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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康成銀) 조선문제연구센터장의 는 15회로 1년간의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바쁜 일정에도 훌륭한 원고를 꾸준히 보내주신 강성은 필자에게도 감사드립니다.1950년 일본 오사까에서 2세로 태여남1973년 조선대학교 졸업그후 조선대학교에서 교원을 함.조선대학교 역사지리학부 학부장, 도서관장, 부학장을 역임2017년 정년퇴직, 현재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 쎈터장으로 있음전공은 조선근대사주요 저서『一九〇五年韓国保護条約と植民地支配責任―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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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문제연구센터 센터장
2020.06.0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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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약탈문화재 반환문제의 시점1) 일본에 산재하는 조선문화재일본에 산재하는 조선문화재에 대해서는 한국문화재관리국・문화재연구소나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조사, 리홍직・리구렬・남영창 등의 조사가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확인된 조선문화재는 2만 9천 점이 된다. 그러나 이외의 개인수집가에 의하여 소장되고있는 조선문화재는 실로 30만 점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조선문화재의 대부분은 근대일본에 의한 조선침략・식민지지배기에 불법적으로 약탈된 것이고 아직도 약탈의 경위나 현재의 소재지가 불명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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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2020.05.1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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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후처리에 있어서의 국제공약의 양면성(식민지지배책임을 불문)1) 조선해방, ≪신탁통치≫의 합의는 있었는가1941년 8월에 체결된 영미공동선언(대서양헌장)에서는 민족자결의 원칙(영토불확대, 모든 극민은 정치체제선택의 자유, 강탈된 주권과 자치권의 회복), 평화의 원칙(경제적번영, 사회보장 등의 면에서 국제협력)을 확인하였다. 이에 소련도 곧 찬의를 표시하여 42년 1월에 작성된 연합국 공동선언에 도입되었다.그러나 영미공동선언은 처음부터 제한성이 있었다. 영국의 처칠은 직후인 2월 영국 하원에서 영미공동선언은 영국의 식민지에는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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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2020.04.2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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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기 우리 동포들은 살길을 찾아 조선반도로부터 동아시아 각지에 대량적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 해외침략은 유럽의 원거리식민지와는 달리 인접하는 동아시아지역에 동심원상으로, 도넛형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인의 이주도 종주국을 포함한 동일한 지역내에 진행되었다. 그 때문에 조선독립운동은 이주지의 반일혁명운동과의 국제적 연대밑에서 전개되게 되었다. 공동의 적인 일제를 반대하여 연대하여 싸우기는 하였으나 적지 않게 서로 간의 차질도 있었다. 특히 해외조선독립운동에서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간에서 갈등이 있었고 심각한 후과도 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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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2020.04.10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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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주의운동1) 《부르조아민족주의》, 《민족자본》3.1운동 이후 민족해방투쟁의 주체는 부르조아민족운동으로부터 사회주의운동에로 전환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조선독립운동사의 중심과제의 하나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종래 좌익측에서는 사회주의적이지 않는 민족운동의 제조류를 《부르조아민족주의》라고 일괄해서 파악하고 그 계급적 기초를 《민족부르조아지(=민족자본)》라고 이해하여왔다. 그러한 이해는 재검토를 요하지 않을까.《부르조아민족주의》라는 정치사 개념은 본래 1920년대초 레닌에 의하여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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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2020.03.2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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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운동의 원인 - 주체역량의 성장조선 3.1독립운동은 러시아의 10월혁명이나 윌슨의 14개 조를 계기로 고조된 ≪민족자결≫에로의 세계적인 기운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반도만에 머물지 않고 세계 각지에 재주하는 조선인과 상호 연쇄하면서 발전한 전민족적인 반일독립운동이었다. 또한 3.1독립운동은 일본이나 유미제국의 식민지지배에 반대하는 아시아 민중들의 민족해방투쟁을 고무하였으므로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획기를 이루었다.그러나 1910년대의 ≪무단통치≫하의 독립운동을 둘러싸서 그것은 ≪페새기≫(퇴조기-편집자 주)의 것이며 3.1운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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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2020.03.0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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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시아》란대일본제국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시발로 하고 그 후 대륙과 해양에로 팽창하여 ≪대동아공영권≫을 형성하려고 꿈꾸었다. ≪대동아(大東亞)≫란 ≪큰 동아시아≫를 의미하는데 그저 지역적인 개념이 아닐 것이다. 도대체 ≪동아시아≫, ≪아시아≫란 무슨 말인가.《아시아》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에서 에게해의 동쪽을 《asu》라고 호칭한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후에 《asu》에 라틴어의 접두사 《ia》가 붙어서 《Asia》라는 말이 생겼다. 고대 그리스에서 다다넬즈해협을 넘어 지금의 뛰르끼예방향을 가리켜 동쪽을 의미하는 아시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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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2020.02.10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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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회로(迂回路)로서의 ≪보호국≫1904년 러일전쟁의 도발과 일본침략군의 조선강점하에서 강요된 ≪한일의정서≫에 의하여 조선은 실질적으로 식민지로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5조약≫의 강제조인에 의하여 조선은 ≪보호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이른바 ≪대항해시대≫의 16세기이래 서유럽제국사이에서 폭력적인 식민지쟁탈전이 전개되었으며 19세기말에 이르러 세계는 거의 유미열강에 의하여 분할되었다. 열강의 지배에 대하여 식민지,반식민지제민족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아프리카의 보어전쟁이나 중국의 의화단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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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2020.01.2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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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호조약≫의 강요1905년 9월의 포츠마스강화조약은 제2조에서 ≪러시아제국정부는…일본제국정부가 한국에서 필요로 인정되는 보호 및 감리 조치를 취함에 있어서 이를 저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음을 약속한다≫고 규정하여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서 지배하게 된다. 이를 조선에 인정시키려고 한 것이 동년 11월에 강요한 ≪한국보호조약≫이었다(조약조인서에 정식명칭이 기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제2차 일한협약≫, 조선에서는 ≪을사5조약≫,또는 ≪을사늑약≫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고있다). 이 조약의 제1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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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2019.12.30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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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간섭과 ≪을미사변≫1) 삼국간섭과 조선정부의 대응청일전쟁에서의 청국의 패배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국제질서의 해체를 결정적인 것으로 되게 하였다. 동아시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분할경쟁의 주무대의 하나로 되었다. 승리한 일본은 1895년 4월 17일 마관조약(정식명 일청강화조약)에서 조선은 ≪자주독립≫이며 조선에서 시행하던 공헌전례를 금지한다(제1조)고 규정하여 청국과 조선의 종속관계를 폐기시켰다. 또한 료동반도와 대만 및 팽호열토를 할양하며 군사배상금으로 고평은(庫平銀) 2억테르(兩)을 지불하도록 하였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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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2019.12.1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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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세기중엽의 웨스턴 임팩트(서양의 충격)에 의한 아시아의 변동18세기후반부터 19세기전반에 걸쳐서 유미에서의 산업혁명에 의하여 유미제국의 공업력과 군사력은 현저하게 발전하여 그 힘을 배경으로 하여 해외시장 확대에로 나아갔다. 인디아・동남아시아 식민지화가 진척하는 한편 중국・일본도 포함외교에 굴복하여 개항을 강요 당하였다. 그 결과 동아시아도 자본주의의 세계체제에로 편입되어 외교적으로는 조약체제(조약에 기초한 외교관계)의 성립으로서 나타났다.2. 대원군정권과 메이지(明治)정부1) 대원군정권이 시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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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2019.11.1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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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로마찌(室町)시대의 일본과 조선명의 건국과 중화세계의 재건원조의 말기가 되면서 몽골의 지배에 대한 농민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백련교를 신봉하는 홍건군(紅巾軍)이 유력하였다. 이 홍건군의 란속에서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낸 것이 주원장(朱元璋)이었다. 주원장은 1368년 금릉(지금의 남경)을 수도로 하여 명왕조를 창건한 직후에 군대를 몰아 대도(지금의 베이징)를 점령하여 몽골세력을 물리쳤다. 오래간만에 출현한 한족의 통일왕조는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기초하여 중화제국의 재건을 목표로 주변제국에 사자를 파견하여 조공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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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2019.09.2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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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헤이앙・가마꾸라시대의 일본과 고려-자존과 동경북방민족의 대두와 고려욍조번영을 자랑하던 당제국도 안사(安史)의 란 이후 동요하여 드디어 907년에 멸망하였다. 이에 계속하여 926년에 발해가 멸망하였다. 조선반도에서는 신라왕조가 지방호족들의 반란에 의하여 통제력을 잃고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정권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지방호족의 한 사람인 견훤은 남서부지역에 세력을 확장하여 후백제를 세워 북방에서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칭하고 신라・후백제・후고구려가 분립하는 후삼국시대가 되었다. 이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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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2019.09.09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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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까불교와 조선삼국6세기에 들어서서 신라의 급성장은 드디어 가야를 통합하고 문자 그대로 고구려・백제・신라에 의한 대항의 양상이 깊어졌다. 게다가 중국의 정세가 크게 변화한다. 북조로부터 나온 수가 589년에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켜 남북조의 분립에 종지부를 찍었고, 7세기에 들어서면 당이 이에 교체되어 한층 강력한 체제를 꾸려나갔다. 강대한 통일제국의 출현이라는 동아시아정세 속에서 왜국도 조선삼국과 함께 긴박한 대응에 쪼들리고 동세기말에 왜국은 ≪일본≫이라는 고대의 통일국가를 완성하는데 이르렀다.인디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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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문제연구센터 센터장
2019.08.27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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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에서의 주민의 형성일본열도의 주민형성과정을 볼 때 재래의 죠몽사람(繩文人. 고몽고로이드=남몽고로이드)과 야요이(彌生)이후의 도래계의 사람(신몽고로이드=북몽고로이드)들의 쌍방을 시야에 넣어 파악하여야 한다. 현재의 아이누민족, 류큐민족은 고몽고로이드에 속하는 선주민족인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현 은 야요이 이후 대량적으로 조선반도로부터 도래하게 된 신몽고로이드와 재래의 고몽고로이드가 혼합하고 형성된 집단이다. 어떤 시뮤레션에 의하면 현대의 일본인은 전국 평균으로 죠몽계 3, 도래계 7의 비율로 쌍방의 유전자를 갖추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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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조선문제연구센터 센터장
2019.08.13 2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