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사로 되돌아보는 통일원로의 삶(4)

▲ 사진 : 통일애국열사 박정숙 선생 민족통일장 장례위원회
▲ 사진 : 통일애국열사 박정숙 선생 민족통일장 장례위원회

한 평생 조국해방과 자주통일을 위해 헌신해 오신 그리고 4월혁명 공간 혁신정당인 사회당, 사회대중당 여성당원중 마지막 생존자이신 박정숙 선생(통일광장 성원,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께서 지난 2일 오후 10시40분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장례식은 10월4일. 삼육서울병원 추모관에서<통일애국열사 박정숙 선생 민족통일장>으로 엄수되었다.

“박정숙 선생”하면 <범민련 남측본부>와 <김선분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범민련은 노태우 공안당국도 인정한 1988년 8월1일 남측의 진보·보수세력을 망라한 각계인사 1014명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발기취지문’ 발표와 1990년 8월15일 판문점 ‘제1차 범민족대회’, 그리고 이후 남·북·해외공동결의가 발표되면서 1990년 11월 19-20일 사이 독일 베를린에서 남·북대표단회의가 성사되어 공동선언을 통해 남·북·해외 3자연대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 결성되었다.

해외본부는 1990년 12월16일, 북측본부는 1991년 1월25일 결성되었으나 남측본부는 1991년 1월23일 32개 정당·사회단체가 함께한 준비위가 발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안당국의 탄압으로 1995년 2월25일에야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이후 <범민련 남측본부>는 1995년 11월29일 강희남 의장을 비롯한 본부와 지역간부 29명 체포, 2009년 5월7일 이규재 의장 등 9명의 지도부와 지역연합 등 16명의 집과 사무실 9곳 압수수색 그리고 2013년 6월26일 김을수 의장 권한대장을 비롯한 본부 지도부와 지역연합 사무실 압수 수색 및 체포 등 그 어떤 단체에도 없었던 전국 차원의 전무후무한 3차례의 모진 대탄압을 극복하여야 하였다.

▲ 박정숙 선생(왼쪽)과 김선분 선쟁(오른쪽) [사진 : 통일애국열사 박정숙 선생 민족통일장 장례위원회]
▲ 박정숙 선생(왼쪽)과 김선분 선쟁(오른쪽) [사진 : 통일애국열사 박정숙 선생 민족통일장 장례위원회]

이런 무자비한 3차례의 대탄압 속에 “박정숙 선생”은 항상 싸워야 할 곳에 있었고,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범민련 남측본부를 지켜온 선생이시다.

<김선분 선생>은 1945년 해방공간에서 서울 필동 여맹위원장을 맡았고,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9월 후퇴 시기에 북으로 가 중등교육을 받은 뒤 1952년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체포돼 10년 옥고를 치른다.

이때 박정숙 선생과 옥중에서 인연을 맺어 1962년 출소한 <김선분 선생>을 찾아가 함께 사신다. 
이후 언니‧동생 사이로 그리고 평생의 동지로 동고동락하면서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범민련 남측본부>와 통일광장 등에서 활동하며 65년 세월을 함께 하신다. 

▲ 박정숙 선생(왼쪽)과 김선분 선쟁(오른쪽) [사진 : 통일애국열사 박정숙 선생 민족통일장 장례위원회]
▲ 박정숙 선생(왼쪽)과 김선분 선쟁(오른쪽) [사진 : 통일애국열사 박정숙 선생 민족통일장 장례위원회]

특히 두분은 한미동맹강화와 반북적대정책에 사활을 건 반민족‧반통일‧친미‧친일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공안탄압이 극에 달하였을 때 여성의 몸으로 <범민련 남측본부>와 함께 쉬지 않고 싸워온 불굴의 반미자주통일 투사이시다.

뿐만 아니라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에는 공동선언이행을 위해 금강산과 평양을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2001년 “박정숙 선생”과 나란히 불교인권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덟살 아래인 <김선분 선생>은 안타깝게 “박정숙 선생”보다 먼저 2015년에 타계하였다.

▲ 사진 : 통일애국열사 박정숙 선생 민족통일장 장례위원회
▲ 사진 : 통일애국열사 박정숙 선생 민족통일장 장례위원회

존경하는 박정숙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붉은 혼은 여기 모인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영원히 불타오를 것입니다.

조국은 기억하리라!
선생님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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