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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연석회의, 역사적인 평양에서의 8일(4월19~26일)

이날(19일 남북연석회의) 예비회의가 오전 11시가 돼서야 소집됐던 것은 이남에서 올라온 정당‧단체들의 일각에서 김구‧김규식측이 연석회의 참가 차 서울을 떠났다는 보도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입장을 폈기 때문이었다. 예비회의에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측이 공식으로 참가하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이미 평양에 들어와 있던 일부 대표자들은 예비회의에 참가했다. 예비회의에서 김두봉이 사회를 봤는데 주로 회의 일정, 주석단 선정문제, 토론자와 축하단 문제. 회의 진행 절차 방법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북로당은 당초 예비회의가 2시간 남짓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했었는데 대표자들의 의견이 분분해 오후4시까지 계속됐다. 예비회의에서의 진통은 이남에서 참가한 일부 정당‧단체들이 몇 가지 사안에 대한 북측 준비위원회의 사전결정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진통은 있었으나 4월19일 오후6시부터 모란봉극장에서 연석회의 본회의를 개최키로 했다. 

남북연석회의 제2일 회의는 4월21일 오전 11시에 시작됐다. 연석회의 일정에서 4월20일 하루를 휴회한 것은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이 연석회의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제2일 회의에서는 남로당 위원장 허헌이 사회를 봤다.(중략) 대표자자격심사위원회의 보고가 있은 뒤 남북연석회의의 기본의제인 남북에 조성된 정세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김일성이 먼저 ‘북조선 정치정세 보고’를 했고, 이어 백남운과 박헌영이 ‘남조선 정치정세 보고’를 했다. 홍명희가 남북연석회의 개최 전에 평양에 도착했더라면 그도 남조선 정세보고에 나서도록 했을 것이다. 홍명희는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 일행의 북행을 위해 마지막까지 서울에서 노력하다보니 제3일 회의가 열린 4월22일에야 회의장에 참가할 수 있었다. ‘북조선 정치정세 보고’에서는 주로 민주개혁과 인민정권 창출의 기반 확립에 관한 것이 주를 이뤘다. 박헌영과 백남운의 정세보고는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유엔 결정과 관련해 미국을 비난하고 단선‧단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한 것이었다. 

(21일 오후)7시 무렵 (2일차)회의 일정을 마치고 곧바로 북조선인민예술단이 준비한 연극 <이순신 장군>을 관람했다. 이날도 연석회의 대표자들은 거의 10시쯤에야 숙소로 돌아가 저녁식사를 했다. 연극공연은 이날 대표자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이순신 장군>을 통해 선보인 이북의 민족예술 열의가 모두에게 감명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남 대표자들은 “북조선의 예술이 소련식으로 ‘붉은 냄새’가 풀풀 날 것으로 생각했다가 합창 무용공연뿐 아니라 <이순신 장군>을 보고 그게 기우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연극의 주요 배역이 모두 해방 후 서울에서 평양으로 올라온 사람들이었으니 남측 대표자들의 감회가 새로웠다고 할 수 있다.

제3일 회의는 4월22일 오전10시 반쯤 열렸다. 이날 회의는 근로인민당의 백남운의 사회로 진행됐다.(중략) 그러던 중 사회를 보던 백남운이 토론을 중단시키고 “김구 선생 일행이 회의장에 도착했다”고 밝히자 장내의 대표자들이 모두 일어나 떠나갈 듯한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중략) 그리고 김구‧조소앙‧홍명희의 연석회의 축하인사가 이어졌다. 김구는 “조국이 분열될 위기에 직면해있는 엄혹한 시기에 남북의 열렬한 애국적 인사들과 정당대표들이 이 자리에 모여 앉아서 조국의 자주적 통일독립을 쟁취하려는 계획을 짜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도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정당, 주의가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현 단계에서는 우리 전 민족의 과업이 통일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다. 통일독립의 최대 장애는 어느 한쪽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최대 투쟁목표는 어느 쪽이든 단독선거를 막는 일이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김구의 축하연설 도중에 박수가 여러 차례 터져 나왔다.

김구 “조국이 없으면 민족도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정당, 주의인가”

이로써 4월22일의 제3일 회의는 막을 내리고 이어서 역시 축하공연이 벌어졌다. 이날 공연은 이색적으로 평양방직공장‧평양제사공장‧곡산공장 노동자서클의 노래와 춤을 곁들인 연합공연이었다. 이남 좌익출신 대표자들은 노동자서클의 공연을 처음 접했기 때문에 감탄을 했다. 공연의 수준에서도 손색이 없어 이남 대표자들을 놀라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구는 4시 이후에 속개된 오후 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오전 회의 중간에 참석해 축사를 함으로써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북로당 지도부는 김구에게 워낙 관심이 높았던 터라 축사 내용도 고무적인 것으로 평가했다. 이에 비해 김규식은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이를 이유로 연석회의장에 참석치 않았다. 북로당 지도부는 김규식의 행동을 두고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인정되지만 회의장에 참석하지 않은 것에는 고의성이 있다고 봤다. 북로당과 선이 닿고 있던 김규식의 일부 측근은 그에게 연석회의에 참가하도록 권유했지만 그는 참석치 않기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김규식은 연석회의가 당초 자신이 주장하던 남북요인회담이 아니라 북에서 차려놓은 ‘잔치’에 불과하다고 판단해 불참했던 것이 분명하다. 북로당은 김규식이 연석회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남북요인회담을 희망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김규식이 너무 미국을 의식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제4일 회의는 4월23일 열렸고 인민공화당의 김원봉이 사회를 봤다.… 이어 홍명희가 ‘전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초안을 낭독했고 이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중략) 결정서에는 조선문제가 유엔에서 조선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불법적으로 결정됐다는 것, 유엔에서 결정한 남조선만의 단독선거 실시와 단독정부 수립은 한민족의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 의사에 배치된다는 것, 남북 전체의 정당‧단체들은 미국의 단선‧단정 기도를 용인하지 않고 외국군대를 철거시키고 통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것 등을 담았다. ‘전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채택에 이어 이날 회의에서는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의 이름으로 ‘전조선 동포에게 격함’이라는 호소문을 채택하고 이를 이극로가 낭독했다. 연석회의에 참가한 남북의 56개 정당‧단체 대표자들이 호소문에 서명하는 것으로 제4일 회의는 끝났다. 

연석회의, 미·소 양군 철수와 5.10단선 반대투쟁 결의

4월24일 하루는 휴회한 데 이어 4월25일 오전 11시에 평양시 인민위원회 광장(현재의 김일성광장)에서 연석회의 경축 평양시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오후4시에는 시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북조선인민위원장이 주최한 경축연회가 열렸다. 평양시민대회는 30만명 이상의 군중이 운집한 대규모 행사였다.(중략) 김일성이 주치한 경축연회는 당시 이북 형편으로선 최대 연회였다. 김구와 김규식도 평양시민대회와 경축연회에 참석했다. 김일성과 김구, 김두봉과 김규식이 헤드 테이블에 나란히 자리잡았다. 경축연회에서 김일성과 김두봉은 38선을 넘는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연석회의에 참가한 남측 대표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축하연설을 했다. 이에 대해 김구·김규식·조소항 등의 답사발언이 있었다. 김일성의 초대연은 거의 7시 무렵까지 계속됐고 공연도 진행됐다.

평양시민대회와 관련해 이 행사에 참석했던 김구가 기자들과 나눈 얘기가 북로당 지도부내에서 논란을 일으킨 일이 있다. 북로당은 김구·김규식·조소앙 등 거물 정치인들이 연석회의 행사와 북측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촉각을 세우고 여론 수집을 하고 있었다.(중략) 아무튼 김구는 30만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해 질서정연하게 시민대회를 진항한 데 감탄했다고 하면서, 다만 시민대회에서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행진한 데에는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김구는 기자들에게 “서울에서 시민대회를 하면서 미국 대통령 트루만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일은 없는데 평양에선 어째서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가. 친소적인 인상이 들어 기분이 언짢다”고 지적했다. 

남북연석회의 제5일 회의는 4월26일에 속개됐고 홍명희가 사회를 봤다. 이날은 5.10단선에 대한 투쟁을 결의하는 순서로 회의를 시작했다. 남로당 위원장 허헌이 ‘남조선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투쟁 대책’이라는 보고를 했다. 투쟁대책보도는 연석회의에 참가한 정당·단체들의 일치된 결의로 남조선의 5.10단선과 단정수립을 반대하는 전민족적 투쟁을 전개하고 이를 위해 투쟁위원회 조직을 만든다는 것, 전조선 인민에게 남조선 단선을 반대하고 보이콧하도록 호소문을 발표하는 등 각종 형태의 투쟁을 모색한다는 것, 미·소 양군의 철수와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양국 정부에 요청서를 보낸다는 것 등을 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보고 및 토의를 거쳐 ‘남조선단독선거반대투쟁전국위원회’를 조직했다.(중략) 단선반대전국투쟁위원회 위원장은 남로당 위원장 허헌이 맡기로 했고, 부위원장과 위원으로 백남운, 엄항섭 등 연석회의에 참가한 정당·단체들의 지도적 인사들 50여명을 구성했다.

연석회의 일정, 외국군 철수·단선반대 투쟁 결의한 26일까지로 봐야

그리고 5일 회의에서는 미국과 소련 군대의 철수를 주장하는 메시지(요청서)를 채택했다. 김책이 메시지를 낭독한 뒤 이것을 전달할 방도를 결정했다.(중략) 미국정부에 보내는 요청서는 서울 주둔 미군사령관에게, 소련정부에 보내는 요청서는 평양 주둔 소련군사령관에게 각각 전달키로 하고 미국 측에 전달하게 위해 사회민주당의 여운홍을 비롯해 근로인민당 기관지의 기자 김원일, 남로당의 서아무개 등 3명을 요청서 전달대표로 결정했다. 이들 전달 대표는 4월27일 특별열차 편으로 평양을 출발해 28일에 미군사령관에게 요청서를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4월27일 오전 11시쯤 여운홍 등 전달대표 3인이 평양을 출발할 때 김두봉, 박헌영 등 남북의 정당·단체 대표들 일부가 평양역에 배웅을 나가기도 했다. 전달대표들은 이날 오후 서울역에 도착하는 즉시 미군사령부로 가서 하지 중장에게 이 요청서를 전달한 것으로 안다. 소련 측에 전달하는 요청서는 주영하가 4월27일에 소련군사령부를 방문해 전달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 남북연석회의의 주요 일정이 모두 끝나게 된다. 회의를 종료하기에 앞서 김일성·박헌영·백남운·홍명희가 나서 회의 마무리 발언을 했다. 김일성은 결론 발언에서 김구의 회의 참가와 한독당의 적극적인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이날 오후 2시쯤 애국가 선창과 김두봉의 만세삼창으로 남북연석회의의 공식일정은 모두 끝나게 된다. 

참고로 일각에서는 남북연석회의의 일정이 4월23일에 끝났다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연석회의의 기본토의는 23일로 대체로 매듭지어졌지만 미국과 소련에 보내는 요청서와 5.10단선 반대투쟁대책과 그 투쟁조직을 만든 것은 26일이었고, 따라서 연석회의 일정은 이날까지로 봐야 한다. 

남북연석회의 막후에서는 서울에서 올라온 성시백선의 남측 인사들이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연락 및 조정 업무를 뒤에서 도맡았다. 한독당의 안우생, 민족자주연맹의 박건웅, 권태양, 근로인민당의 최백근, 그리고 민주독립당의 강병찬 등이 이들이다. 한독당의 엄항섭이나 사회민주당의 여운홍 같은 인사들도 연석회의가 성과적으로 진행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북로당의 주영하와 임해는 조소앙·엄항섭·윤기섭·홍명희·김원봉·김봉준·원세훈 등과 막후에서 활발한 개별접촉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