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6월, 민주노총 통일위원회가 6·15공동선언 20주년을 기념하는 ’노동자공동행동’을 벌였다. 이 사업에서 일반 조합원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6·15공동선언을 지지하는 ‘손팻말 인증샷’이 있었다. 여기에 호응하여 필자가 몸담은 노동조합에서 조합원 인증샷을 취합했고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손팻말 인증샷의 내용은 ‘미국은 남북관계 간섭 말고 대북제재 해제하라’, ‘한반도 긴장 조성하는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 ‘우리 민족 번영의 길 남북공동선언 이행’, ‘70년 전쟁 끝내고 평화협정 체결하자’였다.

노동조합이 조합원 인증샷을 게시하자 게시글 아래로 많은 댓글이 달렸다. “노조의 목적이 뭔지부터 되돌아봐라”, “노조는 언제까지 민노총 꼭두각시가 되어서 조합원들 내동댕이치고 정치질이나 할래?”, “이런 건 퇴근 후 각자 시민단체나 정당에 들어가서 하세요”, “우리 일만 신경 쓰면 안 될까요? 앞으로 우리 노조가 어떻게 나가야 할지 걱정 안 되십니까?”, “한민족 잘살자는 거 청와대랑 통일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자유게시판도 아니고 조합원 확인 후 실명으로 가입해야 하는 게시판에서 수십 건의 댓글 중에 이런 비난 글이 압도적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2020년 815 노동자대회
▲ 2020년 815 노동자대회

물론 모든 노동조합이 이렇지는 않고, 모든 조합원이 이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랬으면 어떻게 노동자 통일운동이 이어지고, 진보정당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필자가 몸담은 노동조합이 대규모 공기업노조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노동조합이라 할 것 없이 이런 경향이 점점 더 짙어지는 추세라서 가슴이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노동현장에서는 노동조합과 활동가들의 정치활동, 통일운동, 연대사업에 대해 부정적, 배타적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사실 이런 활동들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활동가가 아닌 일반 조합원도 수십 년 동안 했던 활동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임금, 복지, 노동조건의 향상을 위한 활동이 아니면 노동조합이 본연의 역할을 하지 않고 ‘딴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실리주의 경향도 널리 퍼져있다. 

이런 경향들은 눈앞의 이익만 보고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이익을 보지 못하는 대표적인 소탐대실이다. 정부가 “성과급을 많이 줄 테니 정부에서 추진하는 성과연봉제나 직무급제를 받아들이라.”라고 해서, 그리고 조합원들이 그것을 바란다고 해서 노동조합이 투쟁을 접고 정부안대로 합의한다면 조합원에게 이익일까. 임금이나 복지, 노동조건의 향상도 중요하지만 노동자의 근본적이며 더 큰 이익은 다른 데에 있다. 

노동자의 경제적 이익만 놓고 보자면 임금인상은 물가상승으로 곧 그 효과가 상쇄되고, 복지향상과 노동조건 개선은 사업장 내에 머물고 있다. 노동자의 급여통장은 단지 급여가 스쳐 지나가는 곳으로 임금이 입금되자마자 각종 지출로 빠져나가고 만다. 우리 사회는 노동자의 삶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지 못함으로써 오로지 임금만으로 노동자가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임금 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노동자가 임금인상을 절박하게 요구할 수밖에 없지만 수입을 늘리기 위한 모든 시도는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만다.

노동자의 지갑을 살찌게 하는 것은 수입을 늘리는 것과 함께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 가계지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거비, 교육비는 물론이고 의료비, 보험료, 교통비, 통신비, 각종 세금 등 기본 비용을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놀고먹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수입이 없어도 의식주는 기본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노동조합이 단체협상을 통해, 예를 들어 ‘자녀학자금 지원’ 등 사업장 내부 요구가 아닌 생활적 요구를 걸고 투쟁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사업장 노동조합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노동자 사이의 연대, 노동자와 민중의 연대를 기초로 한 사회정치적 투쟁이 요구된다. 사회적 요구는 사회적 투쟁 없이 쟁취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연대와 투쟁을 정치적으로 이끌어 갈 진보정당이 필요하다.

노동자는 경제적 이익만 충족하면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인간답게 살기를 바란다.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왜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조합이 강해지기를 바랄까?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 노동조합이 없던 시기에 현대계열사 노동자는 두발 단속을 당해야 했고 관리자들의 일상적 폭력을 감내해야 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땅콩 회항’ 등 직장 갑질과 성희롱, 인격 모독이 그치지 않고 직장 내 민주화는 갈 길이 멀다. 

노동자는 사업장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구속과 탄압에 저항한다. 일하는 보람을 빼앗아가고, 자신의 발전과 향상을 막으며, 자주성을 구속하고, 인간적 자존심을 짓밟는 사용자 측의 행위에 저항하며 극복하기를 바란다. 또한, 자신의 노동과 사업장 내 모든 환경을 자기 뜻에 맞게 주도적으로 바꿔 나가려 한다. 개인으로서는 해결방법이 없는 이 요구를 노동자는 노동조합 결성과 강화를 통해 해결한다. 이렇듯 노동자가 노동조합으로 모이는 이유가 경제적 이익의 측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이든 사회정치적이든 이런 노동자의 요구와 이익은 노동과정을 포함한 모든 생활영역에서 발현된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대체로 사업장 담벼락 안에서 이루어지고 생산과정에 개입하는 정도로 제한된다. 하지만 노동자의 요구와 이익은 그런 경계가 없다. 그것은 사업장 내 생산과정도 사업주의 권한도 넘어선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요구와 이익을 온전히 실현하자면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의 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요구와 이익을 실현하듯이 진보정당으로 결집한 노동자의 사회정치적 투쟁을 통해 사회를 노동자의 뜻에 맞게 바꿔나가야 한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은 필연이다.

이제 위 댓글의 충고대로 노동조합의 목적이 무엇인지 되돌아보자. 노동조합의 목적은 각 노동조합의 규약에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일률적이지는 않기에 대표적으로 민주노총의 규약을 참고하면, “민주노총은 노동자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지위 향상과 전체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 보장되는 통일조국, 민주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규약은 25년 전 민주노총 건설 시기 노동자의 염원을 반영했고 최근(2019년)까지 개정작업을 거쳤다. 그리고 수많은 민주노총 소속 단위 노동조합에서 이 규약을 기준으로 자체 규약을 제정하고 있다.

이제 되물어보자. 노동조합에서 6·15공동선언을 기념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설립 목적에 어긋나는 활동인가? 사업장 내 활동가들의 정치활동이 노동조합 본연의 활동이 아니라 ‘딴짓하는 것’인가? 노동조합으로 단결한 조합원은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조합원을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존재로 바라보면서, 조합원의 더 크고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요구와 이익을 외면하고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을 충족하는 투쟁으로만 노동조합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야말로 ‘딴짓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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