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사회 성격’ 탐구] (5)

[본문요지] 한국사회는 1980년대 초 재벌체제의 성립으로 신식국독자 초기형태가 완성되게 되었으며, 이후 사적 독점자본의 지속적 발전, 노동자계급의 성장, 국제적 개방화 압력에 의하여 그 전환의 필연성을 맞게 된다. 1980년대 전반 정부주도의 일련의 경제개혁과 1987년 7-8월 노동자 대파업 등 두 차례 선진국독자로의 전환의 기회가 존재하였지만, 그러나 신식국독자 자체 내적 요인들의 방해로 인해 결국 그 상승 발전은 실패하고 만다. 

3. 전기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의 전환

1) 신식국독자 초기형태의 성립과 그 전환의 필연성

한국에서 언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가 성립되었는지에 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국가독점과 사적독점의 밀접한 결합으로 생겨난다. 때문에 국가독점자본주의에 있어 이 두 가지 요소의 존재는 그 성립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국독자 성립의 이 같은 보편적 요구를 적용할 경우, 서구의 선진국독자이든 한국의 신식국독자이든 국가독점과 사적독점이 모두 존재해야 한다는 기본조건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그런데 이들 두 가지 독점 형식이 성립되는 순서에 있어서 보면 선진국독자와 신식국독자는 차이가 있다. 선진국독자가 사적독점이 먼저 보편화된 후 그 기초위에서 국가독점이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면, 한국의 신식국독자는 그 반대로 국가독점의 형성으로부터 사적독점이 형성(보편화)되는 경로를 겪었다. 때문에 설령 1960년대 초기에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이 시작되었다손 치더라도, 이 시기를 곧바로 신식국독자가 성립한 시기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시기엔 국가독점이 형성되었더라도 사적독점은 아직 미진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어 이 양자가 모두 갖추어진 시기는 1980년대 전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가 되면 재벌이 국가를 대신해서 한국경제를 주도하는 '재벌체제'가 초기적으로 성립된다(재벌체제의 성립과 관련해서는 이후 본 연재 2부에서 정식으로 다룰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재벌은 사적독점의 한국적 특수 형식이다. 물론 한국에서 재벌이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러나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재벌의 시장지배 원천은 주요하게는 제도적 진입장벽이었지 기술적 요인은 아니었다.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중점사업으로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본격 실시된 후, 1980년대에 들어서서야 기술적 우위성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 독점이윤의 확보가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1) 

따라서 이 시기가 되어서야 한국에는 국가독점과 사적독점이 모두 형성되어 신식국독자 초기형태의 출현을 위한 조건이 갖추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식국독자의 성립시기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학계에서는 조금 다른 형태의 논의가 있다. 즉 한국경제에 있어 언제부터 '국가동원체제'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 역시 우리의 논의에 참고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잠시 소개키로 한다. 이에 따르면 '수출주도형 경제'가 나타난 1960년대 중반을 중요한 시기로 지목한다. 즉,

"……우리는 1965년경에 주목한다. 1965년경은 한국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국가동원체제'의 한 요소로 수출드라이브가 자리 잡은 시점이다. 제1차 5개년 계획에서 수출은 그리 큰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으며 수출이 급증한 것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수출이 기존 경제계획에 되먹여지면서 다른 제도들도 자리를 잡아갔다. 예컨대 수출 실적이라는 명확한 수치는 투자의 사후 검증에 확실한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또 1965년 금리자유화가 이후 실패하고 경제위기가 닥치자 신용통제로 돌아서면서 신용할당제의 효과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계기를 제공한 시기이기도 하다. 1945년 이후 해방공간에서 1965년경까지는 국가형성기로 설정하고, 1965년부터 1972년경까지는 국가동원체제의 기본틀이 마련되는 시기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2)

필자는 이 같은 국가동원체제의 성립시기에 관한 논의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국가독점'이 성립하는 시기로 볼 수 있으며, 만약 이 시기의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국가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신식국독자는 아니다. 때문에 이것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바로 국가자본주의 (즉 국가동원체제)를 통해 아직 미약한 사적독점을 육성하는데 있다. 즉 이 같은 국가동원체제가 수립됨으로써 비로소 한국에서는 신식국독자가 준비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식국독자는 선진국독자와는 달리 사적독점이 먼저 형성된 후 그 기초위에서 국가독점이 발전한 것이 아니라, 국가독점의 형성으로부터 사적독점이 형성되는 반대의 경로를 겪었다.3) 때문에 신식국독자의 초기형태는 자연히 국가주도성을 특징으로 하며, 그 역사적 지위에 있어 보면 그것은 사적독점체계의 완성을 자기 사명으로 하는 과도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신식국독자가 이후 경제발전의 진전을 계속함에 따라 그 초기형태가 부정되고 필연적으로 새로운 형태로 전환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전환은 다음 세 가지 요인에 의해 초래하게 된다.

첫째, 사적 독점자본의 발전이다. 한국에서는 '재벌'이라고 불리는 사적 독점자본이 경제개발과 함께 점차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대체로 한국에서 '재벌체제'가 형성되는 시기는 1980년대 전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화학공업부문에 대한 본격적 투자가 이루어진 시기와 겹친다. 재벌은 그 성립 초기엔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을 통해 많은 혜택을 입었지만, 일단 성장을 이룬 후엔 국가의 규제와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본격화하였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부문에 대한 과잉투자로 말미암아 1980년대 들어서 정부 주도로 산업구조조정이 실시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부가 기업부실을 은행에 전가함에 따라 전반적인 은행부실화가 발생하였다. 한국정부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2금융권의 제도화와 직접금융시장의 육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기업자금의 조달통로를 확대시켜 주었다. 재벌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제2금융권에 적극 진출함으로써 단기 운전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생명보험사나 리스회사 등을 통해 장기설비자금까지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 중후반 '3저 호황'을 통해 강화된 재벌기업들의 내부 자금조달 능력 제고는 이후 재벌의 자율성을 한층 제고시켰다. 이상은 기존 신식국독자의 국가 중심의 신용할당체제를 크게 약화시키는 것으로써, 재벌이 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4)

둘째, 노동자계급의 성장이다. 이는 경제개발과 사적독점의 발전이 초래하게 되는 동전의 다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1960년대 초반 경제발전이 시작된 이래로 빠른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도시 임금노동자의 수는 1960년 130만 명에서 1970년에는 340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특히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가 본격화한 이후 그 성장세는 더욱 두드러져서 1980년대 중반에는 800만 명에 달하였다.5) 이처럼 양적으로 거대 계급으로 성장한 노동자계급은 개발독재체제 하의 군사적 통제와 초과착취를 언제까지 감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1960년대 유아적 형성기를 거쳐, 1970년대에는 초보적인 의식화와 조직화에 성공하였으며, 1980년대 들어서서는 더욱 비약적인 발전을 이룸으로써 마침내 1987년 7-8월 대파업투쟁을 낳았다. 이렇듯 이미 각성되고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기존 신식국독자의 개발독재체제로서는 통제하기가 힘든 세력이 되었다.
셋째, 국제적인 자유화와 개방화의 압력이다. 위의 두 가지 요인이 국내적인 것이었던 반면에 세 번째 요인은 외부요인으로서 한국사회의 종속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80년대 들어 미국의 전 세계에 대한 개방화 압력이 강화되었는데 한국경제 역시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대미 국제수지 흑자가 커짐에 따라 미국의 개방 압력은 매우 거세어졌으며, 미국은 한국을 일반특혜관세대상(GSP)에서 제외하는가 하면 이른바 슈퍼 301조라는 무역보복 수단을 동원하여 개방을 강제하였다.

이상 세 가지 요인들은 모두 신식국독자 자체 내적요인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며, 신식국독자의 발전에 따라 동반 발전하는 특성을 갖는다. 그리하여 그 발전이 일정 수준에 이르게 되면 이들 요인의 종합적인 작용에 의해 종래의 신식국독자를 구성하는 구조와 기제는 더 이상 효력을 상실하고 쓸모없게 되어 그 초기형태는 부정되게 된다. 

여기서 앞의 두 가지 요인은 국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신식국독자의 내적요인으로 분류하는 데는 별반 이의가 없으리라 보인다. 다만 국외적 요인인 셋째 요인(현대제국주의)까지를 내적요인으로 분류하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객관 실체로서의 한국사회의 국내외적 요인의 분류기준과, 이 같은 실체의 개념적 반영으로서의 신식국독자의 내적요인으로의 분류기준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한국사회라는 실체를 기준으로 그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기준임에 비해, 후자의 경우는 현대제국주의와 관련된 신식민지성이기 때문에 신식국독자 개념 안에 포함되는 것이 타당하다.6) 

한국의 신식국독자에 있어 자신의 초기형태를 전면 수정하는 계기는 1970년대 후반의 '과잉생산' 위기로부터 주어졌다. 비록 이 같은 과잉생산의 발단은 해외로부터 주어진 것이긴 하였지만, 그러나 해외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던 한국과 같은 신식국독자에 있어선 선진국독자보다 그 충격이 더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기업들의 무책임한 과잉투자 관행으로 인해 과잉설비 규모가 커져서 그 후유증 또한 컸다. 이는 국가가 신속한 경제개발을 위해 재벌들에 대해 거의 맹목에 가까운 지원을 수행하던 '국가-재벌 동원체제' 때문에 재벌들이 "경쟁과 이윤동기가 취약한 투자확대"7)를 관행적으로 수행해온 결과였다. 다음으로, 거액의 중화학공업관련 설비자금의 조달을 해외차입에 의존하고 있던 관계로 이에 대한 외채상환 압박은 국가를 거의 부도위기로까지 내몰았다. 결국 IMF 등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통화신용기구 등의 도움8)과, 또 새로 들어선 신 군부정권의 강제적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겨우 국가부도 위기와 심각한 경제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충격파는 '3저 호황'이 도래하기 전인 1980년대 중반까지 내내 지속되었다. 이 같은 충격으로 인해 기존 한국 신식국독자의 조절 기제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어 그 기능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9)
 
2) 선진국독자로 전환의 좌절

한국의 신식국독자는 1987년을 기점으로 그 초기형태를 마감하고 새로운 형태로 전환한다. 우리는 전자를 '전기 신식국독자'로 그리고 후자를 '후기 신식국독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1987년 이후의 한국사회가 여전히 '신식국독자'라고 하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선 다음 절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선 그에 앞서 한국의 신식국독자가 과연 선진국독자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전환이 최종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 신식국독자의 선진국독자로의 전환을 위한 계기는 일찍이 두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첫 번째는 1980년대 전반의 경제위기에 대한 수습과정에서 구조조정을 동반한 상층으로부터의 일련의 경제개혁이고, 두 번째 계기는 1987년 7-8월 노동자 대파업으로부터 촉발되어 이후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발발하기까지 지속되었던 노동운동의 상승 발전이다. 이들 각각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첫 번째 경우를 보면, 비록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긴 하였으나 제5공화국 신군부 정권은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1980년 초반부터 경제위기에 대한 적극 수습에 나섰다. 이들은 당시 최대의 경제 현안이었던 중화학공업분야의 과잉투자에 대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한편, 그동안 미비했던 중소기업 정책을 보완하는 등 나름의 국내 산업연관의 강화에 힘썼다. 예컨대 이들은 그간 경제개발과정에서 한국경제가 양적 성장에 치중했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성숙 및 성장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와 고부가가치화를 위한 제도적인 기반 정비를 실시하였다. 그와 함께 이들 산업의 생산기반을 내실화하기 위해 하청계열화, 부품소재 및 기계류의 국산화, 유망 중소기업 지원 등 중소기업 구조고도화와 기술개발 촉진을 위한 제도정비를 확대하였다.10) 그 덕택에 당시 세계적인 경제 불황 여파로 각국의 전반적 투자가 부진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계 및 전기전자 부문의 투자는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또 산업용 화학·자동차·제1차 금속 등에서도 투자확대와 빠른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80년대 전반을 경과하면서 신흥 산업인 전기·전자와 자동차 부문이 성장기여율 면에서 전통적 성장산업이었던 섬유 및 음식료 부문을 앞지르게 되었다. 이 같은 1980년대 전반 구조불황 산업의 조정 및 합리화, 그리고 성장‧성숙산업의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 실시된 중소기업 육성 및 기술개발 촉진 등의 정책 성과로 말미암아, "경공업-중화학공업 간에 그리고 중화학공업 간에 그 분업연관이 한층 심화되었고, 이와 함께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분업연관 역시 크게 확대"11)되었다. 이러한 성과를 기초로 한국경제는 이후 '3저 호황'이라는 개국 이래 최대 호경기를 맞이할 수 있었으며, 또 그것을 1990년대 이후 새로운 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진행이 보여주듯 이 시기 산업구조조정과 고도화에 있어 얼마간의 성과는 한국경제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오히려 구조조정 후 한국의 재벌체제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러한 구조조정과 이를 기반으로 한 해외시장에서의 성과가 가시화될수록 이에 비례한 미국 등 해외의 개방 압력 또한 높아져서 한국경제의 대외의존성은 한층 심화되었다. 결국 신식국독자의 첫 번째 자율적 내부조정 및 경제 합리화는 한국사회를 신식국독자의 기본 틀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하였다.

두 번째 계기는 1987년 민주화투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1997년 외환위기 직전까지 노동운동의 강력한 발전으로부터 주어졌다. 이 시기 전국 각 사업장에서는 노동조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조직률이 크게 상승하였다. 이 같은 노동자들의 역량 강화는 자연히 그동안의 높은 한국경제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미루어져 왔던 노동자들의 처우에 대한 개선을 가져오게 했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대폭 인상되었으며12), 또 법정 최저임금제도가 실시되었다. 1987년부터 시행된 최저임금제는 1988년과 1989년을 거치면서 점차 그 대상범위를 확대하였으며, 상시 근로자 10인 이상인 전 사업장에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또 1989년에는 법정 근로시간이 주 48시간에서 주 44시간으로 단축되었으며, 직장의료보험 적용대상은 상시근로자 16인 이상에서 5인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일각에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한국의 일부 대기업 중에는 이 시기 과거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대세에 순응하여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고용안정을 보장해주는 대신에, 직장교육의 강화를 통하여 노동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는 등의 새로운 노사관계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분위기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같은 자본 측의 움직임이 현실로 정착되었더라면, 한국경제는 그 근저에서 저임금과 해외수출에 기반한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사관계에 있어서의 새로운 조짐도 얼마 후 한국경제가 IMF 사태를 겪고 정부가 노동운동에 대한 강경탄압 정책으로 돌아서자 결국 정착되지 못하고 수그러들고 만다. 기업들도 이러한 정부정책에 적극 호응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13)

중소기업을 육성하여 국내의 산업연관을 강화하고 또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여 새로운 노사관계를 정립하려던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 신식국독자의 선진국독자로의 전환을 위한 한국사회 내부의 '자율적'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시도가 결국 좌절되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겉으로 드러난 직접적인 요인으로 볼 때, 우선 외부로부터의 개방화 압력을 들 수 있으며, 이는 현대제국주의와 관련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확실히 1980년대 중반 이후 날로 거세어지는 외부로부터의 개방화 압력은 한국 자본주의로 하여금 내적인 구조조정을 실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허용치 않았다. 이는 1950년대 일본 자본주의가 내부적으로 자체 조정과정을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겪었던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 미국은 1980년대 들어 국제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내세운 무역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하였으며, 1983~85년 연속으로 발효된 미국의 무역정책은 자국 시장의 보호와 타국 시장에 대한 개방 압력을 교묘히 결합하였다. 우선 일본·독일과 같은 주요한 대미 무역수지 흑자국가들을 겨냥하여 미국은 이들 국가들을 상대로 자본시장 자유화를 포함한 개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한국에 대해선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경제가 '3저 호황'에 힘입어 큰 폭의 대미흑자를 기록하자 미국의 개방 압력 또한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수입자율화 비율은 1979년 68.6%에서 1985년 87.7%로 높아졌으며, 1990년에는 다시 96.3%로까지 상승되었다. 관세율 역시 한미 간 통상마찰이 격화됨에 따라 1985년 21.3%에서 1989년 12.7%로 낮아졌다. 1980년대 말에는 과거 보호의 당위성을 인정받던 농산물시장까지 수입개방 압력에 내몰리게 되었다. 금융 분야에 있어서는 1984년 7월부터 외국인 투자에 대해 '네가티브 시스템'이 도입됨으로써 투자자유화 업종이 대폭 확대되었으며, 자동인가제 도입, 지분제한 폐지, 송금제한 폐지 등 외국자본 진출에 매우 편리한 조건이 마련되었다.14) 이렇듯 날로 강화되던 외부의 개방화 압력은 한국이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이하게 되자 그 정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사회의 자율적인 구조전환 시도는 외환위기 과정에서 타율에 의한 개방이 강제됨으로써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선진국독자로의 전환이 실패한 두 번째 원인은 '폭압적 국가'의 존재 때문이다. 신군부의 제5공화국 정권 하에서 일정한 자율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그것은 결코 저임금·장시간 노동으로 대표되는 민중에 대한 수탈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같은 기존체제를 더욱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그것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총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노동입법의 개악을 통해 노동3권을 극도로 제한하였으며, 제3자 개입 금지, 교섭단체위임 승인제, 유니온 샵 폐지 등 제도개악을 통해 노동조합 활동을 약화시켰다. 또한 '사회정화'의 이름 아래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조합원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기도 하였다. 안정화정책에 따른 물가안정 목표의 실현을 위해 임금비용의 상승을 극도로 억제함에 따라 1980년과 1981년 실질임금은 감소하였다. 이렇듯 계속된 임금억제로 1985년까지 임금상승률은 노동생산성의 상승률에 훨씬 뒤쳐졌으며 노동시간은 줄곧 늘어났다. 농민에 대한 수탈 정책도 강화되었는데, 물가안정을 이유로 추곡수매가를 동결시켰다. 주곡가격의 인상 억제로 대신 복합영농이 제시되었지만, 수급불균형과 계속된 가격폭락으로 적자영농에 허덕이는 농가는 더욱 증가하였다. 이리하여 호당 농가 부채는 1980년 33만 9천원이던 것이 1986년 219만 2천원으로 6.5배가 늘어났다. 이렇듯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을 희생시켜서 '국가-재벌 동원체제'의 비효율을 극복하려는 과거의 정책이 되풀이되었던 것이다.15) 신식국독자의 선진국독자로의 전환을 위해선 앞서 언급했듯이 노동력을 비롯한 국내자원의 최대한의 개발과 활용이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임금상승이 원활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초과착취와 수탈정책은 국내시장의 발전을 억제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경제의 대외의존성은 근본적으로 탈피할 수 없었다. 
여기서 이 같은 신식국독자의 기존 정책이 198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지속될 수 있었던 원인을 따지자면 바로 '폭압적 국가'의 존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국가권력의 폭력기제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확대되었다. 이후 남북한의 대치상황에 기대어 방대한 군대와 경찰병력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한편, 국군보안사와 중앙정보부 등 정보사찰 기구들도 한층 강화되어 이를 민간사찰에 상시적으로 이용하였다. 이 시기엔 노조결성 시도조차 '반공' 의 이름 아래 탄압받았으며,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심각히 억압받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노동운동은 제대로 성장하기가 힘들었다. 이 같은 상황은 19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겪은 후 일부 '형식적 민주주의'의 실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 이는 결국 한국의 신식국독자가 저임금에 기반한 기본체제에 안주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선진국독자 전환 실패의 세 번째 원인이자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재벌의 존재이다. 외부의 개방 압력이 비록 국내의 자율적 조정과정을 좌절시킨 직접적 요인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현대제국주의는 구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정치적 지배와는 달리 경제를 매개로 한 간접 통치방식을 사용한다. 때문에 전면개방 요구와 같은 현대제국주의의 정책은 반드시 신식민지국가 자체의 내적요인을 매개로 할 경우에만 비로소 관철될 수 있다. 국제적으로 볼 때도 똑같은 외부압력 속에 각국의 개방화 정도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국사회의 경우 이 같은 외부의 개방 압력을 관철시키는데 일조한 내적요인은 먼저 앞서 거론했던 '폭압적 국가권력'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신식국독자 자체 내부의 '저임금구조' 유지라는 요구가 없었다라고 한다면, 설령 남북한 대치상황을 염두에 둔다 할지라도 그 폭압성이 장기간 지속될 이유는 적어진다. 결국 문제는 해외시장에 자신의 주요한 이윤실현 기반을 두고 이를 위해 국내시장의 희생을 요구하는 재벌에 있다. 이들은 한국 경제개발 초기에는 외화획득을 요구하는 정부의 강력한 지상명령 때문에 자신의 실력에 걸맞지 않게 일찍부터 해외시장에 나가 외화를 벌어들여와야만 하였다. 그리고 차츰 내부의 이윤축적이 진행되고 자본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초기의 외채상환을 위한 외화획득 압력은 줄어들었지만, 그 대신 자신의 대량 생산품의 실현 공간으로서 협소한 국내시장보다는 해외시장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재벌이 이렇듯 줄곧 해외시장에 대한 의존성을 강화함으로써 국내의 저임금구조도 계속해서 유지되어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신식국독자의 낮은 생산력 때문에 재벌들이 선진국의 독점자본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저렴한 임금비용을 그 주요한 경쟁력 바탕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부의 개방 압력에 대해서 재벌은 처음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나중에는 반대로 적극적인 지지자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6) 재벌은 이때부터 국내에서 가장 적극적인 개방옹호론자가 되었는데, 1990년대의 자본시장 개방에서부터 서비스업을 포함한 한국경제의 전면개방을 초래한 2005년 한미 FTA 협상 타결에 이르기까지, 삼성을 필두로 한 한국 재벌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듯 다름 아닌 폭압적 국가권력과 재벌 등 신식국독자 기본체제 자체가 자신의 선진화를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87년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노동자대파업 등 계급투쟁의 활성화를 거치면서 비록 일부 수정이 가해졌지만, 그러나 그것도 결국 IMF위기를 겪으면서 신식국독자 기본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실패하였다.

[본문 주석]

1) 유철규 편,2003, <한국자본주의 발전모델의 역사와 위기>,p56, 함께읽는책. 

2) 김진업 편, 2001년, <한국자본주의 발전모델의 형성과 해체>, p222, 나눔의집. 

3) 이 점을 간과하였기에 1987년 나온 <한국 사회의 성격과 노동자계급의 임무>(약칭 <성격과 임무>) 는 한국 자본주의의 시기구분에 있어 오류를 범하였다. 이 문건에선 1950년대 후반을 한국에서 독점자본주의가 성립하는 시기로 보았는데, 그래야만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이 본격화한 1960년대를 신식국독자 성립시기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독점자본주의의 '내적 특성의 전면화'로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시각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결과이다. 

4) 이상, <한국자본주의 발전모델의 형성과 해체>, pp165-166,177-178. 재벌체제와 관련해서는 본 연재 2부에서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5) 구해근, 2002년,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pp.55,64, 창비.

6) 이 같은 외적요인을 규정짓는 '현대제국주의'는 1970~80년대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기변모하며, 그 후기로 갈수록 '신자유주의'를 통해 자유화와 개방화 이념을 전 지구적으로 전파하고 실천한다. 이 때문에 한국의 신식국독자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 이 같은 현대제국주의와 관련된 요소는, 그 대외의존성을 매개로 국제적인 자유화와 개방화의 압력의 성장과 비례하여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커지게 된다. 이는 한국의 경제개발이 이루어질수록(즉 신식국독자가 발전할수록) 이에 비례하여 확대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점은 1980년대 중후반 '3저 호황'을 겪으면서 한국의 대미흑자가 늘어나자 이를 빌미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대외개방 압력이 더욱 강화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과정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이 '완전개방'을 할 때까지 지속된다. 

7) <한국자본주의 발전모델의 형성과 해체>, p168.

8) 당시 4대 채무국의 하나였던 한국은 1979~1985년 사이에 구조조정융자 5.5억 달러, 부문조정융자 2.2억 달러 등 약 7.7억 달러를 제공받았다. 이는 융자를 공여 받은 35개국 가운데서 터키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것이었다(<한국자본주의 발전모델의 형성과 해체>, pp188-189). 터어키와 한국은 당시 미국에 있어 대 소련과 사회주의권 봉쇄를 위한 NATO 및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두 전진기지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9) 기존의 신식국독자는 보통 '권위주의적 개발독재체제'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경제기제의 측면에서 볼 때 '국가-은행-기업'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국가동원체제'의 성격을 가졌다. 이 같은 동원체제에 대한 설명과 그 기제가 와해되는 과정에 대해선, <한국자본주의 발전모델의 형성과 해체>,pp148-162,170,223-225 참조.

10) 위의 책, p173.

11) 위의 책, p179.

12) 이와 관련하여 현대중공업 해고자 이갑용씨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1991년3월 초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회사는 조합원을 설득하기 위해 상여금 600%를 확정 지급해준다. 1987년 노동조합이 생기고 4년 만에, 300% 차등 지급이던 것이 600% 일괄 지급으로 바뀐 것이다. 따져 보면 불과 5년 만에 10년 동안 고정되어 있던 성과급이 배로 오르고, 임금도 두 배 이상, 거기에 각종 단체협약의 인상분까지 합하면 회사가 지급해야 할 임금이 1987년보다 10배 정도는 늘어났다. ……정말 회사가 망해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해마다 흑자란다. 답은 그거였다. 그동안 우리가 그만큼 착취당했다는 것, 회사가 늘 피우던 엄살은 거짓말이었다는 것, 우리는 정말 바보였다는 것."이갑용, 2009년,<길은 복잡하지 않다>,p116, 철수와영희.

13) 다음 인용문은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로 한 상황변화를 잘 말해준다. "1997년 위기 이후 착취율 상승은 1997년 이전까지 나타났던 노동자계급에 대한 우호적인 추세들, 예컨대 국민소득에서 임금몫이 차지하는 비중, 즉 노동소득분배율의 상승 추세, 소득분배의 불평등의 개선 추세, 노동시간의 감소 추세 등이 1997년 위기 이후 중단되거나 역전되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나라 노동소득분배율은 1997년 위기 이후 저하 추세로 반전되어, 2004년에는 44%까지 저하하여 1989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즉 자본이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에 내주었던 것을 다시 탈환한 것이다. "정성진 외, 2006,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체제 변화:1987-2003>,pp27-28,한울아카데미.

14) 이상, <한국자본주의 발전모델의 형성과 해체>,p176.

15) 위의 책, p171. 

16) 예컨대, 1980년대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재벌들은 자신들의 국내시장의 독점적 지배를 목적으로 개방의 시기를 늦추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1985년 경상수지 흑자가 실현되면서 개방을 요구하는 통상마찰이 심화되자 개방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주력 품목의 수출을 위해 "줄 것은 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변신하였으며, 이 같은 개방불가피론을 자신들의 경제자유화론 혹은 민간주도경제론과 결합시키고자 하였다(<한국자본주의 발전모델의 형성과 해체>,p176). 사실상 이 무렵인 1980년대 후반 한국 독점자본의 국제독점자본으로의 변신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정호 약력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박사 학위 취득,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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