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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 행렬을 헤치고 나가던 국군 3사단 독립기갑연대가 1950년 7월27일 영덕 지품면 황장리 황장재에서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포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609~610쪽). 하지만 국군을 공격한 자들이 누구였는지 분명하지 않았고 이에 대응하여 국군이 공격한 자들 역시 누구였는지 알 수 없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전투가 피란민들의 행렬 속에서 벌어졌다는 객관적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피란하던 민간인들로서는 피해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품면 황장리는 전쟁이 나기 전인 194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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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2.2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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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산 토벌 작전을 마친 해군육전대가 1950년 7월 20일 영덕 달산면 옥산리를 공격하여 1개 소대를 물리치고 인민위원장과 여성동맹위원장을 납치했다고 한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848쪽) 비록 부역 활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인민위원장과 여성동맹위원장은 민간인이었음은 분명했다. 게다가 시기로 보아 당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이는 거짓 조작된 억지 주장임이 명백했다. 인민위원장 등을 생포했다?1950년 7월 말 동해바다는 미 해군이 장악했지만 지상의 전투는 여전히 인민군에게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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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2.1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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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을 학살한 군대가 이 범죄를 적군에게 덮어씌운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영동에서 있었다. 영동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26일부터 29일까지 영동읍 주곡리, 임계리 등에 살던 주민들이 미군에 의해 소개당하는 과정에서 미 전투기의 폭격과 미 1기갑사단 7기갑연대 2대대의 공격으로 경부선 철로와 노근리 쌍굴다리 아래에서 집단희생 당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4백 명 넘는 피란민들이 미군의 조준 사격으로 사망했다.1997년 생존자와 유족들이 미국에 피해 배상을 신청하자 미군은 한국 검찰에 당시 미 1기병사단 소속 군인들이 노근리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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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2.13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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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21일 소속을 알 수 없는 인민군 200여 명이 국군 6사단 7연대 지휘소가 있던 문경 농암면 농암리까지 왔다가 대전차포 중대에 의해 전멸당했다고 한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679~680쪽) 국방부는 지리에 어두운 인민군들이 계곡으로 몰려서 몰살당한 것이었다면서 이를 “의외의 사태”라고 했는데, 포위될 위험에 놓였던 국군으로서 할 수 있는 표현은 아니었다.후에 국방부는 이들이 인민군 15사단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지난 7월 17일부터 화령장 전투를 치르던 부대였다는 것인데, 상주에 있어야할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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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2.0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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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7일 1차 40여 대 우마차 공격, 7월19일 2차 10여 대 우마차 공격에 이어 7월21일에도 공격은 계속되었다. 우연이었는지 이번에도 짙은 안개로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부대”가 “발자국 소리와 수레 구르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국군은 저들이 인민군인지 아군인지 피란민인지도 모르면서 공격을 해야 하는 상황에 또다시 직면했다.국군 17연대 2대대(대대장 송호림 소령)는 역시 “등에 배낭을 메고 있다는 점”, “손수레가 집단 사이사이에 끼어 있다는 점”만으로 인민군으로 판단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육안으로 확인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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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1.2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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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의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을 화령장 전투는 7월 17일에 이어 19일에도 계속되었다. 지난 공격이 국군 17연대 1대대가 화서면 상곡리 도로에서 있었던 데 비해 이번 공격은 같은 연대 2대대가 여기에 북쪽으로 인접한 화남면 동관리 도로에서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공격당한 사람들은 보급과 관련된 한 무리였다고 했지만 이전과 달리 이번 사망자 중에는 민간인이 포함되어 있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인민군 48연대에 이어 49연대를 노리다1950년 7월 18일 국군 17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미 군사고문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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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1.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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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전투 중 이번에 다루는 것은 충주 동락리 전투에 이어 이승만의 명령에 의해 국군 17연대 1개 연대 전원이 1계급 특진했다는 화령장 전투 중 첫날 벌어진 사건이다.『한국전쟁사』는 7월 17일 40여 대의 우마차와 함께 나타난 인민군이 상주 화서면 상곡리 계곡에서 휴식에 들어가자 국군 17연대 1대대가 이들을 공격하여 250여 명을 사살했다고 밝혔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425~454쪽). 그런데 인민군 측은 공격을 당하는 동안에 “한 발의 저항도 못”했다. 차량도 아닌 우마차를 끌고 나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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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1.1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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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여 명의 게릴라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해군육전대가 포항 죽장면 일대에서 전쟁 초기인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토벌작전을 벌이던 중 1950년 7월 17일 합덕리, 정자리 등을 공격했다고 한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847~848쪽) 국방부는 국군이 공격한 사람들이 게릴라였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이 남쪽 사람들인지 북쪽 사람들인지 밝히지 않았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이들의 무장 수준은 칼과 도끼 정도였다. 과연 이들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게릴라였다고 할 수 있을까? 토벌작전을 벌인 해군 육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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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1.1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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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경비사령부 해군 육전대는 1950년 7월 13일 영천 북안면 도유리에 있는 인민군 유격대를 공격하여 8명을 사살하고 3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847쪽) 도유리에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하던 날이 7월 10일이었으며, 전쟁 중 인민군이 영천 읍내에 진입하여 벌어진 전투는 1950년 9월 4일부터 13일사이가 전부였다. 더군다나 이 전투가 벌어졌다는 북안면은 영천 남부지역으로 한국전쟁 동안 인민군이 진입하지 못한 곳이었다. 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졌음에도 전쟁 초기부터 이런 곳에 인민유격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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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0.3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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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군 장항읍에 포진했던 군산경찰서가 1950년 7월 17일 아침 10시 읍으로 진입하는 인민군 선발부대로 보이는 200명을 기습하여 20명을 사살하고 3명을 사로잡은 뒤 오후 3시 이리 부근으로 후퇴했다고 한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944쪽) 경찰의 피해는 설명이 없었다.그런데 하늘이 준 방어선인 금강 하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군산경찰서가 무슨 이유로 해군, 해병대와 함께 방어가 불가능한 장항까지 들어갔는지, 들어가서 한 일은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한국전쟁사』는 이들 일행이 장항에 들어가기 직전 보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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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0.25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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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기록만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 사건이 논산 강경에서 벌어졌다. 인민군의 진입을 앞두고 1950년 7월17일 인민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강경을 탈출하던 30여 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사로잡혔다. 사망자 중에는 경찰서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경찰이 탈출 시기를 놓친 원인이 국군으로 위장한 인민군 때문이었고 사망한 경찰관의 수도 83명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인민군이 강경에 도착했는지 분명하지 않았으므로 이 전투에서 강경경찰서가 말한 “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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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0.20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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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남일면 쌍수리에 주둔하던 수도사단(사단장 김석원 준장) 18연대(연대장 임충식 대령)는 인민군(2사단)과 전투하던 중국군의 진지 내에 피란하던 민간인들이 있어 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국군은 피란민들이 자신들의 소개 명령에 따르지 않아서 생긴 피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국군이 진지를 이동하려던 태봉에는 피란민들이 먼저 모여 있었고 이들에게 피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는지는 의문이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311~312쪽).『한국전쟁사』는 국군이 어쩌다가 민간인들이 피란하던 곳까지 진지를 옮기게 되었는지, 피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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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0.1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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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는 미 24사단 34연대에 배속된 국군 독립기갑연대 기갑6중대(중대장 박익균 중위) 2개 소대 100여 명이 7월 11일 아침 7시 공주를 출발하여 예산을 향하던 중 정오 충남 공주시 유구읍 석남리 유구초등학교에서 인민군 환영대회를 열고 있던 2개 중대 규모 300여 명의 인민군을 1시간 동안 공격하여 60여 명을 살해했다고 했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104~105쪽)문제는 소대장 조돈철 소위의 일방적인 증언이 유일한 근거였다는 점에 있었지만 전사편찬연구자들은 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게다가 인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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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10.04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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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을 방어하다 뜬금없이 대구까지 열차로 내려갔다온 국군 8사단 산하 10연대 1대대(대대장 박치옥 소령)가 1950년 7월 8일 단양 매포에서 학교 운동장에 주둔했던 인민군 전방지휘소를 기습 공격했다고 한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163~167쪽) 마을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으므로 민간인들의 피해가 짐작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없다. 같은 시기에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집단 희생되기도 했으므로 인민군이 도착하기 전에 발생했다면 국민보도연맹 사건일 가능성도 검토해야 한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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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09.2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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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신니면 문락리 동락마을의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 전투에 이어 음성읍 소여리 유현고개를 지나던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 소속의 1개 소대가 1950년 7월 5일 아침 8시 고개를 넘는 “자동차를 탄 군인과 수명의 사복한 사람”과 그 뒤로 따르는 1개 중대 규모의 병력을 공격했다고 한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240쪽) 거의 같은 시기에 전투가 벌어진 두 지역은 직선거리로 약 7km 떨어져 있었다.국군이 이들을 인민군으로 판단한 이유는 단지 “배낭을 메고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행 중 일부가 민간인이었음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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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09.1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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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연대 1계급 특진으로 유명한 충주 동락마을 전투에서도 인민군과 전투한 것이 사실인지 의심 간다. 공교롭게 이번에도 6사단이 관련되었다. 홍천 복골이 2연대, 이천 곤지암리가 19연대였다면 이번 충주 동락마을은 7연대였다.장호원에서 내려오는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이동하던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는 7월 4일 동락리(신니면 문락리 동락마을)를 지나던 중 갑자기 인민군 정찰대를 만나 전투를 벌였다. 『한국전쟁사』는 이날의 전투에 대해 “너무 갑작스런 일이어서 본대에 연락할 사이도 없이 즉각 사격 명령을 하달하고 그들에게 집중사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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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09.0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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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6사단의 예비연대였던 19연대의 3대대 10중대가 1950년 7월 2일 이천 곤지암리 사거리에서 휴식을 취하던 100여 명 규모의 인민군 보급부대를 공격했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1권, 305쪽, 중대장 김두일 대위 증언) 공격을 당한 부대에 민간인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피란민 대열일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당시는 이천 지역에서도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이기도 했다. 경비병 없이 휴식하는 인민군 보급부대를 발견하다이 공격은 국군 6사단이 이천으로 후퇴할 때 벌어졌다. 인민군 12사단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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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08.2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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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에서도 앞의 파주 봉암리 경우처럼 이미 주력부대가 지나간 뒤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어떤 집단이 국군에게 공격당하는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전쟁사』에는 “예기치 않았던 기습에 허를 찔린 무리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눈을 비비며 우왕좌왕하다가 대부분의 적은 총검의 제물이 되니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라고 했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1권, 264~266쪽) 그런데 이 전투가 벌어진 시간이 아침 8시 45분이었으니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았다.전투를 치른 국군은 6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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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08.2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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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들이 공격당한 것으로 의심되는 전투가 가장 먼저 벌어진 곳은 파주 봉암리였다. 『한국전쟁사』는 신원을 알 수 없는 50여 명의 무리가 새벽녘 “경계의 빛도 없이 이북의 방언을 마구 쓰면서 도로변에 나오자” 이들을 적으로 직감한 28명의 국군 1사단 특공대가 집중 사격을 가해 전멸시켰다고 적었다.(제1권, 441~442쪽) 사람을 알아 볼 수 없는 어두운 새벽녘이었으므로 이들을 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이북의 방언”이었다고 했다. 당시 국군이 매복하고 있던 도로는 지금의 통일로였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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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08.1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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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괴선박을 공격하다_1950년 6월 25일 대한해협한국전쟁사에 있어 최초의 승전이 바다에서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전투는 다음 날 새벽 1시 대한민국 해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고. 장소는 대한해협 “공해”상이었고 아군은 해군 최초의 공격용 “전투함”인 백두산호 701함, 적군은 600명의 인민군이 탄 “증기수송선”이었다.(출처,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1권, 774~782쪽) 그런데 공해상 전투의 선제 공격자는 대한민국 해군이었으며, 승전했음에도 수색의 결과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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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19.08.09 1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