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으로 널리 알려진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 이야기다.

최익현 선생의 강직성과 우국 애민 정신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대로이다.

선생의 의병 활동과 투쟁은 우리 민족 역사에 연면히 이어오는 자주, 애국 애민, 민중 정신, 나라의 미래를 여는 개혁 활동과 맥을 잇는다.

▲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 초상화.
▲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 초상화.

우리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 역동적인 민중 정신은 사대모화(事大慕華) 사상에 젖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크게 위축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의적(義賊) 임꺽정(林巨正)의 활동,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사건들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정사(正史)가 전해주지 않는 민중사(民衆史)는 구전(口傳)이나 야사가 전한다.

민중이 창칼을 꼬나들고 일어서는 것이다.

나라의 위기, 민생이 파탄 났을 때 바닥 백성들이 집단으로 무장봉기에 이르는 것이다.

조선 중기 1589년 정여립의 반란, 1811년 홍경래 폭동, 1862년 진주 봉기, 같은 해 함평 민란 등 바닥사람 기층민중의 집단 무장투쟁은 계속되었다.

우리 민중은 죽은 것 같으면서도 살아 있었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의 민족혼, 얼, 넋은 역사의 깊은 혈맥 속에 흐르고 있었다.

오천년 역사의 긴긴 흐름 속에서 바닥 민중이 제 눈을 뜨고 제대로 일떠선 것은, 1894년의 동학 인민봉기였다.

자주의식, 주체성, 독립 정신에 최초로 민족 집단 자의식이 눈을 뜬 것이다.

그것이 ‘척왜척양(斥倭斥洋) 보국안민(輔國安民)’이었다.

농민들의 생활 파탄, 탐관오리 징치(懲治)는 처음 동학 봉기의 한 원인은 되었을망정, 동학군 창의(倡義)의 주제이거나 앞에 내세우는 큰 명분은 아니었다.

외세에 의해 망해가는 나라의 자주독립과 강대국의 농간과 압제 아래 신음하는 기층민중 바닥 백성들의 생존권 보호가 동학 봉기의 우선 급선무였다.

목표이고 목적이고 내세운 대의(大儀)였다.

나라가 망하는데 탐관오리 징치가 어디 있고, 바닥 백성들이 다 죽어 가는데 농사가 어디 있고 농민 생활이 어디 있겠는가.

우선 나라가 서 있고 농민들의 삶, 생존권이 보호되어야 한다.

최익현 선생이 의병 창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집단 무장투쟁에 돌입한 것은,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학군 창의의 주제와 명분과 궤(軌)를 같이한다.

철저한 외세배격과 민족의 자주독립, 애국 애민, 민중 정신의 구체적 실현이었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고 병자수호조약과 같은 치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야 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러한 시대 환경이 동학군 창의를 불렀다.

최익현 선생이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집단무력 투쟁에 돌입한 것은, 나라의 운명이 실로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사실상 나라의 자주권을 빼앗겨 ‘대한제국’은 이름만 남고 실제로는 망해버린 나라가 되었다.

몸에 숨만 붙어 있는 식물인간 상태, 대한제국 나라 형편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 전북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연 ‘동학농민혁명군 이야기 기획전’ 주요 전시 유물 중 ‘사발통문’의 모습이다. 2015.05.06. (사진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 전북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연 ‘동학농민혁명군 이야기 기획전’ 주요 전시 유물 중 ‘사발통문’의 모습이다. 2015.05.06. (사진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나라는 그냥 집단이 아니다.

사람만 많이 모여들어서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리 군중 사람의 떼거리만 모인다고 나라가 서는 것이 아니다.

나라가 서는 것, 건국(建國)이란 집단의 주체 의식, 여러 개인들의 독립 의지, 생명체 고유의 내몸 의식의 집단화, 동류(同類) 동족 의식의 거대 조직으로 일어서는 것을 말한다.

의병장 최익현 선생의 나라는 최소한 혈통이 같은 조선 민족의 집단자아(集團自我), 혈족 덩어리로서의 주체성, 독립 의지에 투철한 사회적 거대 인격체였다.

외세의 지배를 받거나 주체적 국권(國權) 주권이 침해를 받는 국체(國體)나 국권은 나라가 아니다.

이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절대로 이를 용납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나라가 설 때 임금이나 군주를 내세우는 것도, 혈족 주체 집단 의지를 축소 단일화 개인 인격체화 한 것이다.

나라를 구성한 낱개 인격체들의 집단 자아 ‘우리민족’ ‘우리나라’에 자신의 생명 개인의 인격, 모든 정신적 물질적 자산을 귀속, 거기 융합 거대조직공동체화 한 것이다.

나라 공동체는 스스로 일어선 자주 국체 독립 국격의 극대(極大)이고 인민과 백성 개인은 나라 공동체 자주독립 국체를 극소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 공동체의 극소 세포는 살아 있는데 극대 거대 공동체는 망해서 죽은 것이다.

최익현은 조선 민족 혈족공동체의 지극히 작은 한 단위세포인 극소의 힘을 모아, 아니 목숨을 바쳐서 전체 극대 대(大)를 살리기 위해 분연히 떨쳐나선 것이다.

일흔네 살의 나이에…

당시의 일흔넷은 오늘의 팔십 대 후반에서 구십 대 중반의 나이에 해당한다.

자연 수명은 늘어났는데 애국 애민 주체적 자주의식, 제가 소속한 나라의 통일독립 의지, 외세 강점 77년으로부터의 해방, 민족이 하나 되는 분단 극복 열망지수(熱望之數)는 바짝 쫄아 들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일흔넷의 늙은 나이에 장정들을 불러 모아 총칼 무장을 하고 생사를 가르는 무장투쟁에 돌입했을 것인가.

정규군을 지휘하기에도 한참 늦은 나이인데 하물며 비정규군 유격대일까 보냐?

그래도 최익현은 죽은 나라를 살려내기 위해 빼앗겨버린 국권, 자주독립권을 되찾기 위해 그대로 보고만 있거나 앉아만 있을 수도 없었다.

늙은 몸이라도 제 한 목숨을 나라에 내놓을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

망해가는 나라 앞에서, 우리의 주체적 자아 공동체 우리나라가 강대국에 수모를 당하는데, 몸이 늙었다는 핑계로 그냥 투쟁을 마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총칼 맞세워 싸워야 할 전투 마당을 피해 가고 말 것인가!

꽃다운 스무 살짜리 청춘보다도 더 뜨거운 우국단충(憂國丹忠)이 범람하는 파도처럼 가슴으로 밀려오는데 이를 어찌할 것인가.

선생은 비록 포로의 몸이 되어 적지 대마도 감옥에 갇히는 바 되었으나, 끝끝내 조선인의 기개를 보여 절조 있는 최후를 맞았다.

의병장으로서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장엄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 우리의 국제환경은 심상치가 않다.

미국은 한국 강점 77년이 되었는데 제 나라로 돌아갈 생각을 않는다.

오히려 종속적 친미주의자들을 앞세워 이 땅을 영구 분단, 국제분쟁의 전초 기지화하고, 세계 패권 전략의 돌격대로 내몰 계획이다.

따라서 일본의 재무장, 군국주의화도 심상치 않다.

한국은 고령화 속도가 빨라서 노인 인구가 많다고 한다.

시대는 바야흐로 사람을 부른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니, 닭이 천 마리면 봉(鳳)이 한 마리라는 옛말이 있다.

늙은이 중에 누가 있어 시대의 부름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요즘 이 땅의 젊은이들이야 양쪽 귀에 이어폰 꽂고 노래 듣느라 정신이 없고, 휴대폰 게임 놀이에 혼이 나갔다.

나라 민족 자주 통일, 분단 극복 외세 강점, 그따위 골 때리는 것들이야 별무 관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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