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사로 되돌아보는 통일원로의 삶(3)

한 평생을 쉬지 않고 민족과 자주 그리고 통일운동에 몸 바쳐왔던 안재구 박사께서 지난 7월 8일 새벽 4시30분 경기도 군포 새소망요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7월 9일.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통일애국지사 故 안재구 민주사회장>이 거행되었다.

▲ 사진 : 장이근 선생
▲ 사진 : 장이근 선생

안재구 선생하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과 <구국전위 사건> 그리고 <신념의 쪽배로 분단을 건너온 수학자이자 통일운동가>로 제일 먼저 떠오른다.

<남민전>은 지식인 교수가 그것도 세계적 수학자가 무장혁명에 가담하였고 투사가 아닌 전사로 그리고 중앙위원이었기에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남민전>은 그 이전 비합정당인 전략당, 인혁당, 통혁당으로 각개 움직이던 것을 하나로 결합시켜 박정희 군사파쇼정권 타도 민족해방전선으로 투쟁한다.

▲ 사진 : 장이근 선생
▲ 사진 : 장이근 선생

발기인은 비록 김병권, 이재문, 신향식 선생 셋 밖에 안되지만 과거의 그 어떤 운동보다 각계각층이 결합하여 목표를 분명히 한 것이다.

남민전을 발기했던 당시 세분 선생의 걸어온 길은 조금씩 차이점이 있다.

김병권(金秉權) 선생은 대구에서 출생하여 해방공간에는 대구 대중일보 기자로, 4월혁명 공간에는 사회당 경북도당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전략당) 사건에 연루돼 징역 살고 나와 1975년 사회안전법 신고를 거부하며 수배 중이었다.

이재문(李在汶) 선생은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여 4월혁명 공간에는 통일민주청년동맹 활동과 민족일보 기자로, 1964년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이후 계속해서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구경북지부 활동,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지만 1차, 2차 인혁당에 연루가 된 상태였다.

신향식(申香植) 선생은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여 1965년 동아출판사 제작부에 취업하여 임금투쟁과 노조결성 그리고 학사주점 활동,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1972년 만기출소 후 1975년 사회안전법 발효에 맞서 신고를 거부하며 수배 당하고 있었다.

세분 선생은 비밀유지를 위해 1976년 2월29일. 4년마다 한 번 2월에 29일을 두어 하루를 늘리는 윤년에 남민전을 발기한다.

▲ 사진 : 장이근 선생
▲ 사진 : 장이근 선생

그리고 제일 중요한 투쟁 목표를 강령 제1조 “미일을 비롯한 국제제국주의의 일체의 식민지체제와 그들의 앞잡이인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을 수립한다”로 정리하였다.

즉 당시 남민전이 지향하는 것은 이 땅을 억누르고 있는 제국주의가 기본 척결대상이고 그 다음에 그를 대리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해야 하며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를 새롭게 수립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적으로 만든 전선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비군 무기 획득과 학교, 버스정류장, 건물 옥상 삐라살포 그리고 투쟁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상과 민중 공분 대상 중 하나인 동아건설 최석원 회장 자택 강탈 등 남민전의 반유신 투쟁은 그야말로 해방공간의 투쟁처럼 혁명적이었다.

이것은 소위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국가살인하는 박정희 유신체제를 평화적인 시위나 유인물 몇 장으로는 타도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짜 목숨을 던지는 투쟁을 한 것이었다. 

2019년 10월 19일. 천도교 수운회관 교당에서 진행 된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 생신 축하모임[사진출처 : 장이근 선생]
▲ 2019년 10월 19일. 천도교 수운회관 교당에서 진행 된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 생신 축하모임[사진 : 장이근 선생]

그리고 그 중심 다섯 분의 중앙위원 중 한 분으로 안재구 박사가 있었다.
당시 제주도를 제외하고 공안 수사관을 파견할 정도로 인혁당과 통혁당과는 다른 엄청난 사건이었다. 

신념의 쪽배로 분단을 건너온 안재구 박사님!

조국은 기억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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