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혁명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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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류탄 투척사껀이 터진지 40여일이 지났다.
  행주산성에서 기염을 토하고 결의를 다진지도 20여일 전의 일이었다. 
  다음 팔매질 차례는 윤창현동지였다. 윤동지가 직접 뛸 것인지. 넝마병단에서 몇 명을 차출할 것인지가 얼른 결정이 어려웠다. 윤동지는 자신이 직접 뛸 것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다음 더 큰 일에 대비하고 모든 상황을 종합 판단해야 할 싯점인 것이다.
  강욱철이 처음 염두에 둔 건 박정희의 잠자리였었다.
  여러 방면으로 정찰을 끝냈었는데 청와대 본관 접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도방위 사령부의 방어벽이 너무 두꺼웠던 것이다.
  강욱철의 전법은 최소한의 인원, 부족한 무기로 최대의 파급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일본인 관광객 공격은 한번 써 먹었기로 저들의 경비가 제법 삼엄한 것이다. 제한된 공격으로 극대의 효과, 상대에게 타격을 주고 민중들에겐 희망을 주고, 속 시원한 대리만족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남산소재 중앙정보부를 겨누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정보부 공격의 잇점은 청와대에 비해 경비가 비교적 허술하다. 야간공격일 경우 청와대와는 비교가 안되게 헛점이 많은 것이다.
  반면, 민간주택지가 근접하여 치고 빠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반대로 주택지에서 떨어진 산등성이쪽은 경비초소가 촘촘히 구축되어 있었다. 공격에 성공한다해도 사회적 파장이 청와대와는 비교가 안되게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정보부는 군에 적을 둔 현역들이 사복을 입고 주요 간부 요직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아서 군대식 근무형태가 주류인 것이다. 야간에는 이후락을 비롯한 국 과장이나 주요 간부들이 모두 퇴근상태가 되는 것이다. 당직근무를 하는 피라미들 뿐인 것이다. 잡으려면 월척을 잡아야 한다. 정보부장 이후락은 남조선 최고의 여배우와 밤마다 호텔잠을 잔다는 것이다. 지난번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으로 쫓겨 간 남자배우의 배우자가 바로 이 여배우였다. 이후락의 첩노릇을 하는 것이다.

▲ 북한산
▲ 북한산

  결국 청와대 공격이었다.
  정면 공격으로는 정문 초소정도가 공격권에 들었다. 다른 건물들은 거리가 있어서 박격포 공격이 아니면 접근이 어렵다. 수류탄이나 가래떡(TNT)으로는 사정권 밖이었다. 우수한 개인화기로 무장한 삼십 명 이상의 기습공격이라야 정문초소를 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난감한 일이었다.
  머리 좋은 김승국도 고개를 갸웃둥거릴 뿐 묘안이 없었다.
  행주산성에서 황웅권과도 머리를 짜보았지만 역시 난제였다.
  그렇다고 일을 미룰 수도 없었다.
  단안을 내려야 한다.
  세상 꼬라지가 이 모양이 되었는데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을 위해서 윤창현동지를 빼고 넝마병단 3명. 고충석의 딲어병단 2명을 각각 따로 동원하기로 했다.
  이미 현지답사가 끝난 지역이지만 최근 변화를 참작해서 앞으로 3일동안 현지정찰을 해야했다. 공격요령 숙지, 침투시 사전 생포 되었을 때, 사후 부상을 당하거나 붙잡혔을 경우에 행동요령을 또 3일 동안 충분히 교육에 임해야 한다.
  투철한 혁명정신, 공격의욕, 민족통일 의지에 불타야한다.
우리가 겪은 이 모진 가난, 외세에 의한 치욕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강철같은 신념이 우선이다.
  인간은 한번 세상에 나왔다가 한번 죽는다.
  나라 민족을 위한 죽음은 민족역사와 함께 영원불멸이다.
  녹두장군, 안중근 윤봉길을 보라, 만세에 빛나는 위대한 삶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미리미리 혁명교육이 되어 있었으나 이를 다지고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번에 동원된 특공 5인조는 윤창현 고충석과 함께 한판 터뜨릴 날을 기다리고 고대하는 불타는 공격의지에 강철파 중의 강철파였다.
  곱게 물든 굴참나무 단풍잎이 한잎 두잎 떨어져 날리는 십일월 하순이었다. 수락산 암굴 산도적 땡땡이중 이동명은 이때에 이미 송추 계곡 깊숙한 릉선을 넘어 사패산쪽에 들어와 있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송추계곡 릉선에서 조금 벗어난 사패산쪽은 적막강산이었다.
  산새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모든 준비를 끝낸 5인 특공조는 땡땡이중 이동명이 마련한 은신처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중 딲어병단 소속 두명은 우선 이발 목욕부터 신경을 썼다. 손톱 발톱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손질을 했다. 입성도 귀티가 나게 고급으로 골랐다. 산뜻한 색깔의 넥타이도 준비했다. 옷 주머니엔 향수를 뿌린 손수건과 서울에서도 좀 잘 사는집 아이들이 넣고다니는 일용품을 갖추어야 했다. 은단이나 껌 같은 것도 사용하다 남은 것처럼 적당량을 소지했다. 용돈도 적당액을 화폐단위가 자연스럽게 구색을 맞추어야 했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접는 가죽지갑도 마련했다.
  이 두 사람은 청와대 정문공격조였다. 
  이 공격조를 위한 앳된 처녀애인 두 명이 필요했다. 윤창현 동지가 그의 부인을 통해서 의지가 강한 제주 해녀출신 처녀들을 선별해 놓았었다. 이 처녀들은 통의동 첫째 골목과 효자동 골목 입구에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어 도착해야 하는 것이다. 공격조가 수류탄 투척을 끝내고 골목으로 뛰어들면 즉시 손을 마주잡고 빠른 동작으로 골목을 빠져 나와야 한다. 사전답사를 끝낸 인적 드문 골목을 통과해야 한다.
  그다음 내자동에서 큰길로 애인들의 다정한 데이트처럼 나서는 것이다. 그리곤 사전에 지목해 놓은 술집에 들면 되는 것이다. 그 사이 공격조가 입고 있던 위장용 검정 통옷을 벗겨 핸드백에 쑤셔 넣어야 한다.

  첫 눈이 내릴려는지 하늘은 잔뜩 찌프린 얼굴이었다.
  음력으로 오늘이 시월 스무하룻날이었다. 초겨울 해가 짧아서 밤 열한시면 해가 지고 한 밤중이 되는 것이다. 하늘에 구름이 없으면 옆면이 찌그러진 달님이 떠오를 시간이다. 검은 구름이 두껍게 하늘을 덮어서 바로 옆엣사람을 구별하기도 어려웠다. 
일이 잘될려면 자연도 이렇게 궁합이 딱맞게 호응을 하는 것이다.
  수락산 땡땡이중이 생긴 것 보다는 자상했다.
  쇠고기 반찬에 이른 점심을 든든하게 먹였다. 그리곤 찹쌀에 팥알이 박힌 주먹밥 두덩이씩을 저녁용으로 챙겨 주었다. 소금물을 묻히고 참기름까지 발라서 반찬 없이도 저절로 넘어가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하기야 목숨을 걸고 싸움터에 출정하는 젊은이들인데 그렇게 챙겨주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청와대 전면을 공격할 2인조는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나중에 해가 진 후 자동차로 이동을 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넝마병단 소속 3인조는 계속 험한 산길을 타야 하기 때문에 오후 3시 정각에 예정대로 은신처를 출발했었다.
  아무리 산속 산길을 간다해도 해가 있을 때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되도록 잡목숲에 의지해서 능선을 넘었다. 긴장 때문에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불과 1년여 전에 김신조가 박정희 목을 따러 왔었던 길이 가까운 곳이었다.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송추계곡 전체가 간첩이 남파되는 루트로 지목되어 있어서 여간 불안한 곳이 아니었다. 수락산 땡땡이중은 허허실실 전법이라고 오히려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송추능선이 안전하다고 여유를 보였었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송추계곡이 능선 하나 거리인데 불안한 나날이었다.
  낮시간에 답사를 했었던 길이었지만 어두운 밤길이라 낮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야말로 사투에 사투를 거듭하여 북악산 동북부의 경사면. 근거리에 도착했다.

  청와대 전면 정문쪽 공격조와의 약속시간은 밤11시 정각이었다. 통금 예비싸이렌이 불기 30분 전이었다. 청와대 경비병들이 통금예비싸이렌에 맞추어 경계태세 강화에 들어간다는 정보를 입수했었다. 청와대 후면 외곽에 있는 수경사 제1경비초소 공격은 밤이 늦을수록 공격이 유리했다. 하지만 전면공격조와 호흡을 맞추자면 밤 11시가 가장 적합한 시간이었다.
  만약 전면과 후면 공격에 시간차가 나는 경우 나중에 공격하는 특공조는 위험부담이 배가하는 것이다.
  김신조부대의 침투작전에 혼줄이 난 박정희는 요즘 지하벙커에서 잔다는 정보도 있었다. 청와대 본관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외곽 경비를 이중삼중으로 보강했다.
  북악스카이웨이를 뚫어 외곽경비를 보다 용이하게 구획정비를 끝냈다. 사태가 벌어지면 바로 차량을 통해 병력투입이 가능했다. 이 도로를 외곽경비의 마지노선으로 초소를 세우고 이중삼중의 철조망을 설치했다. 바깥쪽 철선에 고압전류를 연결했다.
  지금 특공 3인조가 도착한 지점은 스카이웨이 경비선에서 2백여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오후3시 사패산 은신처를 출발, 도봉산을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며 북한산 만장봉을 바짝 끼고 돌았다. 소귀고개를 넘어 상장봉릉선을 또 넘었다. 인수봉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 밑 동쪽 기슭으로 붙었다. 다시 노적봉 등성이를 타고 동장대에서 바로 문수봉 등성이를 또 넘었다.
  진관사 비봉 승가사쪽은 김신조루트였다. 이를 피해 되도록 남서쪽이 아닌 동북쪽으로 붙었었다. 험로였었다. 남장대에서 보현봉 형제봉을 지나 평창동에 이르는 길을 택했다. 사실상 이 길은 통행금지구역이어서 처음 개척하는 루트였다.

  무려 7시간 반에 걸친 강행군이었다. 중간에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시간이 있었다곤 하지만 그만큼 속도를 낼 수 없는 야간 산길이었다. 이동 중 노출을 피하기 위한 숨소리조차 죽여야 하는 은밀 행군이었다.
  강행군뿐만이 아니고 이번 작전 역시 대단히 무모한 특공활동이었다. 청와대 경비는 대통령경호실에 파견된 내무부 치안국 소속 경찰병력이 맡고 있었다.
  김신조 부대에 혼줄이 난 박정희가 불안에 떨자 잔꾀 많은 이후락이가 수도경비사령부 창설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의정부 이남 수도권지역 방어부대라는 것이다. 박정희 잠자리를 지키는 국군부대이지만 바로 그렇게 내세울 수는 없었다. 청와대 경호실이 있는데 또 무슨 옥상옥이냐 하는 여론을 의식한 것이다.
  별 세 개 육군 중장이 사령관이었다. 군단급 대부대인 것이다.
  내무부 치안국에서 담당해야 할 청와대 경비를 국방부가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모양새가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청와대 경비사령부가 아닌 수도경비사령부란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백성 속이고 눈가리고 아옹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엄청나게 보강이 된 청와대 경비망이었다.
  군단급부대의 방어망을 뚫고 공격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을 모두 고려한 현실에 맞는 제한된 공격작전을 택했다.
잘못 판단했다간 어렵게 확보한 무기나 폭약. 귀중한 특공전력을 모두 잃게 되는 것이다.
  수경사의 제1차 방어선은 김포공항 서북방 한강변 고촌면에서 고양 삼송, 양주 별내 퇴계원, 남한산성에 이르는 선이었다.
  송파 광주대단지가 포함되었다. 이것은 괜스레 그려놓은 선이고 수경사의 주저항선은 북악 스카이웨이 방어선이었다. 북악 스카이웨이를 뚫고 넘을 묘안은 없었다. 초소에 배치된 병력 숫자가 문제 아니고 고압전류 철선에 월남전쟁에서 얻어온 발목지뢰 부비트렙이 뿌려져 있었다.

  열시 반 정각, 넝마병단 3인 특공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북악산 북동쪽 경사면을 향해서다. 스카이웨이가 지척인 지점이다.
  양춘식, 엄영길, 최민구, 이들은 부모형제가 없었다. 고아원에서 자라서 성과 이름은 고아원에서 지어준 것이다.
  특히 성은 고아원 원장의 성을 따라야 했다. 국민학교를 다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고아원을 뛰쳐나왔다. 그 후 제 몸통보다 몇배나 큰 왕다래끼를 짊어지고 살았다.
  넝마주이 다래끼는 보통 다래끼와 달리 위로 아가리가 휑하게 뚫린 엄청나게 큰 다래끼였다. 채워도 채워도 한이 없었다. 등에 짊어진 다래끼 팔자처럼 자신의 인생도 앞길이 휑하게 뚫려버린 팔자였다. 아버지의 이름도 성도, 어머니의 얼굴도, 고향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신세였다. 세상에 있는 구박이란 구박은 다 받아 보았다.
  고아원 밥이 얼마나 맵고 짜고 신지, 한번 뛰쳐나온 고아원엔 다시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되려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거지생활이 더 좋았다. 나중 생각해보니 학교를 못다녀서 후회스럽기는 했었다. 그래도 넝마다래끼를 진 다음 제주 윤왕초 밑에서 많이 배웠다. 휘경동 이문동 토굴움막에서부터 시작을 했다. 불암산 판잣집 생활까지 계속 제주왕초형과 같이 있었다. 그 때 현이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제주에서 서울로 왔었는데 나이가 한 스무살쯤 되었었다. 왕초아저씨는 나이가 많았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제주도에서 일어난 반란사껀 때 총을 들고 한라산으로 들어갔었다는 것이다.
  왕초아저씨는 처음부터 현이형을 유난히 사랑했었다.
  현이형과 같이 생활한 지 2년만에 왕초자리를 그냥 넘겨 주었다. 이것도 나중에야 알았지만 지금 일본에서 살고있는 현이형의 셋째형님과 같이 한라산에서 토벌경찰과 싸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이형의 형님과 왕초아저씨는 서로 친구였다는 것이었다.
  현이형은 왕초가 되자마자 자신을 형님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솥밥 먹는 같은 형제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그리고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으자고 했었다. 넝마를 주어 오는대로 분량에 따라서 그날 그날 제 값을 쳐주는 것이었다.
  그리곤 각자 개인별로 저금통장을 하나씩 만들어주었다. 처음에는 왕초형을 믿지 않고 반신반의 하여 돈을 더 빼앗아 가기 위한 술책으로만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자 왕초형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돈이 조금 모이자 현이형은 군대에서 흘러나온 헌 천막을 하나 구입하여 넝마주이들의 숙소겸 야학을 시작했다.
  저녁시간에 아이들을 가르치러 오는 선생님들은 좋은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 형님들이었다. 학교 교과서 학과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다.
  이에 아이들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이 세상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너도 있고 나도 있고 또 옆에 다른 사람들도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같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앞만 보고 살면 안되고 옆도 위도 아래도 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이 사회이고 그 사회공동체가 커져서 나라라고 하는 공동체가 생겼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사는 나라는 피가 같은 민족 공동체라는 것이었다.
  잘 산다고 하는 것은 돈만 많아서 잘 사는 것이 아니고 보람있고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인간에게는 생각 정신이라고 하는 것을 각자 가지고 있다. 정신의 자유는 신체의 자유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다. 이런 자유는 저 혼자서만 누려서는 참 자유가 아니다. 나라라고 하는 우리민족 공동체와 함께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누려야 하는 것이다.

  어떤 대학생 형님은 이런 말도 들려주었다.
  종교인들은 하늘에 있는 신(神)을 믿는다. 우리는 하늘에 올라갈 수도 없고 하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내가 속한 우리 사회 우리 민족공동체가 우선은 절대 신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 우리 민족공동체의 자유가 억압되었을 땐 우리는 이를 결단코 용납하여서는 아니된다. 우리들의 목숨은 우리 민족공동체와 함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밤마다 천막학교에서 석유등을 켜고 이렇게 배웠다.
  양춘식, 엄영길, 최민구 이들의 이름은 지금부터 하늘과 땅이 지어준 이름이다. 이시각 이후 이들의 아버지 어머니는 이들 머리 위의 하늘이고 이들이 발딛고 선 땅이 될 것이다.
  “야!
  양춘식! 최민구! 나, 엄영길이다.
  우리는 형제로 살았고 형제로 죽는다!”
  “나는 양춘식이다!
  천막학교,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어머니의 뱃속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들어가고 끝이 무겁게 꾹꾹 눌렸었다.
  “나 최민구다!
  우리 공동체 팔아먹는 놈들!...
  우리들은 배운대로 싸운다!”
  “출발!”
  엄영길 특공조장의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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