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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론으로서의 혁신 정강 14개조갑신정변 다음날 조보에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정강정책은 갑신정변이 역모로 몰리면서 소실되어 김옥균이 정변 이후에 집필한 ≪갑신일록≫에 밝혀놓은 내용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김옥균은 ≪갑신일록≫에서 자신들이 지향했던 사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하였다.① 대원군을 며칠 안에 돌려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의 행사를 폐지할 것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③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의 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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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7.16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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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침내 새날을 열 거사를 감행하다10월 17일 낙성식이 거행될 우정국 청사에는 미국공사 후트, 서기관 스커더, 영국영사 아스톤, 청국영사 진수당, 서기관 담갱요, 일본공사 서기관 시마무라, 묄렌돌프와 홍영식, 박영효, 김홍집, 김옥균, 서광범, 민병석, 윤치호, 신락균 외 친군영 지휘관(한규직, 민영익, 이조연) 등 18명이 참가하였다.김옥균은 이날 오후 4시에 우정국으로 가서 홍영식과 함께 정변 준비사항을 점검하고 집에 돌아오니 고종시위 변수가 와서 ‘국왕께서는 오후 2시쯤에 취침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전날 변수는 김옥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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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7.03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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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4년 긴박했던 한반도 정세개화파는 수구파를 척결하기 위한 본격적인 무장정변 준비에 들어간 것은 1884년 봄이었다. 왜 이 시기였을까? 임오군란 진압을 핑계로 조선에 군사력을 몰고 들어온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극에 달하여 조선이 독립국가로서의 존립까지 위기로 몰리고, 청나라와 결탁한 집권 수구세력의 부패는 극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집권 수구파들에게는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던 개화파들의 애국적인 개혁 활동에 대한 경계심과 방해가 극에 달하였다. 미국과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를 적대시하고 바라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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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6.18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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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화파가 부딪친 장벽, 청,일과 손잡고 자신들의 기득권만 노리는 조선의 수구파 낡은 제도를 새로운 제도로 교체하기 위한 부르주아 개혁이 순조로울 수는 없다. 서양에서도 힘든 과정이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나기도 전에 서양 열강의 수탈을 당해야 하는 조건에서 외세와 결탁한 수구파의 반대와 탄압은 서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였다. 처음에는 수구파들은 근대화를 그저 신식 서양문물을 도입하려는 것 정도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개화파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나타내고 그들의 지향이 봉건제도의 청산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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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6.0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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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혁적인 정권기관의 설치 임오군란 후 대원군이 청군에게 납치되고 민씨 일족이 다시 집권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개화파들은 국가정치기구의 설립을 서둘렀다. ≪통리기무아문≫은 대원군이 잠시 집권하자마자 바로 해산시켜 버린바, 수구 정권이 안정되기 전에 개혁을 추진할 기구부터 서둘러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1882년 7월 25일 새로운 국가기구인 ≪기무처≫가 경복궁 내에 설치된다. ≪기무처≫의 성원 7명 중 5명이 개화파로 협의제 기관이면서도 개혁에 관한 사안을 개화파의 의도대로 결정하기에 유리한 구조였다. ≪기무처≫는 개혁과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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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5.2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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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화를 위한 국가정치기구, ≪통리기무아문≫의 설치조선은 ‘절대 왕정의 신분제 사회- 봉건국가’였다. 조선 시대는 언론과 기록이 투명했던 것으로 유명했지만, 모든 정책이 국왕을 정점으로 한 봉건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지 백성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국정을 토의 결정하는 ≪의정부≫가 있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의정부≫는 사실상 국왕의 자문기관에 불과했으며 국왕의 결정을 집행하는 곳도 인・의・예・병・형・공의 6조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의 국내외 정세가 복잡해지자 전쟁, 외교 등의 상황 대책기구로서 ≪비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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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5.07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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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본을 견제하여 조선에 대한 예속을 강화하려는 청나라 우리는 일본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크다 보니 1880년대 조선에서 벌린 청나라의 만행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은 ≪1876년 조일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외세는 집권세력인 민비 일족과 결탁한 청나라였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수탈이 노골화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청나라는 전통적으로 유지되어오던 사대관계를 악용해 조선을 예속화하려고 했다.이렇게 청나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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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4.2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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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우리 부르주아 혁명사를 쓰면서 김옥균을 탁월한 혁명가로 규정한 지난번 칼럼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다. 김옥균을 일본의 앞잡이로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반역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이다. 또 김옥균이 친일파는 아니더라도 일본을 믿고 정변을 일으킨 순진하고 무모한 청년개혁가라고 아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김옥균 친일파 운운’은 일본이 날조해낸 음모이다. 일본은 김옥균을 친일파로 만들어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을 자신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날조하려 했다. 조선총독부는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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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4.1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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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옥균의 성장갑신정변이라는 조선 부르주아 변혁을 주도하여 대한제국까지, 근대개혁의 흐름을 형성한 이는 김옥균이다. 김옥균은 1851년 충청남도 공주의 가난한 양반가정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오촌 당숙 김병기의 양자가 되어 서울에서 살다가 11살 때부터 16살까지 강릉 부사로 부임한 양아버지와 함께 강릉에서 조국의 아름다운 정취를 느끼며 자랐다.16살 되던 1866년, 미국 ≪제너럴 셔먼호≫와 프랑스 함대의 침입 사건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서구 열강의 침입에 반대하는 격렬한 민족적 투쟁을 보면서 조국에 불어닥친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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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3.2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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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연재 글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에서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봉건제의 기초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사회관계를 요구하는 객관적 토대가 이미 형성되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이나 서구열강의 자본침투 없이도 조선이 근대적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물적인 토대는 서서히 갖춰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봉건제의 토대가 무너져 내린다고 해서 곧장 근대사회가 오는 것은 아니다. 봉건제라는 낡은 생산 관계를 청산하고, 생산력을 더욱 높여, 부국강병을 달성하려면 부르조아 개혁이 필요하다. 조선에 근대를 준비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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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3.12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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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자생적으로 근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 우리나라 역사 관련 대표적 논점 중 하나가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 공장을 지어주고, 경부선을 부설하면서부터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우리나라 근대화는 1876년 조-일 강화도 조약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식민지 근대화론』은 조선 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반에서 부르조아 혁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자체적으로 근대화를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대략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철학적, 과학적 기초가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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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2.2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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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군인 투쟁의 성격임오년 군인 투쟁은 부패한 민비 권력을 뒤엎은 반봉건 투쟁이었으며 또한 청일침략자들을 반대한 반침략 투쟁이었다. 당시 민중의 분노는 민비 일당과 일본에 집중되어 있었다. 민비 일족은 국정을 농간해 원성이 자자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일본과 굴욕적인 수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나라를 망쳐 먹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일본 공사관 공격은 일본의 수탈로 경제적 빈곤이 가중됐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전개했던 명백한 반외세투쟁이었다. 또 군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급료미 마저 주지 않는 부패한 조선 봉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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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9.01.17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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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인들의 애국적 투쟁을 자신의 권력복귀에만 활용한 대원군투쟁에 나섰던 군인들은 대원군이 집권하자, 대원군을 믿고 더 이상 투쟁을 확대하지 않았다. 그러면 군인들 투쟁 덕분에 권력을 잡은 대원군의 행적은 어땠을까? 대원군은 권력을 잡자마자 제일 먼저 민비의 죽음부터 선포하고 민가일당의 재집권을 막는 일부터 착수한다. 일본과 청나라의 간섭에 대처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는 대신에,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귀중한 시간을 민비 장례문제와 같은 사기극에 써버린 것은 조선과 그 자신의 운명을 망쳐버린 중대한 실수였다.대원군은 일본의 조선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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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9.01.0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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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비 집권 후 나날이 약화되는 조선의 방위력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 했다. 1866년 미국의 함대 《제너럴셔먼》호가 들이쳐도 버티며 승리했던 조선. 1871년 신미양요를 겪으면서도 미국에 굴하지 않았던 조선이 5년 만에 일본 운요호의 함포사격 몇 번에 굴욕외교를 맺는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쇄국을 강행했던 대원군을 쫒아내고 1873년 권력을 잡은 민비일당이 딱 3년 만에 나라의 국방력을 거덜 냈다는 것도 통탄할 일이지만,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 이후에도 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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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8.12.2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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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동안 ‘다시 정리해보는 미일침략사’를 중심으로 서술했던 칼럼을 1882년 이후 새로운 접근법으로 이어가려 한다. 외세의 침탈이 전면화 되는 조건에서 우리 민족의 반외세 항전사로 시각의 중심을 바꾸어야만 당시 역사를 균형감 있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우리의 근대사의 시작을 무엇으로부터 보아야 하는가의 논점과도 연관이 있다.유럽에서는 근대의 시작을 봉건제의 해체와 근대국가 수립으로 본다. 봉건제가 토지에 얽힌 신분제 사회라면, 자본주의 시작과 함께 근대국가가 탄생되었고, 신분제 대신 ‘자유, 인권’이 시대 이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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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8.12.1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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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은 조선과 미국이 통상조약을 맺고 서구 열강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해이지만 1876년 강압적 조일수호조규로 이미 조선의 경제는 기초부터 허물어지고 민중들의 반외세투쟁은 점점 격렬해지는 상황이었다.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는 흐름을 이해하려면 이 6년 동안의 일본의 조선약탈의 실상부터 알아야 한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일찍 근대화하여 강국이 되었다고 아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앞의 칼럼에서 말했듯이 일본은 자체적으로 청과 러시아를 이기고 조선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전폭적인 군수물자 지원과 정치적 뒷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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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8.11.2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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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신미양요』 등 수차례에 걸친 조선침략이 실패하자, 일본을 지렛대로 한 조선진출을 모색한다. 이것이 1876년 『운요호 사건』을 실제로 사주한 미국의 계산이었으며 『강화도 조약』 체결에 가장 쾌재를 부른 것도 미국이었다. 그런데 조미통상조약이 체결되기까지 왜 6년이나 걸렸을까? 냉소적인 일부 학자들의 견해처럼 조선이 먹을 것이 없어 미국이 중시하지 않은 탓일까? 또 조선이 빠진 채 미국과 청이 ≪조미조약≫문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미국이 조선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미국이 조선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중국 진출과 아시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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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8.11.0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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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은 운요호 침략을 지렛대로 이루어진 에 대해 불평등하지만 근대적 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 조약은 단순한 국가간 무역과 교류에 관한 조약이 아니라 이다. 군대를 몰고 와 양민을 학살해놓고, 사죄와 배상커녕 웃는 낯짝으로 친교를 강요하며 달려드는 일본! 당시 고종은 일본의 침략적 본질을 몰랐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싸우자니 겁도 나고, 달래서 타협하는 정도로 무마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 시기 국왕의 유약성이야말로 민족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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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8.06.1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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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엄청난 내부 위기에 부딪친다. 불평등한 미∙일 통상조약이 근본 이유였지만, 일본은 이 난관을 ‘큰놈 미국을 뒷배로 삼아, 작은 조선을 침략하는 정한론’으로 극복하려 한다. 미국 역시 제1차 조미전쟁(신미양요)의 실패로 조선을 직접 침략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선 침략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눈치 빠른 일본은 미국의 의중을 파악하고, 미국과 결탁해 조선 침략의 첨병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전통적 교린외교를 끝장내고, 정한외교(정한론을 바탕으로 한 조선 침략 외교)를 본격적으로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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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8.06.02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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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871년 조미전쟁(신미양요)에서 빈손으로 물러가야 했다. 하지만 중국 침략을 위해 조선을 포기할 수 없었던 미국은 이후 일본과 공모하는 전략으로 조선 침략을 추진한다. 1854년 페리 제독의 포함외교로 미일 수호통상조약이 이미 맺어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먼저 미국에게 꼬리를 흔든 것은 일본이었다. 1866년 미국 서면호의 평양 침공이 실패하자 이듬해 도쿠가와 막부 정권은 주일 미 대리공사에게 각서를 보낸다. “조선이 이를 데 없는 무의망동을 벌려 친선동맹관계를 가지는 미국인을 살해하니 우리 대군은 통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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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8.05.17 1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