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51)

1) 역사적 주체의 변화

앞에서 주체사관에서 자주성의 실현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 자주성은 내적으로 계급 해방을 외적으로는 민족의 독립을 동시에 의미한다고 했다. 이제 주체사관의 두 번째 측면을 살펴보자. 즉 역사는 주체의 운동이라는 개념이다.

이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역사의 변화는 주체 자신의 변화를 매개로 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혁명은 곧 인간의 혁명이다. 이런 주체사관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역사적 사실 자체를 들여다보자. 이런 사실들은 이미 그 이전의 많은 마르크스 역사가들에 의해 파악된 사실이었다.

역사를 보면 각 시대 사회의 규모, 사회구성체(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적 수준) 내부의 분화의 수준, 그 역사의 주체도 변화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 중 전자는 객관적 측면이며, 후자는 주관적 측면이다.

논의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 객관적 측면은 생략하고자 한다. 혹 관심이 있으면 내가 페이스 북 어디에선가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의 발전을 설명한 곳이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주로 주관적인 측면만을 살펴보자.

2) 노예와 예속농 

우선 노예제 시대를 보자. 노예의 경우 아직 자기인식이 없다. 노예의 종교는 거의 부족 종교의 수준, 즉 자연신(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노예의 자기인식이 없었으므로, 노예 반란은 거의 즉흥적이었고, 쉽게 진압되었다.

내적으로 노예제의 한계가 고대 국가가 무너지는 원인이었지만 노예 반란으로 노예제 사회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고대 노예제는 새로운 봉건제를 수용한 민족의 침입에 의해 무너졌을 뿐이다. 고대 노예국가 로마의 멸망이나 고조선의 멸망을 생각해 보라.

중세 예속농민의 경우 그들은 자기의 요구를 어렴풋하게나마 자각한다. 그들의 자기인식은 보편 종교의 형태로 출현한다. 세계 4대 종교가 모두 그 산물이다. 예속농민의 어렴풋한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중세 내내 시시때때로 세계 어디를 가리지 않고, 농민반란이 출현했다.

농민반란은 계급투쟁이지만, 항상 종교반란의 외피를 쓰고 있었다. 그 이유는 예속농민의 인식이 어렴풋한 자각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중세 봉건제 사회가 무너진 것은 이런 농민반란 때문이 아니다. 농민반란은 때로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도 했지만 그 왕조는 그 이전의 봉건제 사회를 계승했을 뿐이다. 

▲ 사진 :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홈페이지

3) 이성의 간지

봉건 사회의 극복은 봉건제 사회의 주변, 즉 도시에서 일어났다. 도시에서 새로운 부르주아 세력이 등장한다. 계몽적 사유가 발전하고, 자기의 이익을 지키려는 부르주아적인 의식이 성장하면서 마침내 혁명이 일어난다.

부르주아 세력의 자기인식은 자기 이익의 인식에 그친다. 그러므로 그 스스로는 단결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들 부르주아는 자기 스스로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의 외부에 그들을 단결시키는 역사적 영웅이 출현한다. 이런 부르주아적인 영웅의 대표자가 나폴레옹이다. 헤겔은 ‘이성의 간지’라는 개념으로 이 영웅의 비극을 묘사했다.

영웅은 그저 자기 이익을 쫓지만 우연하게도 이 자기 이익이 역사의 이성적 목적과 부합하면서 그는 역사의 영웅이 된다. 시대가 지나가 역사의 이성적 목적이 변화하면 이것은 영웅의 자기 이익과 충돌되며, 결국 그는 몰락하고 만다.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말이다. 어쩌면 영웅이 이성적 목적을 선택했다기보다, 이성적 목적이 거꾸로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영웅을 선택했다가 다시 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성의 간지’이다.

4) 주체의 역사 

이와 같은 역사적 흐름을 보면 역사의 주체인 노예, 예속농, 부르주아 사이에 어떤 발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무자각적인 노예에서 자기 이익을 자각한 부르주아까지, 역사의 주체 속에서 자기인식이 심화한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에서 주체의 역할에 관해서도 발전이 있다. 노예 반란은 역사에서 거의 무의미했다. 예속농의 농민반란은 때로 중세 사회를 흔들기도 했지만 사회 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노예와 예속농은 그저 그 사회를 흔드는 지진을 일으켰을 뿐, 역사의 주역이 되지는 못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부르주아는 이제 역사의 주역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스스로가 아니라 역사적 영웅의 지도, 지배 아래서 활약했을 뿐이다.

이런 역사를 보면 역사에서 자기인식의 심화에 따라 주체의 역할이나 지위도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발전과 더불어 여기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했지만 사회구성체에서 객관적 측면도 변화했다.

노예제에서 자본제에 이르기까지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적 수준의 상호 연관 방식이 변화했다. 또한 역사적 사회의 규모도 달라졌다. 고대 민족과 중세 민족, 근대 민족은 차원을 달리 한다. 고대 민족이 혈연적이라면, 중세 민족은 지역적이고, 근대 민족은 경제적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주체가 역사 과정 속에서 변화한다는 것, 주체가 변화하면서 역사도 변화한다는 것, 이것이 역사 발전의 고유성이다.

5) 영화와 변증법

이제 앞에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설명한 내용을 변증법이라는 논리를 통해 파악해 보자. 앞에서 설명한 변증법을 상기해 보자. 자연의 보편적 순환과 누적적 계단 끝에 생물이 출현했다.

단순히 인과적으로 작동하는 물체에서는 보이지 않던 합목적적 행동(욕망 추구, 자기 보존 등)이 생명에서 나타난다. 아직 이런 목적론적 활동은 외적으로 조절되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유도탄 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보자. 생물의 계단 그 끝에 인간이 출현한다. 그 출현 과정 역시 보편적 순환과 누적적 계단이라는 과정이 매개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의식을 가진 인간은 다른 생물에게서 보이지 않던 운동을 시작한다.

6) 영화와 역사

인간 사회의 운동은 스스로 조절하는, 즉 자유로운 목적활동이며, 여기서 조절하는 중심으로서 역사의 주체(노예, 예농, 부르주아 등)가 출현한다. 이 역사의 주체가 벌여나가는 운동이 역사이다. 이를 역사의 변증법이라 한다.

이런 역사 속에서 주체 자신의 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주체 자신의 자기인식의 수준도, 주체의 자유의 능력도 변화한다. 역사의 객관적 변화는 주체 자신의 주관적 변화를 매개해서 전개되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변증법은 마치 영화와 같다. 여기서 영화를 생각해 보자. 영화 예술의 특징은 카메라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연극의 경우 카메라가 객석에 고정되어 있다. 영화의 경우 카메라는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빨리 지나가기도 하고 느리게 지나가기도 한다. 흔들리기도 하고 안정되기도 한다.

그 결과 영화 스크린에 비치는 세상은 전혀 달라진다. 영화는 몽환적인 세계를 그리기도 하고 심지어 불안해지기도 한다. 카메라를 따라 관찰자 자신이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이런 영화 예술의 특징을 기억한다면 저게 바로 인간 역사의 운동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도 그렇게 역사의 주체 자신이 변화하므로, 각 시대에는 사물을 판단하는 모든 척도가 달라진다. 시공간적 느낌도 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도 달라진다.

스스로 변화하면서 세계를 변화하는 주체의 운동, 이것을 철학적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부정의 부정이라는 운동이며, 이 운동이 헤겔이 대논리학 3권에서 설명했던 주관 변증법이다.

7) 주체사관과 마르크스주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미안하지만 바로 이것이 사람중심의 역사관이다. 이 말은 사람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것이 역사라는 의미 이상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주체의 자기인식도 심화 발전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것에 따라서 주체의 역할도 역사에서 단계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아마 인간이 현실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그야말로 자유롭게 자신을 실현하자면, 사회주의적 단계로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런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자기인식이 더욱 심화해야 한다. 이런 자기인식이 있어야만 스스로 단결할 수 있다. 이런 단결된 힘은 스스로 역사의 주역이 되도록 한다.

이런 주체사관이 마르크스의 사관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과거로 올라갈수록 결정론적이었다. 인간은 운명에 지배되었다. 하지만 현재로 내려올수록 인간이 역사를 능동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결정론을 제시했지만 주체의 자기 혁명을 간과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주체사관 역시 역사에서 주체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사회경제적 조건이 가하는 한계를 잊지 않는다. 오직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만이 마르크스의 결정론에 매달리고, 주체사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만이 의지만능주의를 강조한다.

이제 변증법 설명을 마치고, 인간론으로 넘어갈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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