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중국대장정(03) ; 천년 염전을 터전으로 살아온 민족과 천주교 성당

티베트에 들어서면 마을에서 가장 좋은 호텔을 찾으면 마음이 놓인다. 최고의 호텔에서 묵는다는데 불만을 가질 사람은 없다. 간밤에 꼬불꼬불 산길을 20분이나 내려와 야외 온천으로 유명한 취쯔카(曲孜卡) 향(乡)에서 하루를 묵었다. 란창강(澜沧江) 줄기에 섭씨 80도까지 오르는 온천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설산 아래 살아가는 사람에게 몸을 녹일 수 있는 온천이 곁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천 년 역사를 품은 소금밭 옌징(盐井)의 아침이 밝았다. 간밤에 내려갈 때는 어두워 볼 수 없던 길을 가파르게 오른다. 지난밤에 이곳을 내려왔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염전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는 차마고도 문화전시관이다. 차를 싣고 가는 말과 일심동체인 사람을 조각해놓았다. 한눈에 봐도 ‘차마고도’를 실감 나게 만들었다. 조각상만 봐도 험난한 여정이자 혈투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경외심이 일어난다. 끌고 밀고 가야만 하는 길, 영양분인 차의 공급을 위한 절체절명의 길이었다. 차마고도의 생명이라 일컫는 소금이 바로 이곳에서 생산된다.

▲ 염전 입구 차마고도 조각상
▲ 공사중인 염전가는 길

염전으로 가는 길이 도로 공사 중이다. 우리나라 방송국의 다큐멘터리로 이미 잘 알려진 염전을 향해 가는 길이야말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가 컸다. 자연스레 차마고도를 걷게 됐다. 느긋하게 주변 풍광도 구경하고 염전과 오랫동안 호흡할 수 있다니 금상첨화다. 초록으로 무성한 능선에 옹기종기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길을 따라가면 연붉은 흙으로 덮인 험준한 산이 병풍처럼 나타난다. 더 멀리에 보이는 산에는 황토가 선명하다. 수억 년 전 시차를 두고 차례로 융기를 연출한 흔적이다. 소금밭을 가기도 전에 벌써부터 신비로운 절경에 가슴이 설레게 된다.

공사 현장을 돌아 나가니 멀리 염전이 보이기 시작한다. 에스(S) 자로 흐르는 강물은 마치 홍색과 황색을 섞고 다시 물을 많이 탄 듯한 빛깔로 유유히 흐른다. 강 너머로 건너가는 다리가 두 개 놓여 있고 염전도 또렷하게 보인다. 건너편 마을에는 초록이 무성하면서도 아담한 나무가 자라고 있다. 여러 가지 은은한 색감이 잘 어울린 한 폭의 이국적 산수화처럼 보인다.

▲ 염전을 배경으로 한 컷

지금도 재래식으로 소금을 만든 흔적이 여전하다. 며칠 동안 많이 내린 비로 염전에는 일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 소금이 맺힌 채 남아있기도 하고 물을 고인 우물도 몇 군데 보인다. 해발 약 2,300m에 위치하는 고원이면서도 온대성 기후와 연평균 강수량이 겨우 450mm 정도, 일조량이 풍부한 자연조건이 차마고도 최고이자 유일한 소금 생산지가 된 것이다.

신기한 점은 토양과 산세에 따라 홍염과 백염 두 종류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염분을 머금고 융기한 땅에 설산이 만나 이뤄진 천연의 조화가 아닐 수 없다. 매년 3월부터 소금 생산이 가능해지는 까닭은 점차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설산이 녹은 물이 풍부한 수량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강 서쪽은 지세가 완만해 염전이 넓게 형성되고 손쉽게 많은 양을 거두게 되는데 주로 홍염을 생산한다. 동쪽은 가파른 형세라 염전이 협소해 결정이 잘 맺어지지 않고 주로 백염이 생산된다. 그래서 생산량이 많은 홍염이 백염보다 가격이 더 싸다.

▲ 염전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마을

강물이 세차게 흘러간다는 것은 그만큼 협곡이 깊다는 뜻이다. 나무로 기둥받침을 쌓고 그 위에 층층 만들어진 염전까지 지하수를 끌어올려야 한다. 가장 힘겨운 노동이 바로 물통에 이고 소금밭으로 이동하는 일이다. 그러면 햇빛의 도움으로 천일염을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원시적이다. 지금도 예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변함없이 이뤄지는 일. 자연환경이 만든 이런 제조방식은 유일무이하기도 하지만 1,300여 년이나 줄기차게 유지됐다.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보물이 2008년 중국 국가급무형문화재로 보존되는 것은 당연하다.

옌징이 티베트 땅이어서 티베트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주민들은 나시족(纳西族)이 훨씬 많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1세기경 티베트 왕 게사르(格萨尔)와 나시족 왕 창바(羌巴)가 염전 쟁탈전을 벌인다. 게사르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창바의 아들 유라(友拉)를 생포한다. 이후 유라는 게사르 왕의 충직한 신하가 됐고 염전을 하사 받는다. 두 민족 사이의 조화를 상징하는 미담인지 모르나 ‘티베트 땅의 나시족 염전’을 이해하는데 그다지 충분한 설명은 아닌 듯하다.

▲ 천년 염전
▲ 염전 자다촌 가정집

다리를 건너 자다촌(加达村)으로 들어선다. 8월의 여름 마을은 한산하다. 아버지와 아들만이 집 안에 있다. 차를 내주는 아버지는 앞니가 빠진 잇몸을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다. 천연의 소금처럼 방부제 하나 없는 해맑은 미소다. 수줍음이 많은 아들 녀석은 말도 없이 시무룩하더니 사탕 하나 받아 들고서야 겨우 눈을 마주친다. 개구쟁이처럼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데도 이방인 앞이라 그런지 낯을 가린다. 친해지기까지 이 세상 아이들은 모두 비슷한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보다.

1시간 반이나 걸어 들어온 마을이다. 더운 날씨에 다시 나갈 생각을 하니 걱정이었는데 마침 마을의 청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갈 생각을 할 때 어디선지 꼬마 녀석이 뛰어온다. 한 손에 소금을 한 봉지 들고 사라고 한다. 1kg이나 되는 양을 10위안 주고 샀다. 외지인이 왔다는 소식에 집에서 한 움큼 집어 왔던 게 아닐까 싶다. 그냥 먹어도 되냐고 했더니 채소나 고기 요리할 때 넣어 먹으라고 한다. 정제가 안 된 자연 그 상태이니 그럴 듯싶다.

마을을 벗어나 공사 중인 도로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빠른 속도로 돌아온다. 뒷자리에 앉아 흐르는 강물과 다양한 색깔을 지닌 산을 파노라마처럼 바라본다. 정말 신비한 느낌이 드는 지방이다. 천일염을 만든 지혜가 숨은 이 산하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 아닐까 싶다. 강 너머 푸른 나무가 자라는 마을에서 한 달 정도 머물며 세상사 다 잊고 ‘도’라도 쌓고 싶어지는 풍광이다. 게다가 쑤여우차(酥油茶)에 짭짤한 맛을 선사한 고마운 자연이 아니던가?

▲ 공사장에서 만나 꼬마 아가씨

공사장에 아빠를 따라 나온 꼬마 아가씨가 너무 귀엽다. 동그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띠고 앉았는데 우리 시골의 순박한 아이와도 닮았다. 마침 방학이어서 놀러 나온 것이다. 산도 들도 아름다운데 꽃도 따고 나비도 쫓고 뛰어다니며 놀면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언뜻 든다. 여행 온 이방인의 가벼운 오만이라고 금세 자수한다. 마냥 미소만 짓고 있길래 중국어로 말을 건네본다. 다행히 표준어로 말이 통해 이런저런 대화가 가능하다. 한국사람이라고 했더니 환하게 웃는다. 한국드라마를 봤다고 자랑도 한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빠도 마냥 웃는다.

점심은 지방 특산인 국수를 먹었다. 큰 들통에 국수를 끓인 후 작은 그릇에 담아 준다. 그런데 조약돌을 한 움큼 담아서 함께 가져온다. 돌을 반찬으로 먹으라는 것인가? 국수의 이름을 몰랐다면 더 놀랐을 것이다. 국수 이름이 자자멘(加加面)이다. ‘더하다’는 가(加)를 중복으로 붙이다니 의아하다.

▲ 옌징 국수 자자멘
▲ 국수와 함께 나온 조약돌

그릇에 담긴 국수를 후루룩 한 입에 먹고 나면 다시 국수를 더 담아준다. 먹고 또 먹고 하다 보면 몇 그릇 먹었는지 서로 모르게 된다. 한 입 먹고 돌 하나를 끄집어 내놓는다. 그렇게 매번 돌로 표시를 한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맛이라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함께 내온 돌 개수만큼 국수를 먹으면 자기 딸을 내준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딸 이야기가 전설이라면 상금은 현실이다. 어느 가게는 지금껏 최고 기록이 147그릇이고 기록을 깨면 500위안(약 8만 5천 원)을 준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돌을 씹어먹을 정도의 식성이라면 딸을 주고 싶지 않을까? 그만큼 일도 잘할 터이니 말이다.

나시족이 사는 마을이라는 것 외에 티베트답지 않은 것이 옌징에는 또 있다. 바로 천주교당(天主教堂)이다. 지금도 상당수 주민이 천주교를 믿고 있다니 그저 유적지로만 남은 성당이 아니다. 티베트에 남은 유일한 성당이기도 하다. 1865년 프랑스 신부 삐에뜨(Biet)가 세웠다. 정교합일의 땅 티베트 중심에서 도망쳐 변경인 옌징으로 후퇴한 삐에뜨는 마을 주민의 병을 치료해주며 차츰 신임을 얻어 성당을 세웠다. 포도가 많이 생산되는 것을 보고 프랑스 와인 제조법도 알려주는 등으로 포교에 성공한 것이다.

▲ 옌징 천주교당 십자가 창문
▲ 현지화 된 성당 건축 문양

그렇지만 티베트 불교와의 갈등과 정부 관원으로부터 박해를 많이 받았다. 1949년까지 17명이나 되는 외국인 신부가 머물렀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포교를 이어왔다는 이야기다. 신중국 개국 후에 잠시 ‘종교의 자유’가 오나 싶었는데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성당이 완전히 훼손됐다. 개혁개방 이후 종교활동을 보장받고 성당을 재건한 이후 지금에 이르렀다. 1997년에는 티베트 청년이 첫 신부가 되기도 하는 등 나시족과 티베트 민족이 어울려 사는 마을에 주민의 80%가 신자이니 우여곡절 깊었는데도 꾸준히 맥을 이어온 ‘역사적인’ 성당이다.

현지 민속과 서양식이 혼합된 문양과 구조여서 그런지 건축물이 독특하다. 백색 담벼락에는 십자가 모양으로 창문을 만들었다. 성당 안은 몇 군데 한자가 쓰여 있긴 하지만 대체로 우리네 성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당 입구에 서서 뒤돌아서면 고원의 산과 하늘에는 영락없이 티베트의 바람이 분다. 오성홍기 나부끼지만 그래도 티베트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차마고도를 달리는 마방이 소금을 얻는 땅 옌징, 자연의 신비와 인간의 노력이 지혜롭게 힘을 합친 땅이다.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협곡과 설산을 넘어야 하는 마방, 말의 생명까지 책임지는 그들에게는 티베트 불교나 천주교 모두, 소중하고 사랑이 넘치는 ‘신(神)’이었을지도 모른다.

▲ 티베트에 자리 잡은 천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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