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사회 성격’ 탐구] (4)

[본문요지] 한국 자본주의에 있어 국가독점자본주의 측면은 경제개발 초기 ‘외자’라는 신식민지적 요소의 도입을 통해 성립하였으며, 이후에도 이러한 규정성이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되었기에, 한국의 신식국독자는 신식민지적 측면의 '근본적' 제약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신식국독자 논쟁의 또 다른 이슈인 '낮은 생산력' 문제에 있어서 볼 때, 서구의 선진국독자는 먼저 자신의 내부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는 기초 위에서 해외시장을 이용하였음에 비해, 신식국독자는 국내시장의 희생위에서 해외시장의 성공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두 개 시장 활용’ 측면에 있어 치명적 결함이 존재하였다.

▲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사진 : 뉴시스]

2. 신식국독자론의 두 가지 측면

1) 국가독점자본주의 측면의 성립
2) 신식민지 측면의 성립 (이상 게재됨)
3) 종합

이제 신식국독자에 있어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신식민지 양 측면에 대해 함께 고려해 보도록 하자. 신식국독자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측면은 대체로 생산력발전을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하지만, 신식민지 측면은 생산력발전을 억제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런데 신식국독자는 이들 양자의 종합이기 때문에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신식민지 양 측면의 관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경우 한국에 있어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측면의 성립은 먼저 신식민지 측면의 도입을 통해 가능하였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에서 국독자는 '준(準)국독자'라 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자본주의'를 매개로 하여 성립하였다. 여기서 이 같은 '강력한 국가자본주의'의 성립에 있어서는 이미 ‘외자’라는 신식민지성의 도입이 전제조건이 된다. 이후 양자가 발전하는 가운데서도 전자(국독자 측면)는 후자(신식민지 측면)의 전제하에 발전하는 관계를 유지하였기에, 한국 신식국독자의 국독자성은 신식민지성의 '근본적'인 제약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즉, 애초 생산력발전 수준이 낮은 한국에 있어 국독자 측면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투자자본과 해외시장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과제는 한국경제의 현대제국주의 국제질서 즉 국제금융통화체제와 국제 분업체계에의 본격적 편입을 통해 해결 되었다. 이는 또한 한국경제에 있어 신식민지성이 본격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렇듯 경제개발 초기에 도입된 신식민지성은 한국의 대외의존적인 수출주도형 경제를 낳으면서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고 구조화되었다. 이후 그것은 한국이 국독자로 발전함에 있어 일반형태가 아닌 그 특수형태인 신식국독자가 되게끔 하였으며, 그 생산력발전은 이 때문에 근본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여기서 '근본적'이란 의미는 신식국독자에 있어 일정한 생산력발전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식국독자는 자신의 신식민지성으로 말미암아 국독자가 원래 지니고 있던 잠재적인 생산력발전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볼 때도 신식국독자는 정상적인 선진국독자로 나아가는 길이 가로막혀 결국 후자의 높은 생산력수준에는 이를 수가 없게 된다는 뜻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국독자는 원래 '조직된 자본주의'로서의 요소를 일정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그 역사적 한계 내에서나마 자신이 본래 지닌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 종전 후의 역사가 보여주듯 실제 자본주의는 이 단계에 들어서서 그 어느 시기보다도 고도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신식국독자는 자신 내부의 신식민지성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이 같은 고전적 국독자가 정상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높은 생산력수준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게 된다.

한국 신식국독자에 있어 신식민지성(종속성)에 의해 생산력발전이 근본적 제약을 받게 되는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대외의존적인 경제발전에 따라 국민경제 전반의 재생산과정이 매우 불안정하며, 외부의 변화에 쉽게 흔들리고, 일단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그것이 정상적인 국독자보다 훨씬 증폭된다는 취약성을 갖는다. 예컨대 그 대표적인 사례로 197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를 들 수 있다. 그 무렵 세계경제가 갑자기 불황에 빠지자 그때까지 대규모 외자를 들여와 중화학공업 전략을 추진하던 한국경제는 매우 큰 충격에 휩쓸리게 되었다. 이는 결국 권력층 내부의 쿠데타에 의한 박정희 유신체제의 몰락과 제5공화국 신군부독재정권 성립의 계기가 되었다. 이 위기는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긴 구조조정과 '3저 호황'이라는 국제환경의 우연적 변화를 통해서 가까스로 수습될 수 있었다. 이후에도 한국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는 등 서구의 국독자 보다 훨씬 큰 동요와 불안정성을 내비치고 있다.

이러한 실례가 보여주듯, 신식국독자의 대외 의존적 경제발전전략에 기인하는 재생산과정의 취약성은, 자본주의 재생산과정이 본래 갖고 있던 일반적 취약성에 더해 자신의 경제위기를 더욱 증폭시키고 사회 전반의 위기를 몰고 오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불안정성으로 인해 신식국독자의 생산력발전은 일반 국독자에 비해 더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둘째, 장기적으로 볼 때 더욱 치명적인 것은, 대외 의존적 경제발전전략으로 말미암아 국내시장의 성장이 억압당하고 국내 보유자원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국외로부터 생산제와 원료의 구입을 위해 차입한 외화는 이후 차입금 상환을 강제함으로써, 한국경제는 국내 요소의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기도 전에 해외시장에 대한 의존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편에선 저임금·저곡가 등 국내 민중에 대한 초과착취와 수탈이 구조화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선 대기업 위주의 편향적 수출지원 정책으로 인해 중소기업의 육성을 통한 국민경제 내부의 유기적 분업관계의 발전이 저해 되었다. 이 때문에 국내시장은 경제의 전반적 고도성장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다시 한국경제로 하여금 더욱 대외의존성을 높이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여기서 국내시장의 육성이 억제된다고 하는 것은, 단지 '유통' 측면에서 시장규모의 확대라는 양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좀 더 본질적으로 국내자원의 심도 깊은 발굴과 활용이 저해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생산력발전의 제일 요소는 무엇보다도 인적자원이며, 그것의 개발 및 효율적 활용이 장기적으로 볼 때는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인적자원의 개발과 활용이 '저임금' 정책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게 됨으로써, 이로부터 경제발전을 추동하는 창조성과 과학기술의 발전이 근본적으로 저해 받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의 전후 경제발전 과정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앞서 이미 대략적인 소개를 하였지만 여기서 좀 더 부연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일본의 전후 경제발전 모델을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1950년대 초에 있었던 노사관계의 새로운 정립이다. 이 무렵 일본은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한 전후 복구와 부흥이 일차 마무리된 상태이었는데, 일본경제는 그 후 일시적인 경기과열과 과잉생산으로 단기간의 조정을 맞게 된다. 이 때 일본 기업들이 고용인력 축소를 서두르고 정리해고를 단행하려고 하자, 일본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의 약칭)을 선두로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패전국가인 일본은 이미 기존 국가권력의 억압기제가 상당히 훼손되어 느슨해진 상태이었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노동자계급은 당시 재벌해체 정책을 펼치던 미군정의 비호 하에 순조롭게 조직을 결성함으로써 역량이 상대적으로 강화된 상태이었다. 이리하여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 일본 기업들은 일정한 양보를 통해 타협을 이룰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부터 일본의 노자관계는 '종신고용'이라고 하는 특수 관계가 성립되게 된다. 이는 장기파업으로 인해 큰 경제손실을 경험한 일본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하느니 차라리 고용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그들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바꾸면서 사내 노동자에 대한 교육에 힘쓴 결과이다. 노동력의 합리적 활용 방안의 하나로 순환배치 등을 통한 소위 '다기능 노동자'가 이때부터 생겨나게 되었다.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도요타 자동차의 적기생산방식(JIT)도 사실상 일본 산업계의 이 같은 '다기능 노동자'의 양성에 기반한 것이며 이를 좀 더 체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하여 노동생산성이 향상되어 기업 이윤이 늘어나자, 기업들은 자신들이 벌어들인 이윤 중 노동생산성 향상 분만큼은 노자간의 타협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돌려주었으며, 이에 따라 이 시기 경제성장과 노동소득의 증대는 일정한 보조를 맞추어 진행되게 된다.1) 일본 노동자들의 임금상승은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 되었는데, 처음 5천 엔 수준에서 시작하여 1970년대 초 3만 엔대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 약 5~6배가 상승하였다. 이 같은 임금상승에는 일본경제 기술혁신에 따른 노동생산성 향상과 함께, 일본경제가 고도성장을 지속한데서 기인한 노동력 공급부족 현상도 크게 작용하였다. 일본은 1960년대 들어 전반적인 노동력부족 시대에 들어섰는데, 이 때 보통 직공 특히 저학력자들의 임금이 크게 상승하면서 대졸자와의 격차가 줄어들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격차도 크게 줄어들어 '임금평준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렇듯 임금상승으로 가계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국내시장이 확대되었으며, 일본 기업들은 다시 생산투자를 확대하는 선순환을 밟게 되었다. 실제로 일본의 1955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의 고도성장 기간에 있어서의 경제발전은, 이렇듯 임금상승과 가계소득 증대에 기인한 국내 소비증가가 큰 공헌을 하였다.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일본 민간최종소비는 연평균 8%~10%의 성장률을 유지하여 총 수요 증가의 50%~60%를 차지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이끌고 유지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2) 일본경제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3종 신기(神器)'(흑백TV, 냉장고, 세탁기)에 의한 수요가 발생하였으며, 1960대 중 후반에는 다시 '신3종 신기'(칼라TV, 에어콘, 자가용) 붐이 일어 일본경제를 떠받쳐주었다.

국내 민간소비가 이렇듯 중요해지자, 국내시장의 치열한 경쟁구조 하에 있던 일본 기업들은 일본 소비자들의 요구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까다로운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제품과 기술 개발에 지속적으로 많은 공을 들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 기업들은 애초 미국에서 수입한 기술들을 일본 실정에 맞게 재개발하고 응용함으로써, 마침내는 절전형 가전제품과 에너지절약형 자동차 등 자체 신제품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1970년대 후반 일본 자동차와 전자제품들이 해외시장에 진출하여 세계시장을 석권하는데 큰 밑받침이 되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이 수출경제로 본격 전환하게 된 것은 이렇듯 일본경제가 고도성장을 이룬 후 한 참 뒤의 일이다. 즉 제1차 오일쇼크와 전반적인 과잉생산으로 세계경제가 불황기로 접어든 무렵인 197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였던 것이다. 그전까지 일본경제는 '경기성장→임금상승→국내시장 확대→경제성장'의 선순환을 경험하면서 단계적 확장을 지속하였으며, 그 기간 동안 국내시장과 국내자원은 심도 깊게 발굴되고 이용되어 그 잠재적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구축된 기업경쟁력과 국내시장 기반이야말로 이후 일본이 지구화와 개방화 시대를 맞아 그 초기 세계시장의 제패를 이루는데 있어 커다란 밑받침이 되었다.

일본의 경우와 좋은 비교가 되는 것이 한국 경제발전 과정에서의 노동정책이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경제개발이 시작된 1960년대 초반부터 저임금 정책을 줄곧 유지해 왔다. 이러한 사정은 어느 정도 산업화의 목표가 달성된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변화되지 않았다 (지금도 본질상 그러하다!). 그런데 이 같은 한국의 저임금 정책은 사실상 시장논리를 무시한 조치이다. 경제발전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에는 자연히 노동력 수급에 변화가 생겨 임금인상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경제기제의 정상적 작동은 권위적 개발독재정권을 통해 인위적으로 거부되었으며, 한국정부는 남북분단의 대치상황을 빌미로 '반공'이라는 이름을 빌려 노동운동을 극도로 탄압하였다. 이리하여 한국 노동자들은 일본 노동자들처럼 최소한 노동생산성의 향상 분만큼의 몫을 돌려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때로는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수준을 감내하여야만 했다. 이 같은 장기간의 저임금 정책이 실시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따지자면, 사실 이는 한국경제의 대외 의존적 발전전략으로부터 기인하는 측면이 강하다. 외채상환 압박 때문에 해외시장에서 외화를 벌어들여야 하는 한국 기업들이 당시 자신의 경쟁력을 일차적으로 저임금에 둘 수밖에 없었던 점, 그리고 국내 경제성장 성과의 상당부분이 외채상환 등의 과정을 통해 해외 금융자본의 손에 유실되었던 점이 그것이다. 결국 이 같은 인위적으로 강제된 저임금 정책은, 일본처럼 경제성장이 국내시장의 확대를 가져오고 다시 그것이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경제성장→시장 확대→경제성장'의 선순환을 가로 막았으며, 한국의 국내시장의 발전은 장기간 억압될 수밖에 없었다.

이상의 신식국독자의 성장모델이 갖는 취약성의 근원은 '내생적' 방식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대외 의존적 발전방식을 걸었던 데서 찾아질 수 있다. 앞서 살펴본 한국의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과정과 일본의 종전 후 경제발전과정은 그 좋은 비교대상이 되는데, 우리는 양자의 발전방식을 제2차 세계대전 후 출현한 현대제국주의 조건 하의 현대적 산업화의 두 가지 경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각 신식국독자와 선진국독자의 경로라고 불러질 수 있으며, 이 경우 일본은 후자를 대표하는 일종의 전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현대적 산업화와 국가독점자본주의와의 관계를 잠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위의 두 개의 경로는 현대적 산업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각각 선진국독자와 신식국독자를 성립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비록 전후에 독점자본주의단계 (이는 생산사회화의 상당한 고도화가 달성된 상태를 의미한다)에서 곧 바로 출발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2차 대전 후 제3차 과학기술혁명 하에서 새롭게 발전한 생산력발전, 특히 선진적인 미국 자본주의와 비교할 때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이 점은 절대적 생산력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종전에 일본경제가 가지고 있던 기형적인 중공업 위주의 파행적 구조, 농업현대화 과제 등의 제 측면을 볼 때도 그러하였다. 때문에 종전 직후의 일본은 아직 현대적 산업화의 과제를 남겨놓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전후복구와 새로운 경제부흥의 과정을 통해 차츰 완수되었으며, 일본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계 즉 정교한 국가의 경제관리 시스템과 '복지국가' 체계의 완성 역시도 그 같은 과정을 통해 함께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는 한국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한국의 신식국독자적 경로는 마찬가지로 현대적 산업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면서 또한 신식국독자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경제개발이 시작될 무렵 한국은 비록 일본과는 달리 독점자본주의라는 물질적 기반을 갖고 있지는 못하였지만, 그 대신 외부자원을 빌려 '강력한 국가자본주의' 전략을 펼칠 수 있는 기회는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그 같은 약점을 일정 보완하고 비교적 단기간 내에 초보적인 현대적 산업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또한 신식국독자 체계가 성립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3)

여기서 일본을 선진국독자 방식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선 얼마간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특히 '다기능 노동자' 현상은 일본에서만 보여 질 수 있는 특이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사례는 다른 선진국들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예컨대 노자간의 사회적 대타협에 기초해서 고용된 노동력에 대한 최대한의 개발과 활용을 가능케 한 점 등이 그러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스웨덴이나 독일 등 전후 '복지국가'를 대표하는 국가들도 이 같은 노자간의 대타협에 기반 하여 국내 자원의 나름의 최대한의 활용이 이루어졌다. 다만 일본의 '다기능 노동자'는 이 방면에서 좀 더 나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식국독자와 선진국독자 두 개의 경로에 있어 양자가 서로 다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각자가 처해있던 '초기조건'의 상이함과 그들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의 차이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 세 가지 요인을 들 수 있는데, 즉 (1)국내의 산업기초, (2)정치적 조건, 그리고 (3)국제적 환경의 차이가 그것이다.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경우를 들어 이들 각각에 대해 살펴보면 이러하다.

먼저 국내 산업기초의 차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산업화에 필요한 투자 자본과 기술을 국내적으로 어느 정도 조달할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였다. 이는 이후 국독자의 발전에 있어 신식민지성의 도입여부를 가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일본은 그 대부분을 자체 조달하였던 반면에 한국은 반대로 많은 부분을 해외에 의존하여야 하였다. 둘째, 정치적 조건에 있어 볼 때, 일본은 패전으로 인해 기존 권위주의적인 국가체계가 많이 약화된 상태로, 이 때문에 일본의 자본가계급은 전후 단결권을 확보한 노동계급 앞에 일정한 양보와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 이를 이후 자신들의 자본축적운동의 기본전제로 받아들였다. 이에 비해 한국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오히려 비대해지고 강폭해진 국가권력이 경제개발과정을 주도하였으며, 이는 이후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저임금 정책을 장기간 지속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셋째, 국제적으로 볼 때 일본의 전후 경제부흥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는 국독자의 전기에 해당하며, 이에 상응하는 국제질서는 현대제국주의의 '동맹적 제국주의'에 조응하는 특성을 지녔다(‘제4장 현대제국주의’ 참조). 이 때문에 선진 각국의 자본운동의 중심은 아직 자국시장 내에 두어져 있었으며, 또 사회주의권과 대결하는 냉전 상황으로 말미암아 이들 자본 간의 경쟁이 일정 제한되고 정치적으로도 우호적인 분위기가 존재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경제는 초기 부흥과정과 이후 본격적인 경제발전 과정에서 상당정도 미국과 같은 보다 선진적인 자본으로부터 자기보호막을 치는 것이 가능하였으며, 이로부터 내생적 발전을 위한 비교적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산업화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국독자가 그 전기에서 후기로 이행하고 현대제국주의도 '동맹적 형태'에서 '단일패권적' 형태로 변화하는 시점과 겹치게 되었던 만큼, 일본과 달리 외부영향을 보다 많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마침 과잉생산과 과잉자본에 시달리던 선진국독자로부터 비교적 용이하게 투자 자본과 기술을 도입할 수 있게 하는 유리한 조건이 되기도 하였지만,4) 다른 한편에선 이 시기 들어 점차 거세어지는 개방화 압력에 의해 내생적 발전을 위한 자기조정의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보장받지 못함으로써 정상적인 발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이 신식국독자와 선진국독자가 종전 후 산업화를 이루는데 있어 서로 다른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 ‘초기조건’의 상이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세 가지 조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첫 번째 요인인 국내 산업기초의 차이이다. 이는 두 번째(정치적 조건)와 세 번째(국제적 조건)보다 영향력 면에서 우위이며 후자를 사실상 규정한다. 예컨대 일본이 전쟁 시기에 이미 달성했던 일정한 산업기초는 전후 일본의 경제복구와 경제발전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도록 만들었으며, 노자간의 타협도 보다 용이하게 하였다. 또 대의제적 민주정치를 별 탈 없이 운영하는 데 있어서도 안정적인 물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국제적 측면에서 볼 때, 영토에 대한 직접적 점령을 특징으로 한 구 제국주의와는 달리 종전 후 성립된 현대제국주의는 일본이 자신의 투자 자본을 자체 조달하여 내생적 성장을 진행하는 것을 방해할 만큼 강력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위의 두 개의 경로 차이를 낳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국내 산업기초의 차이임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이미 지금까지의 신식민지성에 의한 생산력발전의 '근본적' 제약과 관련한 서술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신식국독자와 관련된 논쟁에 있어 중요한 초점 중의 하나인 '낮은 생산력' 문제에 관해서 조금 더 언급하도록 하자. 생산력발전 수준이 낮은가 높은가의 문제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비록 신식국독자에 있어 생산력이 절대적으로는 발전한다 할지라도, 만약 그것이 일반 국독자가 성취한 수준에 못 미친다고 한다면 이는 낮은 생산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 국가의 경제가 어느 정도의 발전성과를 이룰 수 있는가는 크게 보면 국내와 해외 두 부문의 자원을 얼마만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특히 1980년대 이래 지구화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되면서부터 과거 서로 별개이었던 국내와 해외 두 개 시장 간의 관계가 날로 긴밀해지고 상호 교차하는 상황 하에선 더욱 그러하다. 이 때문에 오늘날 두 개 시장의 활용 문제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국독자가 전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면서 서구 국가들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전략도 크게 보자면 이 양대 시장에 대한 활용 전략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서구의 선진국독자가 수행하는 두 개 시장 전략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종전 후 새로운 생산력발전 때문에 이미 일국 국내시장 차원에서 달성할 수 없게 된 경제의 일반균형 문제를 해외시장의 힘을 빌려 일정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즉 중점은 결국 국내 경제균형으로 맞추어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어차피 국제독점자본주의 단계로까지 나아갈 수 없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있어선 나름의 차선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제4장 참조). 이 같은 전략은 나름대로 국내외 양대 시장이 주는 기회를 모두 충분히 활용하고자 하는 전략에 속한다. 왜냐하면 먼저 자신 내부자원을 충분히 활용한 기초 위에서 해외시장의 활용을 모색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진국독자의 이 같은 전략이 나름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자국 국내시장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음에 있다. 국내시장 기초가 튼튼하기에 선진국들은 국가 간 시장 개방 협상에 있어서도 개발도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또 지구화시대 경쟁력의 핵심인 첨단과학기술의 개발과 관련하여서도 그러하다. 관련 기술에 대한 직접적인 거액의 투자와 함께 사회적으로는 교육과 사회보장 부문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가 요구되는데, 서구의 선진국독자는 '복지국가'라는 기본체제를 유지함을 통해 나름의 국내 관련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 나갈 수 있게 한다.

이와 비교할 때도 신식국독자는 두 개 시장의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는 데에 있어서 치명적 결함이 존재한다.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그것은 처음부터 국내시장의 희생위에서 해외시장의 성공을 도모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양자를 비교하여 보면 신식국독자는 분명 양대 시장을 이용하는 전략 측면에 있어서도 효율적이지 못하다. 이는 장기적으로는 선진국독자에 비해 자신의 생산력수준이 지속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5)

[본문 주석]

1) [일]桥本寿朗 외,2001년, <현대일본경제>,pp112-114,상하이재경대학출판사.

2) 위의 책,p120. 이 같은 왕성한 민간소비는 일본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임금상승과 사회보장제도 때문이다. 일본은 일찍이 1959년 전 국민 퇴직금제도를 실시하고, 1961년 전 국민 보험제도를 보급하는 등 한국과는 달리 고도성장기간(1955초~1970년대 초)에 사회보장제도를 일차 완성하였다. 이 같은 사회보장제도는 일본 기업들의 비교적 높은 사내 복지와 함께 노동자들의 소득수준 향상과 생활수준의 안정화를 가져왔으며, 내수확대의 조건을 제공하여 경제성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비해 한국은 고도성장기가 끝난 후 2000년대 초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라야, IMF구조조정을 지원할 목적으로 비로소 본격적인 사회보장제도 건설을 시작하였다.

3) 한 가지 덧붙이자면, 종전 후 현대적 산업화를 달성하는 경로는 이 외에도 '사회주의의 경로'를 첨가할 수 있다. 이 역시 동일한 목표를 이루는 경로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종전 후 새로 탄생한 사회주의국가들이 이 경로를 통해 비교적 단시간 내에 산업화에 성공하였다. 이들 중 상당부분은 그 이전에는 낙후된 농업국가 이었다. 그러나 여기선 논의를 자본주의적 방식의 경제발전과정으로 한정해서 고찰하는 관계로, 위의 신식국독자와 선진국독자 두 개의 경로만을 주로 비교하였다. 

4) 한국경제 산업화 성공의 요인에 대한 다음의 지적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1960~1970년대 고도 경제성장은 당시의 다음과 같은 여건들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첫째, 세계체제적인 조건으로서 1960~1970년대 당시의 대외적 조건이 후진국의 수출지향적 공업화 정책 수행에 특별히 유리했다. 세계경제가 전례 없는 고도성장과 무역의 확대를 경험하고 있었고, 다각주의에 기반을 둔 안정적인 세계경제질서가 형성되었으며, 가트체제가 선후진국 간의 비대칭적 관계를 허용했고, 전후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적인 우위 하에서 자유무역, 자유로운 자본이동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일부 경제적 후진국이 중심부로 진입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선진국들은 후진국들에게 일반특혜관세라는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이러한 조건을 토대로 개도국은 외자도입과 수출시장 확보가 가능했다."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엮음, 2006년,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체제 변화>,p77, 한울아카데미.

5) 사실 중국의 '개혁개방론'은 두 개 시장 활용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두 개 시장 활용론'은 실제 중국 학계에서 의미 있게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이 '개혁'과 '개방'을 나란히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전자는 기존의 사회주의계획경제에 대한 사회주의시장경제로의 개혁을 의미하며 때문에 대내적인 지향성을 갖는다. 이에 대해 후자는 국내와 해외 두 개의 시장을 모두 적극 활용하여 생산력발전을 극대화 하자는 의미를 담으며 그 강조점이 대외적인 지향성에 두어진다. 때문에 오늘날 중국 사회주의시장경제의 커다란 성공은 이 양자를 밀접히 결합시킨 전략의 공헌이라고 볼 수 있다. 

 

김정호 약력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박사 학위 취득,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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