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담판의 주역, 남일과 해리슨
정전협정과 제네바 회담
정전협정과 한미동맹조약으로 전쟁체제가 완성되다

민플러스는 지난 7월 정전협정 특판을 제작한 바 있다. 특판에 실렸던 원고를 다섯 차례에 나누어 연재한다.

정전70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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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정전협정과 전쟁체제

또다시 엄습해 오는 전쟁의 시간

정전 담판의 주역, 남일과 해리슨

정전협정 마지막 장에 서명 주체가 명기되어 있고 그 하단에 “참석자” 남일과 해리슨이라는 이름과 사인이 등장한다. 남일과 해리슨은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정전회담의 대표였다. 이들은 2년이 넘도록 765차례나 되는 긴 회담을 이어갔다.

▶ 정전협정의 마지막 페이지
▶ 정전협정의 마지막 페이지

많은 이들은 전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을 미국과 중국의 전쟁으로 본다.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한 이후 중국이 사실상 북한을 대신해 전면전을 주도했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정전회담의 대표가 중국인민지원군 소속이 아닌 조선인민군 소속 남일 대장이 수석대표였다는 점에서 이 전쟁을 중국이 주도했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중국이 주도했다면 정전회담 역시 중국군이 대표가 되어야 한다.

정전협정의 공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이승만 정부는 ‘북진’을 주장하며 정전협정 체결에 찬성하지 않았다. 정전회담을 무산시키기 위해 포로로 잡고 있던 북한군을 임의로 석방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설령 이승만 정부가 정전협정 체결에 동의했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군의 모든 작전지휘권은 미군사령관에게 넘겨졌다. 정전협정은 군사 회담이다. 따라서 작전지휘권이 없는 한국군은 서명 주체로서의 자격이 없었다.

그 외 정전협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네 가지이다.

첫째, 정전협정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군사적 성격을 갖는다. 정전협정 상에 명시된 유엔사의 권한은 오직 군사적 범위에 국한한다. 즉 유엔사는 정치적, 행정적 권한을 갖지 못한다. 지뢰 제거 작업은 군사적 성격이기 때문에 유엔사는 권한을 갖는다. 그러나 2021년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당시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집무실을 두는 문제는 행정적 성격이므로 유엔사의 권한 밖이다. 이 문제를 유엔사가 걸고 넘어진 것은 월권 행위이다.

<정전협정 서문>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하기의 서명자들은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서와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 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기 조항에 기재된 정전 조과 규정을 접수하며 또 그 제약과 통제를 받는데 각자 공동 호상 동의한다.

이 조건과 규정들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오직 한국에서의 교전 쌍방에만 적용한다.

둘째, 정전협정이 군사적 성격이라는 점에서 정전협정 상의 군사분계선은 영토선이 아닌 군사분계선일뿐이다. 또한 군사분계선은 육지에서 끝난다. 바다에는 합의된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불안정한 요소는 해상에서 빈번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셋째, 정전협정은 새로운 무기를 들여올 수 없도록 규정했다. 단 파괴, 소모된 무기의 경우 같은 유형의 물건을 ‘1대1’로 교환하는 것은 허용했다. 따라서 1957년 이후 미국의 한반도 핵무기 배치는 정전협정 위반이 된다. 미국은 이 논란을 피하려고 핵무기를 반입하기 전에 해당 조항인 ‘정전협정 13항 ㄹ목’ 폐기를 선언했다. 이때부터 정전협정은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넷째, 정전협정은 3개월 안에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열어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협의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열린 것이 1954년 제네바 회담이었다.

정전협정과 제네바 회담

정전협정 체결 후에도 ‘북진’을 주장하고 있던 이승만 정권은 제네바 회담에 참석하려 하지 않았으나 미국의 끈질긴 설득 끝에 참석했다. 평화협정 체결에 적극적이었던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 당시 협상 대표였던 남일이 참가했다.

제네바 회담은 어떤 결론도 도출하지 못하고 끝났다. 남측 대표였던 변영태 외무장관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며(이 주장은 틀렸다. 유엔은 38선 남쪽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했을 뿐이다) 유엔 감시 아래 북한지역에서만 선거할 것을 강변했다. 그러나 다음날 변영태 장관은 전날 주장을 철회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토대로 하여 남북 동시 인구비례 총선거를 주장했다.

북측의 남일 대표는 북측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우리 국회의원 격)과 남측의 국회의원 그리고 민주주의적 사회단체 대표들을 포함하여 ‘전조선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전조선위원회’가 총선거를 준비하자는 안을 주장했다.

제네바 회담은 무위로 돌아갔고 그 이후 정치회담은 개최되지 않았다. 제네바 회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1948년 남북 연석회의와 1954년 남일의 주장은 거의 유사하다. 이에 반해 남측의 변영태 장관은 남측 주도의 일방적 주장을 내놓았다. 그때까지 남과 북의 통일 관련 합의는 48년 연석회의가 유일하다.

둘째,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미국은 한국의 변영태 장관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에 빠져 있었다. 제네바 회담은 정전협정의 연장선에 있다. 따라서 그 회담은 서명 당사국이 대표가 되어야 했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 해결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이런 미국의 행태는 정전협정 체결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정전협정과 한미동맹조약으로 전쟁체제가 완성되다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3개월 이내에 하겠다’는 정전협정과 달리 미국이 3개월 안에 추진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일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한미관계를 정초한 ‘국부’로 평가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미관계를 주도한 것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이 유일하다. 이승만이 한 것은 한미동맹을 체결해달라는 애걸이었다.

1953년 10월 1일 한미 양 정부 사이에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지만, 그것이 발효된 것은 1954년 11월 18일이었다. 미국 의회가 여러 가지 조건을 달며 비준 동의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가장 불평등한 조약이다. 우리나라 영토에 미군주둔권을 통째로 미국에 넘겨주었다. 이런 방위조약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제4조>

상호합의에 의하여 결정된 바에 따라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許與)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은 한반도 전쟁체제의 완성을 의미했다. 전쟁체제는 북진 통일을 외치는 이승만 정부의 반공반북 정책, 정전협정, 한미동맹조약을 구성요소로 한다. 따라서 반공반북 정책, 정전협정, 한미동맹을 바꾸지 않는 한 한반도 전쟁체제는 계속 된다. 정전 70년을 맞이하는 2023년, 한반도는 새로운 전쟁체제가 구축되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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