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예술로 읽다(20)

▲ '금강산가극단' 무용 고려삼신불춤. 2007년

평양의 4월은 축제의 계절이다. 김일성 주석의 탄생일인 ‘태양절’을 경축하는 축하사절이 방북하고, 국가미술전람회가 열린다. 2008년부터 격년제로 개최하는 <4월의 봄 인민예술축전>이 열린다. 5회째 행사인 올해는 4월10일 개막식이 동평양대극장에서 있었고, 국립민족예술단의 개막공연이 있었다. 

국내 예술단체의 축전인 <4월의 봄 인민예술축전>과 함께 북측에서 열리는 대표적인 국제행사가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이다. 지난해 30회를 기념한 노동신문에 따르면 격년제로 열리는 축전 기간 동안 연 1800여개 국가에서 1800여개 예술단이 참가했고, 1만7000여 명의 외국인과 해외동포들이 방문했으며, 2700여 명의 아티스트가 무대에 올랐고, 239만여 명이 관람한 것으로 집계했다. 

김일성 주석 탄생 70돌이 되는 지난 1982년 4월 평양에서 처음 막을 올린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은, '4.15경축 세계 여러 나라 예술인들의 친선음악회'로 시작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1985년부터 정례적으로 열리고 있다. 

지난해 축전에는 러시아 마살리지노브 명칭 국립아카데미 민속합창단과 러시아 스타브로폴리예 국립 카자크예술단, 스페인 플라멩고음악단, 재일조선인예술단, 재중조선인예술단이 단체상을 받았다. 그외 러시아 하바롭스크 극동교향악단 실내3중주단과 프랑스 알베리크 마냐르 실내악단 등이 참가했다. 

예술올림픽이라고도 불리는 예술축전에는 해외동포 조직이 협력하고 있는데,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1955년 5월25일 결성), 국제고려인통일연합회(1989년 11월18일 결성), 재중조선인총연합회(1995년 2월2일 결성), 캐나다조선인연합회(1996년 3월4일 결성), 재도이칠란드동포협력회(1996년 4월21일 결성), 재미동포전국연합회(1997년 1월4일 결성), 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1997년 9월13일 결성)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 축전에 빠지지 않고 참가하는 동포예술단체가 북측 유일의 국립해외예술단인 “금강산가극단”이다. 그래서 폐막식 즈음에 열리는 친선예술축전 참가자들과의 친선연환모임(합동모임)에서 가장 돋보이는 금강산가극단은 내한 공연도 여러 차례가 가진 바 있어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예술단이기도 하지만, 그 역사와 의미는 남다르다.

금강산가극단의 역사는 그대로 재일 조선인의 민족교육과 민족예술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1945년 해방 전후로 재일동포들은 일본 전역에서 국어강습소를 마련하고 우리 말과 글, 그리고 민족문화를 가르치기 시작해 지금의 ‘우리학교’로 발전한다. 그리고 1955년 6월6일 전문예술인 18명이 모여 전신인 ‘재일조선중앙예술단’을 창단하고, 1974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 산하의 금강산가극단으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간략사를 살펴보면 1959년 6월 재일본조선문학예술동맹이 결성되고, 12월 북측으로 귀국 길이 열리면서, 북측으로부터 민족악기, 교측본, 조선무용 기본동작 필름, 무대의상과 소도구 등이 지원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64년 5월25일 양악기로부터 민족악기 편성으로 바꾸어 민족가무단의 체제를 갖추었으며, 1965년 5월 재일조선중앙예술단 회관을 준공했다. 1973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10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해 2개의 금메달을 포함해 12개의 메달을 받으면서 이름이 알렸다. 이 기간 동안 5천명이 출연하는 대음악무용서사시 <조국의 햇빛아래>와 동경 고마자와 올림픽경기장에서 개최한 대집단체조 공연 <영광스러운 조국>이 주요 성과였다.

1973년 평양만수대예술단의 <꽃파는 처녀> 일본 순회공연은 재일동포 사회에 큰 감동과 충격을 주었고, 여기에 고무된 재일조선인예술단은 1974년 4월 첫 번째 ‘조국’ 방문 공연을 하게 되었다. 4월14일 공연을 참관한 김일성 주석은 공연 후 모임에서 피바다식 혁명가극의 하나인 <금강산의 노래> 전습을 약속했고, “재일조선예술인들은 사회주의적 민족예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교시에서 “금강산의 노래 공연을 통하여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과 조국을 사랑할 것”을 주문하면서 전폭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

전습 장소로 지정된 남포예술극장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려는 이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소품 연주와 무용조곡 등의 옴니버스식 공연에 익숙했던 재일조선인예술단은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6월 하순 김 주석 앞에서 그간의 성과를 선보일 수 있었다. 귀국선을 타고 다니며 귀동냥하듯 배운 소품과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을 따라다니며 배웠던 지난 시절의 서러움을 한 번에 날려 보낸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무대를 계기로 재일조선인중앙예술단은 가극단으로 거듭나며 1974년 6월 북측 최고 훈장인 ‘김일성 훈장’을 수상하였고, 마침내 1974년 8월29일 금강산가극단 결단식을 가지게 되었다. 1974년 9월 동경 아사구사국제극장에서 <금강산의 노래>를 선보인 이래 3년 동안 500여 회의 순회공연에서 90여 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1983년 창작가극 <어머니의 노래> 순회공연,  1987년 12월 전설적인 성악가인 정호월 독창회 개최, 1989년 1월 재일조선인 예술사의 산증인인 성악가 홍령월 독창회 개최, 1991년 2월 재일조선인 최초로 2.16콩쿨에서 무용부문 강수내(현 금강산가극단 책임안무가) 입상, 1994년 12월 재일조선인 무용의 대모인 임추자 조선무용발표회 개최, 1997년 6월 북측 지원에 힘입어 동경도 고다이라에 금강산가극단 새회관 건립, 1999년 8월 2.16예술상 수상 기념 최영덕(현 금강산가극단 기악부장) 장새납 독주회 개최, 2000년 12월 한국문화재단 초청 첫 내한공연 등 동포예술사에 새로운 신기원을 만들어가고 있다. 

▲ 국립 고려극장 _ 무용 공. 2014년

필자 초청으로 내한 공연을 2차례나 한 바 있는 금강산가극단 외에 일본 전역에는 예술기동선전대라 볼 수 있는 총련 지방가무단이 있다. 도쿄조선가무단, 기타간토조선가무단, 토가이조선가무단, 교토조선가무단, 오사카조선가무단, 효고조선가무단, 히로시마조선가무단, 규슈조선가무단 등 8개의 지방가무단이 활동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현재에 이르러서 금강산가극단처럼 북측과의 연계 정도가 굳건하지는 않지만, 해외동포사에 이름을 올릴만한 주요 동포예술단체들도 있다. 

지난해 창립 70주년을 맞이해 11월29일 연변체육관에서 대음악서사시 <장백의 노래>를 개최한 ‘연변가무단’이 있다. 1946년 3월에 설립된 연변가무단은 중국에서 가장 일찍 설립된 소수민족문예단체로서 “개혁개방이래 당의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조선민족문화예술을 계승하고 번영, 발전시키는 것”을 취지로 삼아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는 꼴호즈를 중심으로 태동해 활동한 소규모 앙상블인 ‘소인예술단’이 다양하게 활동을 했다. 150여 년 전 생계를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다가 1937년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대지에 내몰린 이들의 후손들이 생산현장을 중심으로 민족혼을 지키고자 만든 것이다. 

전문예술단으로는 필자의 초청으로 2014년 10월9일 국립국악원 예약당에서 내한 공연을 가진 80년 전통의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이 있다. 그 시원은  극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1932년 신한촌구락부 연예부와 9년제 조선중학교 연극부원이 만든 <원동변강조선극장>이다. 1932년 9월8일 원동지방의 고려극장으로 정식 출범하였다.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후 1947년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고려극장이 폐쇄되면서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으로 재결합되었고, 1959년 사할린조선극장을 합병, 1963년 국립극장의 지위를 얻었다. 1968년 수도 알마티로 이전해 “국립조선음악희극극장‘으로 개명하고, 같은 해 ’아리랑가무단‘을 산하 단체로 창설하였다. 2004년 현재의 극장 건물로 입주하였다. 
한편 북측은 해방 이후인 1949년 최초로 대외공연을 개최한다. 최승희무용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구성한 무용극 <반야월성곡>으로 ‘조선방소예술단’이 1952년까지 모스크바 등 러시아 전역에서 순회공연을 한 것이다. 이후 1954년 교통성예술단이 중국에서, 1956년 제5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청년예술단이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 순회공연을, 조선인민군협주단이 월남에서, 1957년 최승희무용단이 소련과 루마니아 등 동유럽 5개 국가 순회공연을 개최하였다. 

해방 후 친일파 단죄를 못하고 친미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권유지와 이념공세에 집중했던 남측과 달리 북측은 대외 정책의 일환으로 해외 동포들에게 자국의 예술가들과 악기와 무용소품 등을 보내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학에 기초한 북측의 민족예술을 전수하고 지원을 이어나갔다. 반면에 상당 기간 남측 정부의 대외 동포정책은 총련과 같은 친북 동포단체의 설립을 막는 것에 치중하는 등 기민정책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생긴 것에는 1988년 열린 서울올림픽이 계기가 되었다.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해외동포들에게 유화정책을 펼치면서 남측의 전통 중시의 민족예술의 전수를 시작했다. 그 결과 오늘날 해외동포 예술단체를 방문하거나 그들의 무대를 볼 때면 남북이 혼재되어 있는 구성과 소품 등에서 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다. 실제 남북의 민간교류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할린에서 민족예술을 올곧게 이어가고 있는 ‘에트노스예술학교’의 한민족예술과를 방문하면 여전히 북측의 개량 가야금과 남측의 전통 가야금이 같이 놓여 있고, 아이들의 무용에서는 남북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3.11대지진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역인 도후쿠, 후쿠시마에 조선학교가 있다. 전국적으로 소식이 알려지자 재일조선인 청년들이 구호물자를 가지고 제일 먼저 여기를 방문했다. 통제를 맡은 관계자의 위험 경고에도 불구하고 현지로 들어가 자원봉사를 시작한 재일동포 청년들이 내세운 구호가 바로 ‘대지가 흔들려도 우리는 간다’였다.

해외동포 예술단의 과거와 현재가 이와 다르지가 않다. 비록 현지화가 된 곳도 있고, 북측과 보다 긴밀한 관계 속에서 활동하는 단체들도 있지만 그들의 속심 깊은 곳에는 민족혼을 지키며 스스로 통일의 가교로 활동한다는 자부심이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남북을 오가고, 동포가 부르면 어느 곳에서나 민요를 부르고 우리 춤을 추고 있는 것이리라.

▲ 금강산가극단 공연 _ 장새납 연주(최영덕). 2006년

https://www.youtube.com/watch?v=oxRX0Tf74I8
어릴적 마음, 금강산가극단 정상진 작곡, 전명화 외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ej_HvRPF14w
우리를 보시라, 금강산가극단 김명현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wxQRwYG6QI4
금강산가극단 2016년 공연 <미래에로> 홍보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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