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사로 되돌아보는 통일원로의 삶(6)

▲ 사진 : 고 김한덕선생 장례준비위원회
▲ 사진 : 고 김한덕선생 장례준비위원회

올해 들어 부쩍 원로 통일운동가 선생님들이 쓰러져 가고 있다.
오랜 옥고와 고문 후유증 그리고 남북관계의 경색이라 본다.

한 평생 통일운동가로 활동해 오신 김한덕 선생(전 민자통 상임의장, 전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께서 지난 8일 오후 8시경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장례식은 11월10일 안양장례예식장에서  <통일운동가 故 여백(餘白) 김한덕 선생 추도식>으로 엄수되었다.

“김한덕 선생”하면 <인민혁명당(인혁당)>과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민자통)>으로 대변된다.

▲ 사진 출처 : 고 김한덕선생 장례준비위원회
▲ 사진 출처 : 고 김한덕선생 장례준비위원회

<인혁당>으로 선생은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르신다.
5·16쿠데타 후 4월혁명의 반동, 공안탄압과 고문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것이 소위 1, 2차 인혁당 사건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했던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적발하였다.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남한 내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밝히며 도예종 등 47명을 체포한다.
그러나 발표와는 달리 기소권을 가지고 있던 검찰은 고문에 의해 조작된 허구라고 주장하며 기소를 포기하자 담당 검사를 바꿔가며 법원에 기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2차 인혁당 사건은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라고도 불리며, 1974년에 일어난다. 
박정희는 영구집권 시나리오인 유신이 흔들리자 또다시 공안탄압을 감행한다.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던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하였다는 혐의로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민청학련 관계자는 대부분 석방된다.
그러나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8명의 사형을 확정한 뒤 다음날 9일 도예종을 비롯한 8명의 열사들을 국가가 살인한다. 
재심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무자비하게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 사진 출처 : 고 김한덕선생 장례준비위원회
▲ 사진 출처 : 고 김한덕선생 장례준비위원회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고문조작 되었다고 발표한다. 
이어 2005년 12월 7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위원회가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의 고문 조작 사실을 인정하고 20일 후, 서울지방법원은 2차 인혁당 사건의 재심을 결정한다. 
뿐만 아니라 2006년 1월23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 1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포한다.

마침내 2007년 1월 23일,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 23부는 사형수 8인에 대해 무죄를 판결한다. 이것은 소위 2차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판과정이 위법하고 부당하였음을 국가가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소위 1, 2차 인혁당 사건은 고문 조작으로 사건이 부풀려졌지만 선생을 비롯한 국가살인 당한 열사들은 4월혁명 당시 이론가이자 실천활동가였다. 

<민자통>은 선생의 일편단심 조직이었다.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해방공간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과 같은 전선체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4월혁명 공간에 민족, 통일문제를 기치로 내세운 전선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에 선생은 참가한다.

민자통은 발기를 주도한 민족건양회와 혁신정당 사회당·사회대중당·혁신동지총동맹, 종교계 천도교·유교회, 지역 조직인 경북민족통일연맹, 피학살자유족회, 교원노조 그리고 청년단체인 민주민족청년동맹·통일민주청년동맹 등을 중심으로 1961년 2월 25일 결성되었다.

민자통은 “우리는 조국도 하나이며, 민족도 하나이다. 수많은 선열들이 흘린 피와 4월이 뿌린 피는 조국의 완전자주독립과 민주주의 발전, 민족 장래의 번영을 위한 것이니 우리는 이 정신에 따라 하루 속히 통일성업을 성취해아 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이와 함께 학생들의 남북학생회담 제의도 적극 지지하면서 1961년 5월 13일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1만여 명의 시민ㆍ학생들이 참석한 이날 대회는 △남북학생회담 전폭적지지 △남북정치협상 준비 등 6개 항의 결의문도 채택한다.
그러나 5·16쿠데타 이후 반공을 구실로 혁신계의 대량 불법체포와 불법구금 및 처벌하면서 민자통도 없어진다.

▲ 2003년 인혁당 관련 희생자 전국 순례 중 경남 창녕 서도원 열사 묘역(2번째 줄 왼쪽 3번째 검은 모자 쓴 분)
▲ 2003년 인혁당 관련 희생자 전국 순례 중 경남 창녕 서도원 열사 묘역(2번째 줄 왼쪽 3번째 검은 모자 쓴 분)

선생은 1988년 9월 15일. 먼저 작고한 존경하는 동지 이현수 선생과 함께 비록 전선 조직은 아니지만 당시 정세에 맞는 4월혁명 공간의 민자통을 계승하는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민자통)를 만든다.

그리고 이후 쉬지 않고 민자통 조직 강화와 발전에 힘쓰면서 마침내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존경하는 김한덕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조국과 민족 그리고 자주민주통일에 대한 신념은 여기 모인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영원히 불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 못 다한 꿈을 우리는 반드시 쟁취 할 것입니다.

조국은 기억하리라!
선생님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