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으로 본 남북연석회의(2)

4월19일은 1948년 평양에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가 열린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알다시피 남북연석회의는 해방 이후 조선반도에서 통일독립국가 건설 방안을 논의하던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2차 회의가 1947년 9월 결렬돼 빚어진 민족과 국토의 영구분단 위기를 극복하고자 추진됐다. 당시 남북의 자주통일세력(남 41개, 북 15개 정당·단체 대표 695명)은 이념과 정견의 차이를 뒤로 미루고 오직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미·소 양국 군대의 즉각 철수를 촉구한 것은 물론, 미국과 이승만 극우세력의 ‘단선(단독선거) 단정(단독정부)’ 반대투쟁을 결의하고 임시정부 수립 방안을 해방·분단 이후 2년여 만에 처음으로 합의하는 등 역사적 쾌거를 이뤄냈다.

이런 뜻 깊은 남북연석회의 개최 70주년을 맞아 현장언론 민플러스가 당시 막전막후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들을 중심으로 연석회의의 역사적 의의 등을 되짚어보고자 당시 연석회의 현장에 있었던, 조선로동당 부부장직 끝으로 1980년대 남쪽으로 온 박병엽 선생의 구술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선인. 2010년)을 출판사와 엮은이들(유영구·정창현)의 허락을 얻어 4차례에 걸쳐 발췌, 소개한다. 구술록에서처럼 등장인물들에 대한 존칭과 직책은 생략했다. 또 본문 중 괄호( )의 내용은 편집자의 해설이다.[편집자] 

남북연석회의의 전사(前史)-(2)

(북로당에선 김구·김규식이 남북요인회담 제안 서한을 보내오자 긴급대책 수립에 나섰다. 2월18~20일 정치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어 집중 논의했는데 김구·김규식의 서한발송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미군정 개입설 등 갑론을박이 계속되자 이남의 정치상황을 보다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대남연락부장 임해를 서울로 급파했다. 실상을 파악한 뒤 최종 결론을 내리기로 한 것. 2월20일 밤 두 명의 수행원과 함께 평양을 출발한 임해는 서울에서 성시백·백남운·홍명희·김원봉에 이어 김구의 측근인 엄항섭·안우행과 김규식의 측근인 박건웅·권태양을 만나 사정을 자세히 알아본 뒤 23일 평양으로 돌아가 보고했다.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의는 그들의 애국적 결단에 의한 것이라고. 결국 24일 다시 열린 북로당 정치위 확대회의에선 임해의 보고를 수용하고 남북협상을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3월8일 김구의 비서 안우생이 비밀리에 김구의 특사 밀명을 띠고 평양으로 올라와 김일성을 만났던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 사실은 이전에 공개된 적이 없다. 안우생은 평양에 올 때 2월10일 김구가 발표한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성명과 김일성에게 직접 전하는 메시지를 휴대하고 있었다. 이 메시지는 간단한 것이었는데 2월16일 김구·김규식의 남북요인회담 제안 서한에 대한 응답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김일성이 3월9일 북조선민전 25차 회의에서 연설(‘반동적 남조선단독정부 선거를 반대하고 조선의 통일과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을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실은 김구가 안우생을 특사로 이북에 파견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안우생에게 김구의 의도를 상세히 들을 수 있었고, 따라서 합작의 기운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김일성은 안우생과 만나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김구의 확고한 의지에 새삼 놀랐던 것이다.

3월12일엔 이남에서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김창숙·조완구·조성환 등 반이승만 우익 진영의 7인이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이른바 ‘7거두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이 성명은 우익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들이 공조를 취한다는 의사표시였고, 남북협상을 위한 민족자결에 힘을 합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었다. 즉 남북협상을 전개할 이남의 세력규합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3월26일엔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발기인회를 출범시키게 된다. 이 발기인회의 출범은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우익 내지 중간파 정치세력의 광범한 결집체의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첫 발기인은 엄항섭·유림·여운홍·홍명희·김봉준 5인이었다. 발기인회가 만들어진 이후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4월3일엔 협의회를 공식 출범시키게 된다.

3월25일 오전에 북조선민전 중앙위원회 26차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선 4월14일에 평양에서 남북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이 내용을 당일 평양방송으로 발표하고, 이남 정당·단체들에게 초청서한을 보내기로 결의했다(하지만 남북연석회의는 이남의 닷새 연기 제안에 따라 최종적으론 4월19일 개최된다). 평양방송은 3월25일 오후7시부터 매 시간대 뉴스시간에 북조선민전의 채택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게 고함”이란 대남제의서를 보도했다. 방송에서는 시한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초청서한에선 “동의하면 3월31일까지 이에 대한 해답을 해달라”는 단서를 붙였다. 이로써 북측이 공식으로 남북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 1948년 4월19일 남북연석회의에 참석차 북행하던 김구 선생(가운데)이 여현의 38선 푯말 앞에서 비서 선우진(맨왼쪽), 아들 김신(오른쪽 두번째), 유중렬 기자(맨오른쪽)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사진출처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김구·김규식은 3월27일 밤 김일성·김두봉 공동명의의 서한(북로당은 3월20일 특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김일성·김두봉 명의로 김구·김규식에게 공동서한을 보낸 다음 이남의 개별 지도자들에게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요망하는 초청장을 보내기로 했다)을 받고 3월31일 북측의 남북연석회의 개최 제의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발맞춰 한독당·민족자주연맹·민주한독당·신진당 등이 남북연석회의 개최에 대한 개별적인 지지성명이나 연합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런 분위기 아래서 서울에선 3월26일에 발기인회를 출범시켰던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가 4월3일 공식 발족했다. 협의회는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한 연합체 조직의 성격을 띤 것이다. 이남에서 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이북에선 3월27~30일 북로당 2차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도 남북연석회의를 성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대책이 논의됐다.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김두봉의 생각을 정확히 알기 위해 1948년 4월8일 평양에 특사를 보낸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김구의 특사 안경근과 김규식의 특사 권태양이 평양에 파견됐다.(중략) 특사들은 4월9일 주영하의 안내로 김일성과 김두봉을 만나 김구·김규식의 메시지를 전하고 이들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서울로 귀환했다. 김일성·김두봉의 구두메시지는 대략 “민족 앞에 펼쳐진 엄혹한 정치현실 아래서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구국대책을 논의하는 것은 절박한 과제다. 두분 선생이 연석회의에 참석해 논의를 함께 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안경근과 권태양은 통일을 위해 38선을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남은 첫 인물이 됐다.

김구는 특사들의 귀환보도를 받고 남북협상의 북행길에 나설 뜻을 선뜻 밝혔는데 김규식은 사정이 달랐다. 김규식은 4월10일 권태양의 보고를 받고서부터 열흘 동안 북행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 북로당에서는 김규식이 김구와 달리 북행을 주저하는 것은 미국의 집요한 방해책동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군정측이 수시로 김규식에게 정치고문을 보내 “남북연석회의는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전술에 넘어가는 것이니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충고함에 따라 김규식이 그 영향을 받는 게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김구는 남북연석회의가 시작되는 4월19일에 북행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지만, 김규식은 4월18일 열린 민족자주연맹 회의의 결정에 따라 이날 북행의 선행조건 5개항을 휴대한 특사를 평양에 급파했다. 김규식의 2차 특사는 1차 특사였던 권태양과 김규식의 측근이었던 언론인 배성룡이었다.(중략) 특사들은 4월19일 오전에 북로당 대남연락부장 임해와 남북연석회의 준비위원장 주영하의 안내를 받아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집무실에서 김일성을 만났고 이 자리에서 5개항 조건을 김일성에게 설명했다. 김일성은 김규식의 특사들에게 ‘김규식 선생이 제시한 5개항 조건을 무조건 지지하니 김 선생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해 함께 구국대책을 논의하자“는 구두메시지를 전했다. 권태양과 배성룡은 김일성으로부터 구두메시지를 듣고 평양을 떠나 사리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이날 오후 늦게 38선을 넘었던 것으로 안다. 그리고 김규식과 특사들의 요청에 따라 이날 밤 10시에 평양방송을 통해 사전에 약정된 대로 ”모든 게 다 준비됐으니 빨리 오시길 바란다“는 암호방송을 내보냈다.

38선을 넘는 남측 인사들이 모두 별 탈 없이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38선을 경비하던 소련군이나 보안대원들이 미군정 측이 파괴분자들을 잠입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나치게 우려했던 것도 사실이다. 일부 파괴분자들이 연석회의 참가대표로 위장해 38선을 넘다가 적발된 사례가 있었다. 개성 쪽에서 3~4명이 침투하다 적발됐고 다른 곳에서도 한두 건의 파괴분자 적발사례가 나타났다. 아예 평양까지 잠입해 연석회의장에 들어가려다 잡힌 청년들도 몇 몇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수류탄과 흉기로 무장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38선 경비와 남측 인사들의 안내를 맡았던 일부 실무자들이 극도로 긴장해 경직된 태도를 보였고 그 과정에서 연석회의 참가자들과의 마찰도 일부 있었다. 

남북연석회의를 앞두고 평양에서는 때 아닌 벽보지우기 선풍이 불었는데 당시만 해도 반탁의 기치를 높이든 김구를 비난하는 벽보가 평양 시내 곳곳에 나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구와 김규식이 1948년 2월에 남북협상 대북제의 서한을 보내오고 김구의 단선반대 성명이 발표되자 북로당은 2월 중순 무렵부터 김구를 비난하는 모든 벽보를 제거하도록 지시했다. 2월에 한차례 벽보지우기 소동을 벌인 뒤에 4월 들어 남북연석회의 일정을 앞두고 미처 지우지 못한 김구 비난 벽보를 마저 없애고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남쪽 대표들을 환영한다”는 벽보를 새로 만들어 붙이는 소동이 있었다. 평양과 평안남도, 황해도에서 4월 첫째 주에 전 주민들이 벽보지우기와 새 벽보 만들기에 나섰던 것이다. 북로당 중앙은 4월10일경 검열그루빠를 조직해 최종 검열을 하도록 지시했다. 검열그루빠는 38선에서부터 평양에 이르는 구간의 대로변뿐 아니라 골목까지도 벽보상태를 모두 검열했다. 

김구는 4월19일에 많은 사람들의 북행 반대를 무릅쓰고 북행길에 올랐다. 경교장에는 그의 북행을 막으려는 인파가 운집했기 때문에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게 출발하게 된다. 나중에 엄항섭‧안우생 등에게서 들은 바로는 김구 북행의 반대 인파들 중 일부는 미군정이나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단체의 군중들이었다고 한다. 김구 일행은 아침 9시에 출발하려다 지연되어 오후 2시쯤에야 경교장을 출발할 수 있었다. 

김구가 김일성의 집무실을 예방한 것은 거의 (20일)오후6시가 다 돼서였다.(중략) 김일성과 김구는 사무실에서 4~50분 남짓 담화를 나눴다. 김일성은 김구에게 “민족의 앞날을 결정하는 구국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평양까지 오신 노고에 대해 결의를 표한다”고 말문을 연 것으로 안다. 김일성은 김구에게 일제 때 임시정부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줄곧 해온 점에 경의를 표했고, 특히 2월10일 김구가 발표한 성명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몇 번이나 읽어보았다는 얘기도 했다. 그리고 2월16일 남북협상 제의 서한과 특사를 평양에 보낸 용단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시했다. 김구는 김일성에게 자신이 남북협상에 참가하게 된 배경과 이남의 사정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을 꺼냈다. 김구는 “38선을 베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통일을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겠다”는 평소의 지론을 거듭 밝혔다고 한다. 김구는 “서로 선입관을 버리고 백지상태에서 허심탄회하게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자”고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담화가 끝난 뒤 김구는 김두봉의 안내로 다시 상수리초대소로 돌아갔다. 이날 자리가 김일성과 김구의 첫 대면이었다.

김규식 일생은 4월21일 아침에 서울을 출발했다. 김규식의 북행에는 김구의 북행 때와 같은 저지 인파들이 몰려들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100여명이 38선 계선에까지 따라와 환송하기까지 한 것으로 안다. 경찰차가 에스코트까지 했다고 하니 김구 일행의 북행 때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북로당은 나중에 이 사실을 접하고 미군정 측이 김구의 북행과 김규식의 북행을 달리 평가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중략) 민주독립당의 홍명희는 자기 당이 속해있던 민족자주연맹의 지도자 김규식이 북행하도록 하기 위해 서울에 남아 있다가 4월21일 김규식 일행의 출발과 함께 북행길에 오르게 된다. 이것은 홍명희가 김규식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시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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