 남쪽에 위치하는 림안(지금의 항주)을 근거지로 하여 남송(南宋)을 재흥하나 이후 남송은 중국의 남부만을 지배하는 왕조로 된다. 중국의 북반부는 이민족왕조인 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게다가 1145년의 화약에서 남송은 금에 대하여 신하의 례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북방민족에 의한 세력확대의 물결은 고려에도 미치게 된다. 993년부터 1019년 동안 3차례에 걸쳐 료(거란)의 침략을 받아 수도 개경까지 공격당하였다. 서희, 강감찬장군 등의 활약으로 철거시켰으나 료의 책봉을 받아 종족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12세기에 들어가 금이 료를 멸망시킨 후 고려는 금의 책봉을 받게 된다. 료의 제1차 침입후도 고려는 비밀리에 송에 사자를 계속 보냈으나 제3차 침입 이후에는 송과의 국교를 단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071년이 되여 고려는 송과의 조공을 재개한다. 이 이후도 한편에서 료 및 금의 책봉을 받으면서 다른 편에서는 송과의 사절왕래를 계속하였다.

당대와 같은 한족의 통일왕조를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체제가 허물어지고 복수의 책봉관계가 중층적으로 전개하는 정세는 고려에 있어서 어려운 대응이 요구되었으나 냉철하게 상황을 보고 만만찮은 외교를 모색하는 계기로도 되었다. 918년에 태조 왕건은 국호를 고려로 하여 즉위하여 천수(天授)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썼다. 933년에 중국의 5대의 후당부터 고려국왕에 책봉되고 후당의 연호 장흥(長興)을 사용하였다. 그 후 고려는 950년에 광덕(光德), 960년에는 준풍(峻豊) 등 독자적인 연호를 채용하였다. 건국초기의 고려에서는 자국의 연호와 중국의 왕조의 연호를 번갈아 사용한 것은 5대라는 혼란기에 중국의 왕조의 대외적인 압력이 비교적 약하였기 때문이다.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중국에 새로 출현한 왕조의 정권이 안정하면 그 책봉을 받아 그 연호를 사용한 것이다. 다만 그 경우에도 국내에서는 왕의 자칭을 짐(朕). 명령을 제(制), 조(詔)로 기록하고 수도의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칭하였다. 고려의 국가적인 제사의 하나인 팔관회(八關會)에서의 외국인을 영접하는 의식에서는 송나라상인과 여진인, 탐라(제주도), 일본인이 참렬하고 조공국의 사절에 비기고 국왕에 배알하고 선물을 헌상하였다. 이에는 자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가 구상되고 연출되어있으니 고려왕조의 자립적인 외교자세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자폐하는 일본과 동아시아교역권

당이 멸망한 후 발해나 신라가 연쇄반응식으로 멸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사태가 아니라 당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세계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있었다는 것을 명시해주는 것이었다.
일본도 그러한 국제정세와 무관계하였던 것이 아니라 10세기전반에는 률령제의 해체가  명확하게 된다. 939년의 다이라노 마사까도(平將門)의 란은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마사까도기≫(將門記)에 의하면 간또(關東)지방에 자립한 ≪신황≫(新皇)을 자칭함에 있어서 마사까도는 지금은 실력의 세상이라고 강조하여 거란이 발해를 친 것을 핑계삼아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였다고 한다. 동아시아의 동란과 일본국내의 변란을 결부하여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모하는 동아시아세계에서 일본은 이미 견당사를 폐지하고 있었다. 신라와도 779년을 마지막으로 사절의 일본방문은 없고 발해는 919년 사절의 일본방문을 마지막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이 이후 일본은 거란이 세운 동단국(東丹國), 5대10국시기의 오월국(吳越國), 송나라, 조선반도에서는 후백제, 고려 등에서 사자가 왔으나 국교를 거절하였다. 1019년에 여진족의 선단이 규슈 북부를 래습한 이른바 도이(刀伊)의 입구(入寇)이후 고려수군이 도이에 의해서 납치된 일본인 2백 수십 명을 탈환하여 되돌려 보내온 사건이 발생했으나 이때에도 일본은 통교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일본은 어느 나라하고도 정식한 외교관계를 가지지 않는 상태를 계속한다. 외교적인 고립 속에서 중앙귀족층의 해외정세에 대한 관심은 현저하게 저하되어 내향적이고 폐쇄적인 의식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정식한 외교관계를 끊었다고 하여도 일본이 전혀 주변지역과의 교류를 없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북방민족의 대두와 더불어 당의 멸망후의 동아시아세계의 변모를 특징짓는 두 번째 점은 교역관계의 현저한 발전, 동아시아교역권의 형성이라는 현상이었다.

▲ 엔닝(円仁)

894년 마지막 견당사로 입당한 천태종의 중 엔닝(圓仁)은 10년간 수양하고 847년에 귀국할 때 탄 배가 신라상선이었다. 이 당시 당・신라・일본 사이를 상선이 왕래하는 상황이 생기고있었다. 엔닝의 저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초주(楚州), 사주 연수현(泗洲 漣水県) 등 중국의 연해지방의 각소에 신리방이라고 불리운  신라인의 거주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엔잉은 산동반도의 등주 문화현의 적산에 있는 법화원이라는 사원에서 신라승의 도움을 받았다. 적산 법화원을 세운 것은 신라로부터 당에 건너가서 군인으로서 출세하고 당・신라・일본을 무대로 상업활동에서 성공을 한 장보고(장궁복)라는 인물이었다. 장보고는 824년에 스스로 일본 규슈의 다자이후(大宰府)에 래항하여 무역활동을 하고 있다. 828년에는 당으로부터 신라에로 귀국하여 신라정부로부터 해적을 단속하는 권한을 받아 청해진대사라는 지위를 얻어 세력을 강화하였다. 841년에 왕위계승문제에 관련하여 반란을 일으켜 암살당하였다.이러한 인물이 활약하는 시대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 다자이후(大宰府)

9세기중엽이후는 당의 상선의 일본래항기사가 증가한다. 이러한 상선의 왕래가 있었으므로 견당사를 파견할 필요가 없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과 신라의 멸망이후 5대10국시기에는 남방의 오월국으로부터의 래항이 많았다. 동아시아해역에서의 교역활동은 송대에 들어가서 산업의 발전을 배경으로 하여 한층 성하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대외관계의 관리는 다자이후가 관리하고 송과 고려의 상선이 래항하면 조정에 보고하였다. 11세기후반에는 일본으로부터도 해외에 도항하는 상선의 수가 증가하였다. 당초의 도항지는 고려가 중심이었다. 당시 고려는 교역관계를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수도 개경의 외항이었던 예성강에는 송,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상선이 빈번히 래항하고 있었다.
일본에 들어온 교역품은 도자기와 동전, 비단과 능직 등의 견직물, 향료와 안료, 서적과 회화 등 귀족들의 요구하는 사치품이 중심이다. 상선이 오면 수도의 귀족들이 다투고 사자를 파견하여 물품을 구입하였기 때문에 가격이 비등하였다고 한다. ≪마꾸라노소우씨≫(枕草子)는 ≪경사스러운 것≫의 조에서 맨 먼저 ≪가라니시끼≫(송, 고려산 비단)을 들고 있다. ≪헤이께모노가따리≫(平家物語)는 헤이씨(平氏)의 번영하는 모습을 ≪양주의 금, 형주의 구슬, 오군의 릉직,  촉강의 비단, 칠진만보(七珍萬寶), 하나도 없은 바 없다≫고 묘사하였다.
현재의 일본에서는 헤이앙(平安)시대 중기(10세기∼12세기)의 문화를 ≪국풍문화≫(國風文化)라고 부르고 평가하고 있다. 견당사가 폐지된 이후 일본특유의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가나문자≫(かな문자)의 발명에 의한 국문학의 발달, 주택은 귀족들간에서 신뎅주꾸리(寢殿造)의 유행(대표적인 것은 뵤도잉봉황당-平等院鳳凰堂), 회화에서 야마또에(大和繪)나 에마끼모노(繪卷物)  등이 이 시대의 일본특유한 문화라고 한다. 그러나 무라사끼 시끼부(紫式部)의 ≪겡지모노가따리≫(源氏物語)나 세이쇼 나공(淸少納言)의 ≪마꾸라노소우시≫(枕草子) 등의 문학작품은 한서를 애독하고 작품에 많이 인용하고 있다. 그들의 교양에는 중국문화가 깊이 뒷받침되고있다. 해외문화에 대한 동경은 엔닝의 이후 송대에 들어가서도 상선에 편승해서 중국에 도항하는 승려가 그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국풍문화≫라는 말은 신중하게 검토되여야 할 문제를 안고 있다.
올해되어 일본에서 새로운 연호를 ≪레이와≫(令和)로 하였다. 일본당국은 이 연호는 국문학인 ≪망요슈≫(萬葉集)에 전거하였다고 하여 일본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실은 ≪망요슈≫에 인용된 것은 중국 남북조의 시문집 ≪문선≫(文選)에 포함된 후한의 장형(張衡)의 시 ≪귀전부≫(歸田賦)가 본래의 출전이다. ≪레이와≫의 고안자라고 하는 나까니시 스스무(中西進)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여 많은 도래인들이 일본에 건너와서 조선의 시가, 향가, 시조가 ≪망요슈≫에 있는 일본의 시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였다.

2.몽골의 래습과 동아시아

고려의 저항

테무진은 몽골의 제 부족을 통합하고 1206년에 칭기수・한으로 즉위하였으며 1234년에는 여진족의 금을 멸망시키고 중국의 북반부를 지배하에 두었다. 그동안 중앙아시아를 석권하고 나아가서 로씨야를 정복한 후 1241년에는 와르슈탓트의 전투에서 유럽세계를 진감시켰다.
제5대 한의 구비라이가 일본원정계획에 착수하는 것은 1266년이고 이 해에 처음으로 통행을 요구하는 조서를 가진 사자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금이 멸망해서 30여년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동안 일본에 대한 활동이 없었다. 왜 일본에로의 원정이 일정에 오르지 않았는가. 이 기간은 후에 몽골래습과 싸우는 부께(武家)정권으로서의 가마꾸라바꾸후(鎌倉幕府)가 죠뀨(承久)의 란을 수습한 후 호우죠씨(北條氏)를 중심으로 기초를 닦는 중요한 시기로 해당된다. 말하자면 침략까지 30년간의 유예를 주어진 셈이다.

▲ 구비라이

금에 대한 공격과 병행하여 몽골은 1231년부터 고려에로의 침략을 개시하였으나 고려는 굴복하지 않고 1259년까지 실로 30년 가까이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동안 몽골은 6차례에 걸쳐 침략하고 고려는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의 고려는 1170년이래의 무신정권의 시대이고 1196년에 무신의 한사람인 최충헌이 실권을 장악한 후 4대에 걸친 최씨의 정권이 계속되고 있었다. 최씨정권은 철저한 항전의 방침을 취하고 수도를 개성부터 강화도에 옮겼다. 해전에 서투른 몽골은 용이하게 공격하지 못하였다. 또한 ≪산성해도입보≫(山城海島入保)의 전략으로 철저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고려는 강화도에서 16년간에 걸쳐 대장경을 완성하고 간행하였다. 그러나 국토는 황폐화되고 1258년의 쿠데타에 의해서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구비라이는 인질로 잡던 태자의 전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고 귀국시켰다. 오랜 기간에 결친 고려정부의 항전은 종식되었다. 고려의 항복을 기다리고 드디어 몽골의 일본원정은 일정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30년간의 여유는 고려의 항전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였다.

삼별초의 항전

구비라이는 고려국왕에 일본에로의 사자파견을 명하여 그 사자가 1268년에 일본에 갔다. ≪대몽고국황제는 서를 일본국왕에게 봉한다≫에서 시작되고 ≪군대를 쓰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로써 그치는 구비라이의 조서에 막부와 조정은 일체 대답을 하지 않고 사자는 헛되이 귀국한다. 그 후도 매해 오는 사자에 대해서도 일본측의 대답은 없었다.
구비라이는 첫 번째 사자를 일본에 보낸 같은 해에 고려에게 남송과 일본을 원정하는 징병과 군선건조를 명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일본원정이 실시된 것은 1274년이었다. 최초의 사자가 와서 6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왜 이렇게나 기간이 비어버렸는가. 이 6년간이야말로 일본에서 방비체제를 구축하는데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기간이었다. 공백기간이 생긴 것은 몽골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최씨 정권이 무너진 후도 김씨・림시 등의 무신정권이 계속되고 고려의 왕실은 계속 강화도에서 나가지 않았다. 1270년에 림유무의 무신정권이 완전히 무너지고 난 후에야 겨우 개경에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이 결정에 반대하고 끝까지 몽골과 싸우기 위하여 궐기한 것이 삼별초의 부대였다. 삼별초란 무신정권시대에 창설된 고려의 정규군이고 30년간 몽골과의 전쟁을 담당해온 군사력의 중핵이었다. 개경천도에 반대하고 배중손은 1천척의 병선을 이끌고 강화도를 탈출하였다. ≪반몽구국≫을 호소하고 왕족의 한사람을 추대하여 정통정부를 자칭하여 전라도의 진도에 본거지를 두어 전라도일대를 제압하였다. 나아가서 경상도에도 진출하여 각지의 농민들이 봉기하여 이에 합류하였다. 일본에로의 원정에는 남부지방을 출격의 거점으로 하여야 했다. 병사나 군료의 징발, 군선의 건조 등 곡창지대인 이 지역이 불가결이었다. 몽골은 우선 삼별초의 진압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고 일본원정은 그 뒤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1271년 원군(元軍)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하면 삼별초는 제주도로 건너가서 저항을 계속하였다.
반란이 완전히 진압된 것은 1273년 4월이었다. 6월에는 삼별초를 멸망시킨 장군들은 잇따라 개경에 돌아와 쉴 사이도 없이 대도(大都)에 가서 구비라이 앞에서 회의를 열고 그 자리에서 정식으로 일본출병이 결정되었다. 3년여에 걸치는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해서 비로소 일본공격이 가능했던 것이고 이 기간에 일본은 방위의 준비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고려첩장불심조조

그런데 지금부터 30수년전에 하나의 고문서가 도꼬대학 사료편찬소에서 발견되었다. ≪고려첩장불심조조≫라는 제목의 문서는 붕에이(文永)5년(1268년)에 사자가 가져온 고려국왕의 서한과 붕에이8년(1271년)에 온 서한을 대비하여 기술내용이 다른 점을 열거한 것이다. 조정에서의 협의를 위하여 정리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1268년의 고려국왕의 문서에는 몽골의 덕을 찬양하고 군신의 례를 이룰 것을 권유하였던데 1271년의 서한에서는 몽골의 풍속을 야망시하고 적의를 표명하고 있으며 또한 진도에 천도하여 스스로 정통정부임을 선언하고 있다. 1271년의 서한은 진도에 본거지를 둔 삼별초항전군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삼별초가 일본에 대하여 연대하여 몽골에 대항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과 막부는 조선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호소에 답하지 못하였다.

아시아 각지의 반몽투쟁

삼별초항전군을 진압한 이듬해인 1274년 제1차 일본원정(붕에이노에끼=文永の役)이 드디 실행되었다. 900척의 군선과 고려에서 징병한 병사를 합쳐서 3만 수천 명이 쯔시마(對馬)・이끼(壱岐)를 거쳐 하까따만에 나타나 10월 20일부터 상륙을 개시하였다. 집단전법, 화약탄 등에 일본군이 밀리고 다자이후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밤이 되여 몽골군은 군선에 철수하고 야밤에 폭풍우를 만나 많은 배가 침몰하여 몽골군은 퇴각하였다고 한다.
제1차 원정은 실패하였으나 몽골은 당면 가장 중요한 목표인 남송의 공략을 추진하였다. 1279년에 드디어 송왕조를 멸망시키고 중국전체를 지배하에  두었다. 1281년 제2차 일본원정(고우앙노에끼=弘安の役)을 실행한다. 고려를 출격거점으로 하는 동로군 4만 명과 새로 지배하에 넣은 남송지역에서 징발한 강남군 10만 명의 대부대가 일본을 향하였다. 6월초순 하까따만에 나타난 동로군은 1주일간의 전투에서도 상륙하지 못하고 강남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7월말에 다시 상륙하자고 하는 전야에 다시 태풍을 만나 괴멸하고말았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3만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2차에 걸친 일본원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구비라이는 세 번째의 일본원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왜 실행되지 않았는가. 1280년대에 동남이시아에 대한 공략은 각지에서 저항을 만나 곤란에 부닥치고 중국 남부에서는 농민들의 반란이 속출하였다. 또한 몽골지배층내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구비라이는 1286년 드디어 일본원정계획의 중지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사≫(元史)는 이 결정을 알게 된 ≪강석(江淅)의 군민의 환호성은 우뢰와 같다≫라는 상황이었다고 쓰고 있다.

≪가미까제≫(神風)

일련의 과정에서의 일본의 대응에서 특징적인 것은 상대측과의 교섭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온 구비라이의 조서에 대하여 막부나 조정도 응답을 못하였다는 것이 실정이고 판단하기 위한 정보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교역의 발전이 있었다고 하여도 어떤 나라들과도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있었던 반영이었다. 연대를 요청하는 삼별초부터의 편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국내적으로는 이 사건의 대응을 통하여 막부는 조정에 대한 우위나 규슈, 서일본지방의 무사층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였으나 조정은 절이나 신사에서 ≪이국조복≫(異國調伏)의 기도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교섭을 통하여 상대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는 계기는 거의 볼수 없었고 정체 모르는 무서운 몽골과 그와 함께 공격해온 고려에 대한 적개심만이 남았다. 바로 하느님에 대한 기도가 있었으므로 ≪가미까제≫(神風)가 불고 이 체험이 주로 ≪신국≫(神國)사상의 심화에 귀결해나갔다.
몽골을 야만이고 무서운 존재로 보는 표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해서 그러한 표상은 극복되어나가고 있다. 유라시아대륙를 석권한 대제국의 건설은 동서교역에 미증유의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1970년대에 조선반도 서남해안의 신안 앞바다 해저에서 발견된 침몰선은 132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나 몽골의 래습이후도 교역관계가 의연히 성행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흙속에 가라앉히고 기적적으로 파손되지 않고 남았던 선창에는 중국의 동전과 도자기 등을 비롯한 약 2만 8천여점의 유물이 남아있었다. 짐함에는 보내는 사람의 이름과 ≪도우후꾸지≫(東福寺)라는 보내는 곳의 이름까지 쓰고 있다. 중국 남부의 경원(慶元)을 출발하여 조선반도를 경유하여 일본 규슈의 하까따(博多)로 가는 도중에 침몰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선의 활발한 왕래에 의거하고 송대에 이어서 중국에 건너가는 승려의 수는 많았다. 원나라말의 70년 동안에 기록에 남아있는 선종계의 승려의 수만이라도 2백 수십 명에 달하였고 유학 붐와 같은 상황이었다. 학술・문화교류는 계속 성황하였다.
일본은 신국(神國)이라는 자존(自尊)의 의식이 높아지는 한편 동시에 대륙문화에 대한 동경(憧憬)은 약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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