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중국대장정(06) – 고향, 루랑진, 거백림 지나 바이까지

며칠 내내 화창하더니 보미(波密)의 아침은 운무를 몰고 온다. 구름과 안개가 경쟁하며 땅으로 내려앉는다. 백조처럼 팔룽짱보(帕隆藏布) 강변으로 내려온 하얀 색감은 우아한 비상과 착지로 은근하게 날아다닌다. 도술을 부리듯 설산을 휘감고 돌기도 한다. 땅과 산을 직선으로 가르며 계속 따라오고 있다. 번뇌조차 조용히 침잠하는 아침, 새조차 소리를 잊은 듯 고요하다. 온통 새하얀 세상이 된 덕분에 마음은 더없이 상쾌하다.

1시간 채 지나지 않아 고향(古乡) 마을에 도착한다. 보미 현의 직할 향이다. 우체국과 위생병원이 있는 건물 앞에 ‘古乡’을 새긴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이 있는 대도(中国最美景观大道)’는 국도318번 도로다. 며칠 동안 지난 온 길이라 익숙하다. 보미를 티베트 말로는 ‘보워(博窝)’라고 읽으라고 친절하게 적었다. 아름다운 길 위의 ‘고향’의 별명도 두루 적혀 있다. ‘빙하의 마을, 티베트 왕의 고향, 티베트의 스위스, 설원의 강남’.

▲ 운무 낀 보미의 아침
▲ 운무와 설산

수많은 빙하가 설산마다 머리를 내밀고 있는 곳이다. 스위스처럼 아름다운 빙하 마을이며 티베트 젖줄 얄룽짱보(雅鲁藏布)의 남쪽이기도 하다. ‘고향’의 강렬한 인상은 최초의 티베트 왕 ‘네치찬보(聂赤赞普)의 출생지’가 풍기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천신(天神)의 아들로 하늘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온 네치찬보를 12명의 무사(巫師)는 수령으로 영접했다. 기원전 360년 전후에 발생한 역사는 곧 건국신화다. 씨족 중심의 부락을 연맹체를 발전시킨 고대국가 토번(吐蕃) 왕의 출현이다.

‘찬보’는 용감무쌍한 사내라는 말로 정교합일의 법왕(法王)을 뜻한다. 원나라 말기에 편찬된 <왕통세계명감(王统世系明鉴)>에 따르면 토번 왕조는 ‘네치찬보 이후 26대를 이어’ 왔다. 왕은 언제나 ‘본교(本教)를 통해 국정을 유지했다’고도 전한다. 티베트의 ‘원시 불교’인 본교는 하늘과 땅, 지하 세계로 나누고 해와 달, 별이나 호수, 바람, 설산 등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법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신화다.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천장(天葬) 의식이야말로 지극히 티베트다운 일이 아닐는지.

▲ 최초의 티베트 왕 네치찬보의 고향

티베트 역사에서 토번은 흔히 서기 618년부터 약 220여 년을 통치한 왕국으로 알려졌다. 당나라 시대 티베트를 통일한 강력한 통치자 송첸캄보(松赞干布)는 토번의 33대 왕이다. 당나라와 인도의 공주와의 결혼 후 선진 문물과 문화를 받아들여 정교 합일의 토번을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티베트 불교는 혼돈의 시대를 겪지만 종교개혁가 쭝카파(宗喀巴)가 등장해 겔룩파(格鲁派)를 창립하면서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달라이라마(达赖喇嘛)는 겔룩파의 최고지도자로 16세기에 이르러 더욱 세련된 종교 체계를 세우고 통치 기반을 수립하게 된다. 티베트 역사를 생각할 때 ‘고향’이 배출한 법왕의 근원을 따져 보는 것도 재미있다. 여기는 네치찬보의 고향이다. 이제 곧 수도 라싸에 들어가 달라이라마를 만나게 된다.

▲ 비포장도로 공사 중
▲ 차마고도를 운전 중인 티베트 운전사

‘고향’ 표지판 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다가 주민에게 혼났다. 신성한 법왕을 멸시한 것은 아니었는데 결례는 맞다. 서둘러 운무 가득한 길을 떠난다. 질퍽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다가 굴착기 공사로 외길에서 잠시 멈춘다. 대형 트럭이 좁은 길을 비집고 지나가려니 한참 걸린다. 도로가 반듯해지면 덜컹거릴 일이 없겠지만, 오지로의 여행이 주는 질펀한 체험은 사라지지 않을까?

통맥대교(通麦大桥) 앞에 잠시 멈춘다. 며칠을 달려온 운전사도, 흙탕물을 지나온 4륜 구동 지프도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 찌푸린 날씨 때문인가? 운무에 휩싸인 여행자에게는 신선하고 우아해 보이는 뿌연 하늘이 운전대를 잡은 그에게는 유쾌할 리가 없을 터. 여전히 비포장과 공사 중 도로를 어렵사리 질주한다. 2시간을 달려 루랑(鲁朗)에 접어들어서야 순조롭게 쌩쌩 달린다.

▲ 두 강이 만나는 통맥대교
▲ 석과계 요리의 고향 루랑

루랑은 ‘용왕이 사는 골짜기(龙王谷)’라는데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도 있다. 3km 거리에 있다는 화해목장(花海牧场)에서 말을 타고 놀아도 좋을 듯하다. 강을 끼고 있는 촌락, 계곡이 흐르는 목장이자 바다와도 같이 수많은 꽃이 만발한 스위스 같은 풍광이다. 덥수룩한 마부 사이에 소박하면서도 예쁘장한 아가씨 마부의 미소를 따라 준마에 올라타고 싶다. 예정에는 없지만 마방이 수없이 지나던 길을 따라 달리고 싶었다. 순간 허기를 느낀다.

▲ 루랑 목장의 마부 아가씨
▲ 석과계 요리

루랑에 오면 먹어보지 않으면 안 되는 요리가 있다. 석과계(石锅鸡)다. 농민들이 영계에 삼과 천마 등 약재를 넣고 푹 고아 먹던 음식이다. 1999년 루랑에서 27년을 생활한 충칭 사람, 허다이윈(何代云)이 상품화했다. 충징에서 개업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루랑 사람들이 즐겨 먹던 그대로의 맛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정통’ 입맛을 무기로 루랑 마을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닭고기를 먼저 먹고 국물에 야채와 버섯 등을 넣어 샤부샤부처럼 먹는데 꿀맛이다. 역시 닭은 담백한 국물 맛을 내기 좋은 재료다.

▲ 루랑 목장의 말
▲ 도로 변의 야크

운무도 사라지고 조금씩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길도 훨씬 좋아져서 평탄하게 질주로 이어진다. 차창 밖으로 사라지는 바람에도 여유를 가지고 손짓을 할 수 있게 된다. 빠르게 달리다가 반대편에서 대형차량이 오면 잠시 서행을 한다. 갑자기 창 밖으로 검은 물체가 나타나 잠시 놀랐다. 도로 옆 언덕 위를 어슬렁거리는 야크였다. 역광이라 실루엣으로 드러나지만, 뿔과 머리도 선명한 야크다. 다리도 튼튼해 보인다.

다시 2시간을 달려 바지촌(巴吉村)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리자 마을 사람들이 잔뜩 몰려든다. 어른, 아이 모두 20여 명이 넘는다. 환영 인사는 아니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여행자에게 공예품이나 약재 등을 팔기 위해서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수령의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거백림(巨柏林)이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세계백수왕원림(世界柏树王园林)이다. 20만m2 너비의 산에 평균 높이 30m가 넘는 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 거백림의 세계백수왕

숲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세계백수왕(世界柏树王)’이 우뚝 나타난다. 50m 높이의 꼭대기가 보일락말락 하고 둘레는 14.8m, 어른 10여 명이 껴안기에도 벅차다. 무엇보다 수령이 무려 3,234년이다. 모세의 출애굽, 중국 주(周)나라 건국보다 더 ‘연세가 드신’ 나무다. 화석이 되고도 남을 나이에 울창한 가지와 탱탱한 뿌리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니 ‘장수로세’라는 말이 저절로 터진다. 이건 기적이기도 하다. 신화인가?

신수(神树)라 부른다. 당연히 성지(圣地)다. 기원전 1,200여 년으로 거슬러 오른다면 아마도 티베트 전통신앙이자 원시 불교인 본교와의 긴밀한 교감이 보일 듯하다. 석가모니 전생에서 사부로 등장하는 본교 창시자 센랍미우체(辛饶米保, Senrab Miwoche)의 생명과 영혼이 깃든 나무로 불린다. 오색찬란한 다르초를 휘감아 걸었으며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얀 스카프인 카딱(哈达)으로 치장을 했다. 숲 전체가 티베트 불향이 나부끼고 있다. 나무 사이로 흔들리는 다르초는 언제까지 제자리를 지킬 것인가? 본교의 생명이 티베트 불교에 고스란히 전달되듯 나무는 굳건하게 버틸 것이다.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광채를 발산하는 듯하다. 나무의 왕 앞에서 점점 고개를 숙이게 된다.

▲ 50m 높이의 세계백수왕
▲ 세계백수왕 앞에서 노는 티베트 아이들

바닥에 앉아 나무를 올려다본다. 햇살도 따뜻한 포근한 자리에 여전히 사람들이 맴돌고 있다. 아이들이랑 말을 건네고 장난을 친다. 티베트 말을 배워본다. 우선 숫자부터 물어본다. ‘칙, 이, 쑴, 씨, 응, 룩, 뒨, 계, 구, 쭉’, 1부터 10까지 대충 배웠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수줍게, 빠르게 말하니 여러 번 물었건만 아리송하다.

두 아이가 다소곳하게 일어나 환영 인사를 알려주기도 했다. ‘자시델레(扎西德勒, tashi delek)’, 외치며 환하게 웃는 아이들 모습이 할아버지 앞 재롱과 닮았다. ‘안녕하세요’와 ‘어서 오세요’에 더해 축복의 말까지 두루 담긴 인정미 넘치는 인사말이다.

▲ 환영 인사말을 가르쳐 주는 티베트 아이들

아이들이 서서히 본색을 드러낸다. 그런데도 아이들도 순박하고 물건 값도 적당하다. 공예품과 특산품 가게를 운영하는 엄마 대신에 장사를 하러 따라다닌 것인지, 함께 논 것인지 모르지만. 고산지대에서 생산되는 설국(雪菊) 차 한 통을 샀다. 100g에 50위안이다. 일행들도 너도나도 한두 개씩 샀으니 ‘미소’ 전략이 꽤 먹힌 것이다. 거백림을 떠날 때까지 줄기차게 따라오는 귀여운 상술,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들이 고맙다. 해맑은 미소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듯하다.

거백림에서 5km 정도 떨어진 린즈지구(林芝地区) 중심지 바이(八一)로 들어간다. 해발 2,900m에 위치하며 인구 3만 5천명이 사는 번화한 마을이다. 군대가 주둔하는 도시로 라싸까지 불과 400km다. 티베트 남부의 물류와 유통 중심지다. 온갖 특산품이 모이니 좋은 상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 고원지대에서 생산되는 신기한 약재나 차도 많다.

▲ 티베트 남부 린즈지구의 중심지 바이
▲ 티베트 샤프란 장홍화

천지조화이자 생명의 근원이라는 동충하초(冬虫夏草), 장어마(藏御麻)로 격상된 천마(天麻), 장수의 원천 정화진용연수원(精华尽溶延寿元)이라는 영지(灵芝) 등 건강식품이 수두룩하다. ‘체내 쓰레기 청소’에 탁월한 티베트 샤프란 장홍화(藏红花)도 새빨간 꽃술을 드러내고 있다. 장홍화는 품질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1g 단위로 판다. 손으로 조심스레 딴 꽃술이니 비싸도 할말이 없다. 얼핏 보면 말린 고추를 가늘게 썰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꽃술 몇 개를 우려내면 투명한 핏빛처럼 맑다.

운무를 헤치고 티베트의 ‘근원’을 생각해본 하루였다. 장홍화 한 잔 마시며 차마고도 질주로 쌓인 피로를 풀어본다. 티베트 인사말이 자꾸 입안에 맴돈다. 맑은 눈망울을 지닌 티베트 아이들의 애틋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자시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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