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예술로 읽다(21)

▲ 유튜브 동영상 캡처

무대예술 중에서 삶에 가장 밀착한 장르는 연극이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인물의 내면이 무수히 보이기 때문이다. 북에서도 이 때문에 연극은 일찍부터 발달해 왔고, 어느 장르보다 선동적이며, 서사적이고 동시에 교양화되어 있다.

그 핵심은 인물의 ‘전형’화이다. 북측 사회과학원이 발행한 문학대사전에 따르면 ‘전형’이란 “생활의 본질과 사회발전의 합법칙성, 시대의 특징을 체현한 예술적 형상”으로, “정한 계급이나 계층의 본질적인 특징을 뚜렷이 구현하고 있는 인물 형상”을 의미한다. 즉 문학과 예술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전형화가 북측 정부가 기대하는 당대에 필요한 영웅상인 것이다.

북측에서 연극은 정부 탄생과 같이 한다. 김 주석의 혁명투쟁을 다룬 <뢰성>(김사량), <조선빨찌산>(김영근), <백두산>(조기천 원작)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구호 아래 작품을 창작했는데, <탄광 사람들>(한봉식>이 대표적이다. 전후 복구 시기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 아래 불후의 고전적 명작이라 칭해지는 <보천보의 홰불> 등을 창작했고, 이 시기 송영, 리동춘, 조령출 등에 의해 다양한 작품이 선보였다. 

1978년은 북측 연극의 전환기로 알려진다. 김일성 주석이 창작했다는 <성황당>을 주체사상에 기초해 재공연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로 북측만의 새로운 연극 양식을 창조해, 이를 ‘성황당식 혁명연극’이라 명명했던 것이다. 

특징으로는, 인간의 자주성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 전형을 창조하고, 종래의 낡은 형식을 과감히 버리고 무대 위에 극적 생활과 사건의 흐름이 마치 관객이 현실을 보듯 입체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형화된 인물의 감정선이 드러나야 하며, 특히 희곡 창작에 있어서 명대사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무대는 자연스러운 전개를 위해 암전이나 막을 내리는 등의 전환을 배제한 ‘흐름식 무대’를 도입해 다장면 연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음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대표적인 것이 ‘방창’이다. 방창이란 무대 뒤에서 줄거리에 얽힌 이야기를 노래하는 ‘시음악적’인 수단으로서 극의 흐름에서 빈틈을 메워주고 장면과 장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대사’를 생활적으로 조직하였다. 북측에서는 연기에 생활 자체를 담아낼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측 연극에서 독특한 장르는 “시극”과 “경희극”이다. 조선대백과사전에서는 ‘시극’은 “시랑송과 극적인 행동으로 생활을 반영하는 극형식으로 기본형상수단은 시랑송이다. 연기자들의 말과 동작은 보통 시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생활환경과 정황을 제시하는데 이바지함으로써 내용을 보충하고 풍부하게 해준다. 시극에서 형상은 강한 선동성과 호소성, 서정성을 가진다. 오늘 우리나라에서 시극은 그의 높은 정치사상적 기백과 전투적 호소성으로 하여 예술선동의 주요한 공연종목의 하나로 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보통강의 서사시>(1971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문화예술의 기초를 문학으로 두고 있는 북측의 문화예술 체계에서 시낭송회는 일상적이다. 

“경희극”은 희극의 한 갈래로 볼 수 있지만, 북측에서 경희극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고 부정적인 형상들을 희화화하여 비판과 개조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1961년 원산연극단에서 제작된 최초의 경희극(리동춘 원작)이자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작품이 식량 증산을 독려하는 내용의 <산울림>이다. 특히 2010년 혁명연극을 주로 공연하는 국립연극극장이 주체가 되어 국립연극단에 의해 재창조된 <산울림>은 “천리마시대 대고조의 분위기를 오늘에 되살려 인민들을 강성대국 건설에 동원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 때문에 경희극을 주변부 연극에서 북측 연극의 주류로 부상시킬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4월29일 첫 공연을 시작으로 5개월 동안 10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180여 회의 공연을 개최하였다. 김일성상을 받았다. 

▲경희극 "오늘을 추억하리" 한 장면. 유튜브 동영상 캡처

김정은 시대에서의 최고의 연극 작품은 누가 뭐래도 김일성상 계관작품인 <오늘을 추억하리>일 것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 중소형 발전소를 건설할 데 대한 노동당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 속에서 발휘되는 어느 한 산간군 인민들의 불굴의 정신력과 뜨거운 향도애를 진실하고 생동한 예술적 화폭으로 펼쳐 보인 작품”으로 선군시대 문학예술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걸작으로 칭송받고 있다. 국립연극단이 1997년 창작해 1998년 상연한 후, 2011년 7월 재공연한 작품이다. 이때 김정일, 김정은 부자의 마지막 동행 관람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조선예술>에는 “우리조국 력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강행군 시기를 반영한 작품으로서 고난의 행군에 대한 추억은 슬픔의 추억이 아니라 신념과 의지의 추억”이라고 평하고 있다. 새 지도자를 맞이한 새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의 전형으로 ‘강신옥’을 전형화하였다.

북측 연극의 성지는 국립연극극장이다. 평양시 중심에 자리 잡은 이 극장의 정면 중앙에는 횃불과 함께 ‘연극’이라는 글자가 부각되어 있어, “인민들의 심장에 불을 달아주는 연극예술의 힘”을 상징하고 있다. 건물 내로 들어가면 북측의 5대 혁명연극인 <성황당> <경축대회> <딸에게서 온 편지> <혈분만국회> <3인1당>을 주제로 한 군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극장에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것은 항일혁명투쟁의 길을 보여주는 철령의 달밤이 새겨진 무대막이다. 620여 석의 객석과 주조정실, 연습실, 분장실 등이 잘 정비된 공간과 깊이와 넓이가 확보된 넓은 무대에는 자동 승강기와 충분한 종횡막과 조명설비 등이 설치되어 있어 다양한 무대 연출이 가능하다. “천년을 책임지고 만년을 보증하자!”는 노동당의 구호 아래 건설된 대표적 문화예술 공간이다. 

이 극장의 상주단체이자 북측 최고의 연극단체는 "당과 수령의 사랑과 영도 밑에 주체적 연극예술발전사에 빛나는 연혁을 아로새겼다"고 평가받고 있는 국립연극단이다. 1946년 5월23일 중앙예술공작단이란 명칭으로 조직돼 그 해 8월28일 <뢰성>을 첫 작품으로 올렸다. 국립연극단은 창단 이후 창작, 공연 활동에서 이룩한 업적을 인정받아 1972년에 북측의 최고훈장인 ‘김일성훈장’을 수훈하였다. 1947년 1월 9일 국립극장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한국전쟁 전후에는 국립연극극장으로 부르다가, 1972년부터 국립연극단으로 개칭한 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국립연극단은 창립 후 현재까지 100여 편의 장막극과 270여 편의 중단막극을 창작 및 실연했다. 특히 고전작품과 혁명연극 등을 창작, 공연함으로써 북한 인민들의 사상을 강화, 교양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희극 <산울림>의 연출을 맡은 차진삼 연출가, 혁명 연극 <성황당>의 주인공인 돌쇠역으로 유명한 김춘남 배우, 구북모 무대미술가 등이 활동하고 있다.

북한 연극계에 최고의 인물은 2004년 1월3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리단이다. 혁명연극의 완성자라 불리는 연극연출가 리단은 1918년 서울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를 중퇴한 후 막노동으로 생활을 꾸려가면서도 독학으로 연극을 공부했다. 1939년 당시 황철이 운영하던 좌익계열의 연극단체인 아랑극장(阿浪劇場)에서 연극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1946년 3월11일 연극인인 황철, 태을민, 엄미화, 최선희 등과 월북했다. 1946년 8월 김사량의 <뢰성>에서 조연을 맡아 북에서 연기생활을 시작했고 1947년 평양시립극장이 생기면서 자리를 옮겼다. 이후 국립연극극장에 배치되어 배우이자 연출가로 왕성한 활동을 한다. 

초기 연출작품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요소와 교조주의적 잔재가 남아 있는 낡은 연출에 빠져있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이후 주체문예이론에 입각해 혁명성과 예술성을 결합하려는 노력을 통해 북측을 대표하는 연출가로 위상을 굳혔다. 그의 대표작이 바로 <성황당>이다.

리단은 1958년 국립연극극장 부총장, 1962년 인민배우 칭호 수여, 1974년 4월 문화예술 부문 첫 김일성상 수여, 1980년 조선연극인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최고인민회의 제3기와 4기 대의원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으로서 정치가로도 활동을 하였다. 1985년 9월에는 남북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에드워드 사이드(Said Edward)는 어떤 문화도 단일하거나 순수하지 않으며, 모든 문화는 상호간의 영향을 통해 혼합되고 변화한다고 지적하였다. 문화의 발전은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신뢰를 쌓아갈 때 가능할 것이며, 비로소 불통이 해소되어 관계의 개선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북에서 열풍처럼 유행하는 노래 <배우자>처럼 ‘호상’(상호) 배우는 기회가 문화로부터 출발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때 가장 생활에 밀착한 연극의 남북교류도 그래서 사상성과 목적성에도 불구하고 더 적극적으로 힘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EhjaYgws8I8

<배우자> 모란봉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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