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중국대장정(01) - 차마고도 티베트 1번지 샹그릴라

2,200개 도시를 지닌 드넓은 중국, 사마천이 <사기>에서 기록한 기원전 841년 이래 기나긴 역사와 풍성한 문화를 담은 중국. 55개 소수민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족 중심의 나라이자 아편전쟁 이후 1921년 건당과 1949년 건국으로 사회주의 국가로 일신한 중국, 개혁개방 이후의 경제발전으로 세계 최강국(G1)을 꿈꾸는 나라. 수교 이후 한중 관계는 다각도로 변모하고 한류를 매개로 다양한 교류가 이뤄지고 있는 현실에서 중국의 현재와 현장 곳곳을 직접 보고 느끼고 공유하는 작업은 미래지향적이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종명의 중국대장정’을 통해 중국을 이해하는데 한 올 실마리라도 얻게 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문화답사여행이 주는 재미도 녹아있으니 가볍게 읽어도 좋을 듯하다.[편집자]

샹그릴라(香格里拉)는 티베트 말로 ‘마음에 담은 해와 달’이란 뜻이다. 중국어권 특급 가수로 손색없는 왕리훙(王力宏)이 2004년 <신중더르위에(心中的日月)>를 발표했다. 티베트 일대를 여행하며 수많은 민가를 채취해 영감을 얻어 만든 노래다. 달콤한 음색은 ‘이상향’ 샹그릴라로 가는 길을 소풍 떠나는 아이처럼 설레게 하는 읊조림 같다. 여름에 가면 푸르고 겨울에 가면 하얗다. 물론 하늘은 늘 파란데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마다 색감이 다른 오묘한 곳이다.

리장고성(丽江古城)에서 샹그릴라까지는 180km, 3시간 30분 걸린다. 강줄기를 따라 달리다가 산 하나를 넘어야 한다. 지그재그로 산을 오르는 오르막이다. 고개를 넘자 숨 가쁘게 달려온 차를 쉼터가 반갑게 맞아준다. 넓게 펼쳐진 시야를 따라 맞은 편을 바라보면 해발 5,396m의 하바설산(哈巴雪山)이다. 겨울이면 설산의 위용을 곧잘 드러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연두색과 초록색이 엇갈리는 바둑판 밭이다. 누가 더 싱그러운지 다투는 듯한 모습이다. 잠시 쉬어가지만,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다.

▲ 샹그릴라 가는길 (여름)
▲ 샹그릴라 가는 길 (겨울)

점점 티베트 분위기가 풍긴다. 시내로 들어서면 마을 어귀마다 하얀 불탑인 초르텐(mchodrten)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성스러운 물품을 보관하는 성지로 여겨졌다. 지금은 사원 앞이나 광장 등에 만들어 두는데 예불의 의식이 벌어지는 장소이다. 티베트는 양, 돼지와 야크의 세상이다.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임신한 돼지는 제 몸 가누기도 힘든데 왜 어슬렁거리는지 모르겠다.

▲ 거리를 활보하는 임신한 돼지

차를 세우고 식당을 찾았는데 시끌시끌하다. 운이 좋으면 진풍경을 자주 만난다. 마침 결혼식 피로연이 벌어지고 있다. 수백 병이나 되는 맥주를 상 위에 올려놓고 연거푸 축하주를 건넨다. 말끔한 양복과 붉은 치파오(旗袍)를 입은 신랑 신부는 얼굴 가득 미소가 넘친다. 샹그릴라는 디칭짱족자치주(迪庆藏族自治州)에 속한 현이다. 짱족은 티베트 민족을 중국인이 부르는 호칭이다. 티베트 자치의 땅이지만 여느 소수민족 자치가 그렇듯 실질적인지는 다른 문제다. 이미 한족이 자리를 잡고 희로애락을 즐기는 세상으로 변한 지 오래다.

마오뉴(牦牛)라 불리는 야크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 잘 먹지 않는 편인데 동행한 일행도 있어서 주문했다. 부드럽지만 한우보다는 다소 텁텁하다. 쫄깃한 맛의 조림과 담백한 국물이 먹음직스런 탕, 싱싱한 채소를 반찬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후식으로 나온 노란 메밀 빵도 색깔만큼이나 구수하다. 우리가 먹는 메밀과는 조금 다르고 쿠챠오(苦荞)라고 부른다. 보통 ‘타타르 메밀’이라고 부르는데 예부터 타타르 민족이 지나는 초원에 쿠챠오가 자란 것인지도 모른다.

▲ 결혼식 피로연
▲ 메밀 빵

베이징과 가까운 위현(蔚县)에서 쿠챠오허러(苦荞饸饹)라는 메밀틀국수를 먹은 적이 있다. 메밀 반죽을 틀에 넣고 누르면 면발이 주르륵 흘러내려 통 속에서 익는다. 곧바로 그릇에 담아주는 생생한 맛이었다. 지금은 잊힌 ‘우리의 시골’과도 같은 감동이었던 것이다. 지금 타타르 민족은 볼가강 부근에 있는 러시아 연방 타타르스탄 자치공화국을 이루고 있다.

샹그릴라는 원래 중덴(中甸)이란 지명이다. 2001년 중국 정부는 샹그릴라로 이름을 바꾼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턴이 1933년 발표한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하는 가상의 마을이 현실로 등장한 것이다. 이름을 바꾼 후 관광 수입으로 지역이 크게 발전했다. 드넓은 중국에서 왜 꼭 이곳이어야 했을까? 그럴만한 명분이 있긴 했다. 이곳에는 고성이 하나 있는데 두커쭝(独克宗)이라 부른다. ‘바위에 세운 성’이자 월광성(月光城)이다. 푸얼차(普洱茶)를 차마고도(茶马古道) 따라 운반하는 마방에게는 티베트로 진입하는 첫 마을이다. 당나라 이후 차와 말이 교환되었으니 천 년 전에는 티베트의 영향 아래 있었다. 지금은 행정 지역으로 윈난에 속한다.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리장의 나시족(纳西族) 토사(土司)가 힘을 길렀다. 샹그릴라에 진출해 또 다른 요새를 지었는데 니왕쭝(尼旺宗)이라 부른다. 일광성(日光城)이란 뜻이다. 두 성곽이 짝을 이루게 된다. 바로 ‘해와 달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월광성만 남았지만 ‘마음속의 해와 달’이라는 샹그릴라 위치를 특정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역사 속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 티베트 사원 송찬림 전경

샹그릴라에는 윈난 최대의 티베트 사원 송찬림(松赞林)이 있다. 보통 송찬림사라고 알려지는데 ‘송찬’은 천상에 있는 신이 거처하는 지방이고 ‘림’은 사원을 뜻한다. ‘사’를 굳이 쓰는 이유가 있겠지만 ‘역전 앞’과 비슷하다. ‘작은 포탈라 궁’이라는 호사를 누리는 사원이다. 고개를 끄덕일 만큼 독특하고 웅장한 자태를 품고 있다.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어 정문에서 바라보면 하늘색과 어울려 화사하기조차 하다. 구름이 두둥실 스치면 풍성하기까지 하다.

송찬림에는 계율을 받은 승려가 거주하는 캉찬(康参)이라는 건물이 8채 있다. 연꽃의 여덟 잎을 상징한다. 승려 20여 명씩 공동생활을 하는 미찬(密参)도 많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광장으로 들어서면 본전인 자창(扎仓) 앞에 이른다. 자창대전은 승려의 학원으로 1,600명을 수용할 만큼 큰 공간이다. 왼쪽 오른쪽에는 각각 티베트 불교의 종교개혁가이자 최대 교파인 겔룩파의 창시자인 총카파(宗喀巴) 대전과 석가모니 대전이 위치한다. 석가모니 불상에게 봉공하면 반드시 응답한다고 알려져 있다. 1936년 여름 장정 중이던 홍군의 허룽(贺龙) 장군도 이곳을 찾았다. 수많은 병사를 거느린 장수가 전쟁 중에 참배했다면 덕장이라 할만하다.

▲ 송찬림 자창대전
▲ 법륜과 사슴 한 쌍

5층 높이 대전 지붕은 화려한 장식으로 눈부시다. 비첨에는 맹수가 노려보고 있고 원통의 마니룬(玛尼轮)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법륜 옆 사슴까지 햇살의 울림이 상당하다. 모두 도금으로 장식한 까닭이다. 티베트 사원 지붕에 법륜과 함께 등장하는 사슴 두 마리는 석가모니의 최초 설법지인 녹야원을 상징한다. 수레바퀴처럼 부처님 말씀이 널리 온 사방에 퍼져나갈 듯 송찬림 지붕은 유난히 금빛 찬란하다.

총카파에 의해 발전한 겔룩파 법왕이 달라이라마(达赖喇嘛)다. 노란 모자를 쓰는 황모파라고 부른다. 티베트 불교에는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지만, 겔룩파가 가장 많다. 1959년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라마 14세 텐진가쵸(丹增嘉措)는 현재 대부분의 티베트 승려와 서민의 존경을 받는다. 눈 부시게 파란 하늘 아래에서 지켜온 역사와 문화를 남기고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송찬림은 달라이라마 5세 말기인 1681년 준공된 사원이다. 우여곡절 속에도 달라이라마의 지위를 간직하고 온 고난의 역사는 차분하게 되돌려 볼 필요가 있다.

서서히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따라 고성으로 향한다. 고성은 거북처럼 야트막한 구이산(龟山)과 접해 있다. 산자락에 대불사라는 자그마한 사원이 있다. 사원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도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마니룬(또는 마니차)이 나타난다. 여섯 글자의 주문인 ‘옴마니밧메훔’을 새긴 원통이다. 대부분 손에 쥐고 다니거나 사원이나 광장에 아담하게 설치돼 있다.

▲ 두커쭝고성의 거대한 마니룬

높이가 21m, 지름이 6m에 이르고 무게가 60톤이나 되니 열 명 정도가 돌려도 끄덕하지 않는다. 여덟 가지 길상인 소라, 깃발, 매듭, 연꽃, 항아리, 물고기, 양산, 법륜이 차례로 새겨져 있다. 사람들이 모여 영차 하며 힘을 쓰면 서서히 돌아가는데 모두 신바람이 난다. 불자가 아니어도 한바탕 신나게 돌리고 나면 온갖 시름을 씻은 듯하다.

고성으로 들어서면 왁자지껄하다. 옹기종기 모여 살던 서민적인 마을과는 사뭇 다르다. 세계적 관광지로 이름을 떨치고 있으니 객잔, 까페, 공예품가게, 식당이 즐비하다. 처음 고성에 갔을 때가 2013년인데 이듬해 1월 11일 새벽 커다란 화재가 발생했다. 한 객잔 주인이 만취 상태에서 자던 중 침실 난로에서 발화했다. 목조건물인 고성은 순식간에 큰 피해를 봤다. 2016년 1월과 8월에도 다시 갈 기회가 있었다. 이제 다시 복원돼 옛날의 화려했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고성에 밤이 오면 카페에서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오고 밤 늦도록 이상향이라는 착각이어도 좋은 시간이 흐르고 흐른다.

▲ 고성의 밤

러시아인 피터 굴라트는 1955년 출간한 <읽어버린 왕국>에서 ‘수많은 말발굽과 마방 무리로 넘쳐났다’고 고성 분위기를 기록하고 있다. 차마고도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때이다. 지금은 흔적이 많이 사라졌지만, 차를 싣고 티베트로 향하는 마방의 안식처이던 고성이다. 관광의 성지라고 해도 과거의 흔적을 다 태워버릴 수는 없다. 여전히 티베트의 향기가 고성 곳곳에 풍긴다. 마음속에는 어떤 해와 달이 뜨는지, 향내 나는 추억을 담으며 늘 떠오르는 생각이다.

 

글쓴이 최종명

본적은 충북 남한강 수몰 지구 청풍이다. 1963년 강원도에 있는 태백산 광산촌에서 출생했고, 서울로 유학 와 중곡초등학교를 마친 후 부산으로 가서 항도중학교와 배정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2년에 서울대 농대에 입학했으나 1984년에 다시 한양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때는 학생 운동에 몰두했으며, 1987년부터는 노동 현장에 투신했다. 1991년 1월 서울경찰청 대공분실로 체포되어 왔고, 국가보안법 등 위반으로 1년 동안 수감되었다가 출소했다. 이후 군 복무와 복적을 거쳐 10여 년 만에 대할 졸업장을 받았다. 1994년 인천정보통신센터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인터넷과 미디어에 종사하다가 2001년 북경 출장으로 중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2004년에는 중국문화체널 차이나TV를 설립해 부사장을 역임했고, 2005년에는 중국전매(傳媒)대학 한어(漢語)반에서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중국 발품 취재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중국 도시 300여 곳을 다녔고, 각 지역의 역사, 문화, 생활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다. 저작으로는 ‘꿈꾸는 여행, 차이나’(2009)와 ‘13억 인과의 대화’(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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