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46)

1) 촛불의 비유

앞에서 엥겔스와 헤겔이 변증법의 법칙을 어떻게 제시했는가 보았다. 그 가운데 우리는 세 가지 논점만 다루겠다고 했다. 우선 모순의 개념이다. 여기서 모순은 ‘대립의 통일’이라는 개념이다. 물론 논리학에서 모순 명제라 할 때 의미와 다른 의미이다.

이 모순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헤라클레이토스로까지 올라가야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한다”는 사상과 “세계의 원초는 불이다”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철학개론 시간에 배운 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불은 하나의 비유이다. 촛불을 보자.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상승하는 힘과 하강하는 힘이 서로 맞서 있다. 그런 가운데 균형을 이루면서 촛불의 고유한 형상을 만들어낸다. 만물도 이런 촛불처럼 생성하고 소멸하는 두 힘이 맞서서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나오는 것이 아닐까?

흔히 동양철학에서는 태극의 문양이 자연을 이해하는 비유로 자주 쓰인다. 태극은 음과 양의 파동, 즉 서로 맞서서 규형을 이룬 모습이다. 여기서 음이니 양이니 하는 것은 어떤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기운, 즉 힘이다. 양을 상승하는 힘, 음을 하강하는 힘으로 본다면 태극이 곧 불을 비유한 것이다. 

2) 생명체의 개념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촛불의 비유를 끌어들여 플라톤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했다. 알다시피 플라톤은 미리 존재하는 사물의 형상이 미리 존재하는 물질과 결합하여 사물이 나온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하기 위해서는 제3의 존재자, 즉 세계의 데미우르고스(Demiurgos : 창조자, 제작자)가 필요하다.

이런 플라톤의 세계관은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짓는 건축가가 세상을 보는 눈이다. 또는 나무로 형상을 깎아내는 목수의 눈이기도 하다. 건축가, 목수가 작은 물체의 데미우르고스라면 신은 자신의 섭리를 이 세상에 실현하는 우주적 데미우르고스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으로 생명체를 철학으로 끌어들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은 생물을 기르는 농부나 어부의 세계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의 비유를 다시 부활한다.

생명체란 여러 구성요소(예를 들어 기관 등)가 조직되어 하나의 개체를 형성한다. 구성 요소는 생명체를 부분으로 해체하는 하강의 힘을 가진다. 반면 어떤 개체는 개체로서 지속하려면 구성 요소를 하나로 통일하는 상승의 힘을 갖추어야 한다.

그 결과 한편으로 생명체는 구성 요소의 끊임없는 대체가 일어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신진대사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명체는 개체로서 자신의 통일성을 계속적으로 유지한다. 이 통일성을 곧 생명체의 자기 동일성, 이른바 아이덴티티(identity. 개체성)이다. 구체적으로 생명체의 자기 보존, 자기 재생산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을 이런 생명체를 모델로 해석한다. 자연적 물체도 이미 하나의 생명체다. 생명체들은 자신의 아이덴티티(개체성)을 얼마나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가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구별된다. 물체는 이런 아이덴티티가 약하다. 쉽게 말해 오래가지 못해 해체되고 만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를 통해 수백 년에 걸쳐 영속적인 아이덴티티를 유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일원론적인 방식으로, 즉 물질로부터 형상이 출현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유물론이 시작된 것은 원자론자에서부터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물론이 가로막힌 벽을 무너뜨려 유물론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참고 : 철학적으로 여기서 보편에 대립하는 개별자와 시간 속에서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개체성은 다른 것이다. 개별자에 대립하는 보편을 추상적 보편성이라 하고,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아이덴티티를 구체적 보편성이라 한다. 양자를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여러 철학적인 혼란이 발생해 왔다.)

3) 모순의 세계 

이런 촛불의 비유는 근대과학의 기본적인 가정이 된다. 중세 자연철학(자연목적론)은 형상과 물질, 데미우르고스라는 틀로 자연을 이해하려 했다. 플라톤적 세계이다. 중세에 이는 기독교적 신 개념과 결합하여 신의 우주 창조론이 된다.

반면 근대 자연과학(기계론적 자연관)이 출현하면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을 힘을 통해서 설명하려는 방식이다. 자연과학은 초기에는 단순한 인과적 관계(힘과 그 결과)로 기계적으로 설명해 왔다. 이게 초기 역학의 수준이다.

점차 자연과학이 발전하면서 자연 속의 인과관계는 더욱 복잡해 졌다. 여러 가지 인과가 동시에 작용하는 복합적인 인과관계가 출현했다. 마침내 순환적인 상호 인과관계라는 개념이 출현한다. 즉 A가 B의 원인이고, B가 A의 원인인 관계이다. 이런 상호 인과 작용의 관계는 결국 두 가지 대립된 힘이 상호 균형을 이루는 관계로 이해된다.

자연과학의 이런 발전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생명 모델, 촛불의 비유가 부활한 것이다. 역학을 넘어서 화학의 발전, 열역학의 등장, 생물의 진화론, 전자기학 등이 출현하면서 이런 촛불의 비유가 자연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모델이 되었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초기 기계론적 자연과학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화학, 열역학 등으로 발전하는 자연과학을 옹호해왔다. 그 결과 세계는 모순, 즉 대립물의 통일로 이루어졌다는 철학적인 세계관이 출현한 것이다.

4) 우연 속의 필연 

이제 촛불의 비유로 본 세계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 세계는 두 차원에서 볼 수 있다. 겉보기의 모습, 또는 거시적인 모습이 그 하나요, 속 모습과 미시적인 모습이 또 하나이다.

거시적으로 전체를 보자면, 촛불은 고요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불변성이 로고스(logos)이며 필연적인 법칙이다. 그러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는 끊임없이 상승하고 하강하는 변화가 이루어진다. 즉 하나의 소용돌이이다. 이 세계는 우연과 맹목적인 충돌로 이루어져 있다.

생성과 소멸, 불변과 가변, 고요함과 소용돌이, 필연과 우연이 겉과 속의 모습으로, 즉 이중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세계의 운동하는 모습이다.

예를 들자면 열역학의 세계를 보자. 열 분자의 움직임은 계산할 도리가 없다. 개별적인 열 분자는 우연적으로 충돌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열과 압력 사이에 일정한 법칙이 성립한다. 그것이 열역학의 법칙이다.

또 진화론의 세계를 보자. 종이 생존경쟁을 하는 것은 우연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자연에 적합한 것만이 살아남는다. 미시적으로는 생존경쟁이, 거시적으로는 환경적응의 법칙이 성립한다.

마르크스의 모순론이란 세계의 복합적 인과, 순환적 인과 관계를 정당화는 세계관이다. 또는 생명의 운동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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