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으로 본 남북연석회의(4/끝)

‘통일정부 수립방도’ 논의한 남북지도자협의회(4월24~30일)

김구는 4월26일 남북연석회의 일정이 끝난 다음날인 27일 오전 평양 근교의 대보산에 있는 영천암(일제 때 일본인 장교를 죽인 김구가 승려 신분으로 잠시 피신해 있던 암자)을 방문했다. 김구의 영천암 방문길에는 옛 약혼자 안신호와 그녀의 장남 김아무개(당시 남포시 인민위원회 서기장)가 동행했다.… 대보산 영천암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김구 일행은 만경대의 김일성 생가에도 들렀다. 당시 김일성 생가에는 김의 조부 김보현과 조모 이보익이 살고 있었다. 김구 일행이 만경대 생가에 갔을 때는 김보현이 마당에서 수수대로 울바자를 엮고 있었다. 김구와 김보현은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옛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김구가 김보현에게 “손자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인데 할아버지가 아직 농사를 계속 짓고 있는가”고 묻자 김보현은 “손자가 나라의 국사를 돌보는 것은 손자의 직분이고, 내가 농사를 짓는 것은 농군의 직분이 아닌가”고 반문하면서 “농자천하지대본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김구는 돌아오는 길에 주위 사람들에게 김일성의 할아버지를 만나 악수하면서 농군의 거북등 같은 손을 잡고 느낌이 많더라, 김일성을 다시 보게 됐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선 김구가 평양을 떠나기 전날 김일성과의 단독 접견시에도 한마디 한 것으로 안다. 

남북연석회의에 이어 미국과 소련 군대의 철수 이후의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지도급인사 15인이 참가한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가 1948년 4월24일부터 30일까지 열렸다. 연석회의에서는 단선 반대투쟁과 양군철수 요구투쟁을 결의한 만큼 이어서 통일정부 수립방도를 논의하는 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도자협의회에는 남측의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항‧조완구‧최동오‧이극로‧엄항섭 등과 남측 좌익진영의 박헌영‧허헌‧백남운 등, 그리고 북측의 김일성‧김두봉‧최용건‧주영하 등 15명이 참석했다. 이들 15인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방도를 공동으로 협의했고 그 결과를 공동성명서로 발표했다. 연석회의에 참가한 56개 정당‧단체들이 모두 이 공동성명서의 서명에 참가했다.

▲ 김규식 선생이 지도자협의회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있다.[사진 : 구글검색]

지도자협의회는 4월27일 오후 2시에 평양시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남북지도자 15인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협의회에서는 의장 선출이라든가 회의 절차가 따로 있지 않았다.… 김일성은 회의 서두에 “연석회의의 성과를 더욱 다지고 미‧소 양군의 철수 후에 자주적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도를 무릎을 맞대고 토의, 합의해야 한다”면서 협의회 개최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특히 “양군 철수 후에 내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강조됐다. 미국측이 “미‧소 양군이 철수하면 한반도에서는 좌우대립에 의한 내란과 남북 간의 내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입장을 펴왔기 때문이다. 양 군대가 철수하더라도 어느 쪽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할 도발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과제가 집중 논의됐던 것이다. 내란에 대한 반대는 김구‧김규식의 일관된 요구였고 이들은 협의회에서도 이 점을 매우 강조했다. 이 원칙은 4월30일에 발표된 공동성명서의 제2항에 나타나 있다.

김규식은 첫날 회의에서 그가 남북연석회의 참석에 앞서 북측에 요구했던 5개항 선행조건을 거듭 밝혔는데 이 중 독재정치 배격, 사유재산제도 승인, 외국 군사기지 제공불허 등은 통일정부 수립 때의 현안이 될 것이어서 별 토의 없이 넘어갔다. 다만 통일중앙정부 수립방도 및 미‧소 양군 철수문제는 어차피 논의돼야 할 과제였다. 미국은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여 양 군대를 동시에 철수시키는데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 회의에서 거듭 확인됐다. 이 원칙은 공동성명서 제1항으로 구체화됐다. 이 회의에서는 아울러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의 원칙도 중요하게 취급됐다. 이 원칙은 공동성명서 제3항에 밝혀진 대로 첫째, 외국군대 철수 이후 남북연석회의 참가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둘째, 이 회의를 통해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즉시 수립하며, 셋째, 이 정부가 모든 정치권력과 정치‧경지‧문화생활의 모든 책임을 지며, 넷째, 첫 과업으로 일반적‧직접적‧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해 통일적인 조선입법기관의 선거를 실시하며, 다섯째, 선거된 입법기관이 헌법을 제정해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도록 해야 한든 것이었다.

지도자협의회 5개항 공동성명에 56개 단체 대표자 연서명

1948년 4월30일에 발표된 4개항의 공동성명서는 이상의 3개항에다 “남조선 단독선거를 인정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는 제4항의 포함했다. 4월27일의 첫날 회의에서 공동성명서의 최종 내용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고 2시간에 걸친 개략적인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러고서 며칠 간 집중 토의한 결과, 공동성명서를 내놓을 수 있게 됐던 것이다.

15인 회담 외에도 26일과 30일에 김일성‧김두봉‧김구‧김규식 간의 4김회담도 열렸고, 김일성과 김구의 개별회담, 김두봉과 김규식의 개별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남북연석회의보다도 이 기간에 열린 남북요인회담이 정치적인 면에서 더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연석회의가 사전준비에 따라 진행한 형식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면 남북요인회담은 남북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들이 단독선거를 막고 미‧소 양군을 철수시킨 뒤 자주적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도를 구체적으로 협의한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로당 지도부도 남북요인회담에 더 비중을 뒀다. 이것은 남북연석회의에서 얻어진 성과를 공고히 하고, 나아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에서 남측의 우익 진영과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당면과제라는 사정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 남북연석회의 모습.[사진 ;구글검색]

남북의 지도자들은 4월30일 오후의 4김회담에 이르기까지 진통을 겪던 공동성명 문제를 매듭짓고 나서 저녁 8시경 지도자협의회를 다시 열어 최종 통과절차를 밝았다. 이 자리에서 홍명희가 공동성명서 4개항을 발표하고 남북 지도자 15인의 만장일치로 이를 통과시켰다. 당초에 지도자협의회에서 공동성명서가 통과되면 남북의 56개 정당‧단체들의 대표들이 다시 모여 이를 통과시키고 서명하기로 돼있었다.… 이날 저녁 9시가 넘어서야 56개 정당‧단체들의 대표들의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에서 지도자협의회(남북요인회담)에서 통과된 공동성명서를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대표 한사람씩 나와 서명하고 도장을 찍는 서명식까지 마침으로써 지도자협의회의 일정을 모두 마치게 된다. 서명식 때는 김일성‧김두봉‧김구‧박헌영‧홍명희‧조소앙 등이 공동성명서의 중요성에 대해 한마디씩 발언을 했다. 김구는 특히 “통일되기 전에야 어찌 우리가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남북의 정당‧단체 대표자들이 만나 통일정부 수립의 방도를 논의해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은 매우 유익하고 유괘한 일이다”라고 말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사실 남북연석회의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지도자협의회였다. 지도자협의회는 4개항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 15인 남북요인회담과 4김회담을 거듭하면서 통일정부 수립방도에 관한 완전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다양한 접촉과 협의 끝에 완전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만큼 뜻 깊은 것이었다. 특히 남측에서 올라온 김규식은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참가한 지도자협의회는 더욱 중요한 행사가 됐다. 지도자협의회는 연석회의의 성과를 더욱 공고화하고 통일정부 수립방도 문제를 다룬 자리였는데 김규식까지 참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남북협상이 됐던 것이다.

김일성과 김두봉은 김구‧김규식만 개별접촉한 것이 아니라 이남의 대표적인 지도자들과 두루 개별접촉을 가졌다. 홍명희‧조소앙‧김원봉‧백남운‧이영‧엄항섭 등과 개별적으로 2~3차례씩은 만나 의견을 나눔으로써 정치적 행동을 통일시켜 나갔던 것이다. 김일성은 통일전선을 실현하는데서 이날 우익지도자들과 자주 만나 의견 차이를 좁히고 공감대를 넓히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남측 인사들을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집무실이나 관저로 초청해 대화를 나눴다. 특히 홍명희는 남북연석회의에서 큰 역할을 하면서 김일성과 긴밀한 유대를 맺었고 결국 평양에 주저앉아 초대 내각의 부수상에 취임하게 된다.

연석회의와 지도자협의회 성과 다진 경축연회, 쑥섬회동

김일성을 비롯한 북로당 지도부는 5월2일에 경축야회를 여는 것이 좋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계획된 것이 지도자협의회에 참석했던 15명의 남북 요인들의 5월2일 쑥섬회동이었다. 김구‧김규식은 오전에 장대재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마친 뒤 강양욱, 홍기주 두 목사의 안내로 오전 11시가 넘어서 대동강변에서 나룻배를 타고 쑥섬에 왔다. 두 사람 외의 요인들은 모두 대동강 하류의 쑥섬에 30분전쯤 와있었다.… 쑥섬회동은 연석회의와 지도자협의회의 성과를 재확인하는 경축연회 겸 친목회의 성격이 강한 자리였다. 당시 쑥섬에는 유명한 냉면집이 있었는데다가 낚시터가 있어 친선야유회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투망 등으로 숭어를 잡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날 정오부터 오후2시 무렵까지 담소를 나누고 그 뒤에 어죽잔치가 시작됐다. 요인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분들은 직접 투망을 하기도 하고 일부 요인들은 낚시를 하거나 보트를 타기도 했다. 야유회를 겸한 쑥섬회동은 오후 4시를 넘을 무렵까지 계속됐다. 냉면집 근처에 군 병사들이 큰 텐트를 쳐넣고 요인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냉면집에서는 냉면과 쟁반을 준비했고 어죽은 시내에서 별도로 요리사가 와있었다. 

▲ 대동강 쑥섬.[사진 : 상학의 책과 사진 이야기 블로그]

북측은 이날 (쑥섬회동)행사에 대해 통일전선과 관련해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김일성은 훗날 통일전선문제를 언급할 때면 두고두고 정치목적의 실현과 친선도모의 좋은 사례로 쑥섬회동을 지적했다. 이북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당시의 쑥섬회동을 기념하고 통일전선의 의의를 강조하기 위해 ‘통일전선사적지’를 조성했다. 사적지에는 통일전선탑을 세워놓았다. 이곳은 1948년에 김구‧김규식 같은 우익 지도자들이 북측과의 ‘연공합작’에 나섰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남측 지도자들이 앞으로도 북측과 ‘연공합작’해야 한다는 의도를 강하게 품고 있는 사적지이다.

당초의 귀환계획은 5월4일 아침에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측 대표자들이 평양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38선까지 가기로 돼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계획을 바꿔 김구‧김규식 일행은 4일 아침에 자동차편으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남북연석회의를 방해하기 위해 이남에서 올라온 반공청년들과 테러분자들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38선을 넘다가 체포된 사람들도 있었고 일부는 평양까지 잠입해 “남북연석회의는 공산주의자들의 이용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등의 삐라를 뿌리기도 했으며 일부는 체포됐다. 회의 장소였던 모란봉극장을 폭파하려고 현장에서 얼씬거리다 경비원에게 체포돼 미수에 그친 사건까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경비가 삼엄하게 펼쳐졌다. 일부 체포된 연석회의 방해공작대원들을 심문한 결과, 서울 귀환 특별열차를 폭파하려 한다는 음모가 있음을 5월3일 저녁 늦게 알 수 있었다. 내무성 정치안전국이 이 정보를 입수하고 북로당 중앙에 보고했으며 북로당은 이날 밤늦게 5월4일의 귀환 일정을 일부 수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밤중에 김구‧김규식 일행의 비서진을 불러 일정이 변경됐음을 통보했다. 김구‧김규식은 5월4일 아침에 비서진과 함께 자동차편으로 평양을 출발했다. 이날 아침 상수리초대소에서는 주영하와 임해가 배웅을 했고 경호를 위해 내무성 관계자들과 안내원들을 38선까지 수행시켰다. 김구‧김규식 일행은 5월5일에 38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김구‧김규식은 5월6일에 남북연석회의 참가의 성과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북로당 중앙은 공동성명의 내용을 확인하고 내부적으로 만족스럽다는 평가를 내렸다.(끝)

* 박병엽 선생의 구술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의 발췌, 게재를 허락해준 선인출판사와 엮은이들(유영구·정창현)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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