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혁명소설

▲ 기지촌[사진 : 인터넥 캡처 필터처리]
▲ 기지촌[사진 : 인터넥 캡처 필터처리]

16

  한숙이가 왔다가 갔다.
  방바닥에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내가 이제 깨달은 것은 아니다. 이제 실행해 옮겼을 뿐, 전부터 나는 네 마음을 알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일을 실행 했을 때 잡혀 가거나 죽는 것이 두렵기 보다는. 욱철이 너를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이 두려운 일이었다.
  어쩌겠니, 네가 살아있는 땅에 하루라도 더 같이 살아있고 싶어서 이 길을 택한 것이다. 부디 몸조심해라’
  터질 것이 터진 것이다.
  평소 강욱철은 주위를 정리하고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일은 모른다. 머리카락 하나라도 한숙이와 관계 되는 것은 모두 다 치워야 했다.
  그는 재빨리 청계천에서 구입한 고물 라디오 싸이클을 돌렸다. 통금 사이렌 소리와 함께 자정뉴스가 흘러 나왔다.
  동두천 기지촌에서 발생한 미군장교 살해사껀 보도가 톱뉴스였다.
  동거중인 한국 양부인의 소행으로 전 수사력이 이 여인의 행방을 좇는데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범행 숫법이 매우 치밀하고 잔인하여 원한에 의한 범행이 아닌가 한다는 것이다.
  옷장 속의 옷가지. 경대 서랍의 반지 목걸이 등 귀중품이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우발적 단순범행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편 오랫동안 기지촌 범죄수사를 담당해온 경찰간부의 견해에 의하면, 이번 사껀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껀 현장을 둘러보고 나서 어쩐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고 했다. 혹시 고정간첩과 연계된 그런 사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여인은 하등 미군 동거자를 살해할만한 이유가 없었다.
  집주인 노파의 증언이나 이웃 사람들, 이 여인과 가까이 지냈던 양색씨들의 말을 종합해 보아도 그렇다. 특별히 살인사껀을 저지를 만한 그런 혐의점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뉴스를 듣고 난 강욱철의 판단으로도 이 사껀이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범인에 관한 정확한 신상파악과 연고자가 밝혀져야 하는데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한숙이네는 고향을 떠난 지가 오래되었다. 그녀의 원적지에도 이렇다 할 친척도 없었다. 정상적인 이사나 이주가 아니고 가산이 탕진되어 밤밥을 해먹고 도망을 치다시피 고향을 떠났었다. 고향과도 전혀 연락이 없었다. 유일한 피붙이였던 양친이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떳떳치 못한 신분이어서 한숙이 자신이 친분이나 연고를 만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유일한 연고가 강욱철과의 관계였는데, 강욱철과의 관계는 매우 제한적이고 철저하게 숨겨진 일이었다. 일의 성격상 외부에 노출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긴장이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이라도 일의 추이를 잘 종합해서 여차하면 불암산밑 고충석의 거처로 몸을 숨겨야 할지도 모른다. 일이 많이 어렵다고 판단이 되면 땡중 곽세정의 수락산 바위굴로 깊숙이 들어가도록 해야한다. 그렇지 않아도 땡중 세정거사(世正居士)와 의논도 하고 그의 넘쳐나는 담력을 시험해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엔 계속 불을 지르는 것도 방법이다.
  조용해져버린 세상. 3S정책에 물들고 취해버린 세상, 코쟁이만 봐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양말(洋語) 앞에서 기가 죽는 세상을 깨워야 한다. 왜놈들 게다짝 소리도 막아야한다.
  작은 전투, 차선의 방법이라고 해서 꼭 차선의 상황을 전개시키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선 차선의 방법이 보다 더 최선의 상황을 전개시키기도 한다. 큰 전쟁도 전쟁이고 작은 전쟁도 전쟁은 전쟁이다. 소규모 전투라고 해서 꼭 작은 파장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총알 한방이 역사를 바꾸는 크나큰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다.

  강욱철은 날이 밝기를 기다려 새벽 첫 뻐쓰를 타고 불암산으로 향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는데도 피곤에 졸리는 것이 아니었다.
  긴장 때문이었는지 정신이 풀리지 않고 말짱하게 맺혀있는 기분이었다.
  감상은 금물이다.
  하지만 한숙이 일이 걱정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여자의 몸으로 살인범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도 한국사람들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미국 군인을 살해했다. 백인 장교였다.
  24년 동안 불법 점령 주둔하고 온갖 행패를 다 부려도 양키고우홈 소리가 안 나오는 남조선 땅에서 말이다. 저들이 남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은 후 백인 장교가 한국인의 손에 살해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사안이 중차대했다.
  사안이 중차대한 만큼 한숙이가 느끼는 압박감도 더했다.
  꼭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금 죽어도 그렇게 아까운 목숨은 아니었다. 살아서 붙잡히는 경우 만에 하나 강욱철에 해가 될 수도 있었다. 최소한 살아서 붙잡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강욱철은 한숙이에게 막말을 한 적이 있었다.
  머리가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게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강욱철이 대강 묵시적인 말을 했어도 한숙이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강욱철의 말은, 네가 스스로 네 목숨을 처리해라. 아니면 네가 지금까지 저지른 허물을 절반이라도 씻어 낼 대안을 찾아보아라, 라고 내뱉었었던 것이다.
  강욱철은 모욕감 때문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한숙이가 미우면 미울수록 더욱 치가 떨렸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제가 생각을 해도 강욱철 자신이 이 일에 대한 집착이 이상할 정도였다. 한숙이가 죽지 않으면 강욱철 자신이라도 죽어야 할 것 같았다. 한숙이도 자신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에 한숙이가 일을 저지르면 지켜야 할 것 몇 가지를 일러두었었다.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남쪽 땅끝까지 가라. 되도록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섬을 택해라. 그것도 아주 작은 섬이면 더 좋다. 한두집 늙은이들만 남아있는 섬을 찾아라. 결혼에 실패하고, 나쁜 남자에게 매맞고 버림받고 자살을 하기 위해 섬에 온 여자, 알약도 준비하고 아무 때나 죽어버릴 수 있는 자살 예비여자로 살아라. 절반은 미친여자로 살아라. 동정을 유발하여 숨을 자리를 제공 받아라.
  강욱철은 뻐쓰에서 내리는 길로 곧장 윤창현의 숙소를 찾았다.
  사전연락이 없었기에 먹고 살기 위해 부부가 벌써 집을 비우고 없었다.
  혼자 사는 고충석의 하꼬방에서 수제비 한그릇씩을 들이마시고 수락산 땡중이 사는 암굴을 찾았다.
  고충석은 맹봉사령이란 별칭을 받고도 남았다.
  강욱철이 자주 불러 세워서 고충석은 한참씩 다리를 쉬고 기달리야 했다.
  흡사 축지법을 쓰는 도사처럼 고충석은 훌쩍훌쩍 뛰다시피 산길을 힘도 안들이고 올려 걸었다.
  그러는 고충석을 보며 강욱철은 그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도 늘 그런 생각이 있었지만...
  그의 굵직굵직한 뼈마디 하며 울근불근 솟아오른 근육통, 수제비 한그릇 먹고도 바위산을 펄펄 날아오르는 것이다. 툭 불거진 광대뼈에 우락부락한 눈매, 뭉툭한 콧날에 구레나룻이 무성하다. 좋은 재목이 때를 잘못 만나서 녹이 슬고있다는 생각이었다.
  강욱철은 한없이 부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얼마 전 안국광대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뻐쓰에서 노루잠 자다가 호랑이 꿈을 꾸었었던 일이 생각 되었다.
  그 때 고충석동지는 민족군 타격대 제2지대장으로 해방촌과 이태원 쪽을 맡고 있었다. 윤창현동지는 제1지대장으로 한강로쪽과 삼각지쪽을 맡았었다. 이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용산 주둔 미8군기지 방어벽을 포위 기습폭파 돌격작전에 성공했었다. 결국 미8군 사령관 맥클레이드의 백기투항을 받아냈었다.
  재목은 목수를 잘 만나야 하고 목수는 재목을 잘 골라야 한다. 목수는 건축재의 성질과 크기 모양새를 잘 파악하여 적재 적소에 골라 배치하고 적절하게 잘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훌륭한 집을 지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은 망해서 나라는 허물어져 가는데 저런 재목들이 쓰일 길이 없으니...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