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49)

1) 마르크스의 역사법칙론

지금까지 우리는 변증법을 설명해 왔다. 모순 개념, 보편적 순환 개념, 그리고 발전 개념이다. 이제 변증법을 이해하는 마지막 순간에 왔다. 지금부터는 역사의 변증법을 설명하기로 하자.

우선 논의의 출발점으로 마르크스의 역사법칙을 생각해 보자. 그의 생각은 간단히 두 가지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의 주장은 경제결정론이다. 역사 속에 정치투쟁이 벌어진다. 그 정치투쟁을 결정하는 것은 생산수단을 둘러싼 계급의 대립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다른 하나는 소위 5단계설이다. 이 가운데 원시공동체, 사회주의는 가설적 수준이니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 3단계로 역사는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심지어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중국과 유럽조차도) 거의 유사한 시기(1~200년 차이를 두고)에 동일한 단계로 변화해 왔다.

역사의 발전에 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실제 역사를 파악하는 데서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거의 모든 역사서는 오늘날까지 이런 마르크스의 주장을 고려하여 서술된다. 그만큼 그의 주장은 경험적인 사실을 통해 입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경제결정론 비판

이미 말했듯이 이런 마르크스의 역사법칙론은 경험적 사실을 통해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도 거시적인 이론이기에 여러 허점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제기된 몇 가지 허점을 여기서 검토해보고자 한다.

우선 경제결정론에 관해 비판이 이루어졌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역사적 투쟁을 보면 거의 대부분 생산수단을 둘러싸고 투쟁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은 토지를 둘러싼 투쟁이었고, 1848년 2월 혁명은 금유자본과 산업자본이 자기의 자본을 증식하려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과연 고대나 중세에도 생산수단을 둘러싼 계급투쟁이 벌어졌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왜냐하면 당시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이런 계급투쟁을 찾아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대에서 투쟁은 주로 부족 간의 투쟁이었다. 어떤 부족과는 연합해 민족국가를 세우고 다른 부족을 노예로 복종시켰다. 고대의 투쟁이란 거의 대부분 이런 부족, 민족 간의 투쟁이었다. 전사들은 자기 민족, 부족의 사활을 걸고(부족, 민족 관념) 투쟁했다.

고대에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아주 간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 평민과 귀족, 귀족의 파벌이 대립하기는 했지만 그건 당시의 계급투쟁, 즉 노예와 귀족의 투쟁과는 무관한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었다.

또 중세를 보자. 봉건제 시대, 거대한 농민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고대보다는 확실히 계급투쟁이 노골화되었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농민의 의식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투쟁은 토지라는 생산수단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종교적인 투쟁(서양에서)이거나 반귀족 근왕 투쟁(동아시아)에 가까웠다.

3) 중층 결정론

이런 역사적 사실을 두고 볼 때 과연 근대와 달리 고대나 중세에까지 계급투쟁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 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일찍부터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등장했다.

루카치, 그람시, 알뛰쎄 등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는 서로 관점을 달리했지만 대체로 묶어서 본다면, 이중적인 방식의 결정론(혹은 중층 결정론)을 택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또는 ‘상대적 자율성’이라 하기도 한다. 즉 전체적으로 보면 경제적으로 결정되지만 직접적으로는 종교나 민족 관념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중적 결정론은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의식의 배후에 무의식이 지배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직접적으로는 민족이나 종교 관념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생산수단을 둘러싼 투쟁으로 귀착하는 것이라 생각해 보면 이런 주장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진 : 구글검색

4)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마르크스의 3단계설에 관해서도 여러 비판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소위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다. 마르크스는 초기에(1846년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이런 개념을 끌어들여, 이집트나 페르시아 같은 전제군주 사회를 설명하려 시도했다. 그는 이런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고대 노예제(그리스, 로마) 앞에 설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같은 책에서) 이를 집어던지고 흔히 알려진 5단계로 역사를 설명했다.

이런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을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에 일단의 역사학자들이 끌어냈다. 그런 논자로 대표적으로 비트포겔을 들 수 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아시아 사회는 관료제가 일찍부터 발전했다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대체로 농업상 대규모 관개의 필요성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그 때문에 왕의 전제군주제가 확립되었고 전 인민이 노예화되었다는 주장이다. 잉여가 생산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니 당연히 사회는 정체되고 만다. 전 인민의 노예화, 사회의 정체론이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결론이다.

이런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은 일제시대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왜냐하면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은 식민지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론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체를 깨기 위해서는 외부의 충격, 즉 식민지 지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5) 정체론 비판

이런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다. 아무리 관료제가 확립되었다고 하더라도, 전 인민을 노예화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노예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군사적 물질적)이 필요하다. 고대 노예제 국가조차도 노예를 지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체로 주인1 대 노예3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그 이상은 지배 비용 때문에 힘들다는 말이다. 노예는 가혹한 착취로 수명이 길지 않으니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노예를 잡아오지 않으면 사회는 무너진다. 고대 노예제 국가는 로마처럼 거대한 세계 국가를 형성한 경우에도 그렇게 오래 갈 수는 없었다.

하물며 왕이 비록 관료를 이용하더라도, 모든 국민을 노예화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마르크스도 이미 초기에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은 포기하고 말았다.

설혹 아시아가 전 인민이 노예라 해도(이건 사실이 아니다), 그건 아주 고대의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아시아가 노예제라는 말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로마는 고대 노예제였다고 말했지만 그가 로마가 그 뒤에도 계속 노예제였다는 말이 아닌 것과 같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설명할 때 역사의 중요 계기만 횡단해서 설명했을 뿐이다. 그것은 헤겔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설명은 일종의 문명 이동설과 유사하게 이해하면 충분하다.

생산력은 끊임없이 서로 주고받으니 아무리 멀리 떨어진 나라도 생산력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기 마련이다. 정체론은 생산력의 영향을 완전히 무시한 발상이다.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의 실패 이후 5단계 사이에 다른 단계를 설정하거나, 단계를 뛰어넘거나 교차하려는 모든 시도를 중단하게 만들었다. 소위 구조주의자들에 의한 종속이론 또는 주변부 자본주의이론도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라는 단계는 상당히 논리적이기에 이행기에 여러 단계가 공존할 가능성은 인정하더라도(예를 들어 반봉건제 등) 그 사이 다른 단계를 설명하기 어렵게 되었다.

6) 연속혁명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은 찻잔의 풍파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단계론에 충격을 준 이론이 등장했다. 후진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에서 레닌은 역사의 발전 단계를 압축 내지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결코 도약, 우회는 아니다) 주장을 내세웠다. 소위 연속혁명이론이다.

그는 혁명가 또는 혁명 집단이 역사 속에서 능동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단계적 발전을 다만 대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며 이를 통해 경제적 발전을 압축,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레닌의 이런 연속혁명론은 중국과 한국 같은 19세기 말, 아직 자본주의화 하지 않은 이행기 반봉건 사회에서 사회주의 혁명에도 적용되었다. 마오의 ‘농촌에서 도시로’라는 테제, 항일 통일전선론은 모두 이런 레닌의 연속혁명론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마르크스 역사론에 관한 이론적 비판의 경과를 보면 대개 한 가지로 집중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 속에서 계급투쟁과 단계를 인정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관념의 역할을 충분히 인정하며 또한 인민대중의 의지를 통해 역사의 압축과 가속화가 가능하다. 이를 역사 속에서 사상의식의 적극성이라 볼 수 있으며, 주체철학의 역사관이 출발하는 점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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