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중국대장정(05) – 예라산 고개와 란우호, 미퇴빙천

산과 산 사이의 좁은 골, 산을 넘어가는 고개를 야커우(垭口)라 한다. 해발 4,658m의 예라산(业拉山) 고개에는 다르초가 무수히 휘날리고 있다. 아무리 봐도 티베트 글자는 까막눈일 텐데 왠지 낯설지 않다. 순결한 영혼을 담은 암호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고원 초원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해발을 점점 낮출 것 같은 세찬 바람을 따라 어디론가 영원히 떠나갈 것처럼 다르초에 새긴 부처의 바람은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다.

▲ 예라산 고개의 다르초

고개를 넘자, 펼쳐놓은 시야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새파란 하늘로 햇살이 비친 산에는 이리저리 금을 그은 듯 길이 나부끼고 있다. 가로와 세로로 오가며 오르내리는 길이 통째로 산을 다 삼킨 듯하다. 도대체 이 길은 누가 만들었으며, 만든 사람은 이 길을 뭐라 부르는 것인가? 뒤로 돌아보니 “天 路 ★ 72 拐”라고 별까지 붙여서 매달아 놓은 글씨가 보인다. 어림잡아 3m 정도인 쇠기둥을 다섯 개나 세웠다. 하늘로 오르는 길, 과이(拐, bend)는 회전이니 72번이나 돌고 돌아야 도달하는 길. 그런데 굳이 별은 왜?

대명정정(大名鼎鼎)한 천로는 이름도 가지가지다. 산 너머 강을 빌려 ‘노강(怒江) 72과이(拐)’라고도 한다. 99나 108을 붙이기도 한다. 정확하게 72번 급커브 하는지는 몰라도 숫자가 주는 의미에는 약간씩 차이가 느껴진다. 99는 ‘구구(久久)와 발음이 같아 한없이 가야 하며 108은 중생의 번뇌처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일 터, 제목인지 가사인지 모를 ‘돌고 도는 인생’이 시나브로 떠오르는 곳이다. 하늘에 이르면 별이 되는 차마고도일까? 하루의 밤이건 기나긴 인생이건 이 순간만큼은 별이 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 천로 72구비
▲ 천로 72구비 표지판

길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 바닥에 걸터앉아 도화지와 천로를 나눠 보며 색감을 덧칠하는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여기에 선 사람 모두 어쩌면 한가지 생각일지 모른다. 인생의 길을 떠올리며 천년 세월을 공들여 ‘성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마방을 생각할 것이다. 가파른 길을 오르려면 도대체 얼마가 고통스러웠을까? 거꾸로 오른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 길을 따라 그저 내려가면 되니 다행이다.

▲ 천로 72구비를 그리는 사람
▲ 천로 72구비를 달리는 사람

자동차도 가고 오토바이도 가고 화물차도 간다. 자전거도 가고 트랙터도 간다. 길은 뜻밖에 평탄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순조롭게 흐르는 시간처럼. 그러다 보면 급하게 돌아가야 할 때를 만난다. 인생 공부를 떠올리며 구비구비 약 12km를 내려오는데 걸린 시간은 딱 30분. 4,600m에서 3,100m로 내려오는데 반 시간이라니 다소 허무하다. 2010년에 아스팔트 길이 완성됐다. 문명은 허탈일까 감사일까? 길을 다 내려온 후 후회막급,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길을 걸어 내려오고 싶었던 것이다. 단 1km만이라도 걸었다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인생에서 후회는 늘 인간의 간사한 이기심이기도 하다.

협곡 사이로 노강이 유유히 흐른다.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은 황토만이 흘러내린다. 강물은 누런빛으로 흐르고 있다. 청장고원에서 발원한 3개의 강은 각각 머나먼 길을 항해한다. 가장 동쪽의 금사강은 중국을 가로지르는 장강이 되고 가운데 란창강은 메콩강으로 변한다. 그리고 가정 서쪽의 노강은 장장 3240km를 흐르는데 티베트와 윈난을 지나 미얀마로 진입해 살윈(Salween) 강이 된다.

▲ 노강대협곡 앞에서
▲ 노강협곡을 잇는 다리 위를 걷는 사람들

원주민인 노족(怒族)은 ‘아누르메이(阿怒日美)’이라 부르는데 스스로를 ‘아누’라 부르고 ‘르메이’는 ‘강(江)’을 뜻한다. 인구 7만 명 가량의 소수민족 중의 소수인 노족에게 피붙이이자 생명수다. 남북으로 흐르는 강이니 서쪽을 향해 가려면 노강교를 건너야 한다. 협곡을 잇고 있는 오래된 다리를 사람들이 건너고 있다. 꽤 위험해 보이건만 사람들은 걱정은 난간에나 묶어 두라는 듯 여유롭다. 협곡 위에 걸쳐 있는 아스팔트 대교를 따라 터널로 진입한다.

▲ 노강을 끼고 사는 와다촌
▲ 붉은 토양으로 만든 다라신산

강을 끼고 살아가는 자그마한 마을 와다촌(瓦达村)을 지나니 서서히 산세가 완만해진다. 그리고 갑자기 산과 강이 붉은빛을 발산하고 있다. 이름하여 홍산하(红山河)다. 황토와 홍토가 산을 구분하고 산과 평지는 초록의 나무가 접선을 이룬다. 여전히 구름과 하늘은 햇살을 다투고 있다. 이 신비로운 산은 다라신산(多拉神山)이라 불린다. 동과 철, 아연이 많이 매장돼 있다는데 그래서일까? 오후 1시를 달리고 있지만, 아침이나 저녁이면 무지개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환생할지도 모른다.

바쑤(八宿) 현 바이마(白玛) 진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떠난다. 고원지대이자 온대성 스텝(steppe) 기후인데 온천이 많은 동네다. 온천 호텔에서 하루 묵어도 좋을 듯하다. 호텔에는 실내 풀장도 있다고 한다.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글 수 있다면 해발 5천m를 넘나드는 사람에게 재충전을 위한 쉼터로 손색이 없을 듯하다.

방향을 남쪽으로 살짝 틀어 두 시간을 더 달려 란우호(然乌湖)에 도착한다. 해발 3,750m 지점에 있으며 길이는 29km, 면적은 22평방km에 이르며 최고 수심이 50m이다. 황산염이 함유된 담수호로 11월부터 5월까지 결빙한다. 반년 이상 얼음이 어는 까닭은 추워서이기도 하지만 산 붕괴로 형성된 언색호(堰塞湖)이기 때문이다.

▲ 란우호
▲ 란우호 주변에서 쉬는 티베트 사람들

소 몇 마리만 어슬렁거리고 있다. 멀리 보이는 설산이 호반 위에 반영이라도 되는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각도를 맞춰본다. 한여름이라 만년설도 ‘귀향’했는지 눈(雪)과 눈 맞추기 참 어렵다. 그늘에 누워 낮잠 자는 사람만 찾았다. 다른 곳보다 호수 주변에 야생초가 많이 자라니 소를 풀어놓고 늘어지게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정지된 듯’ 마냥 평화로운 티베트 사람에게 땅은 그저 누울 곳인가 보다.

다시 30여 분 달리면 국도 옆에 미퇴빙천(米堆冰川) 매표소가 나타난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빙하’라는 말이 선명하다. ‘가장 아름답다(最美)’는 말은 중국 곳곳에서 워낙 많이 봐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매표소 문 안쪽에서 살짝 드러난 설산으로 눈이 갔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풍겨 나온다. 약 4km에 이르는 미퇴촌으로 갈수록 설렘을 더욱 짙어진다. 분명 고산반응 때문이 아니다.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다.

▲ 미퇴빙천 통나무 다리
▲ 미퇴빙천의 돌무더기

차에서 내려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른다. 해발 1,000m 정도라면 그냥 평지다. 말을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 빙하가 흐르는 도랑은 통나무 다리로 건넌다. 서낭당 앞에 돌무더기를 쌓듯 빙하가 마주 보이는 공터에는 크고 작은 돌이 쌓였다. 관음보살, 재신(财神)에게 봉공하듯 지폐로 끼워 넣었다. 주봉은 해발 6,800m에 이른다. 얼음으로 둘러싸인 빙하의 높이는 800m나 된다. 온통 새하얀 빛을 멀리까지 분출하고 있는 이유였다.

미퇴빙천은 세계에서 아주 드문 빙하다. 1988년 7월 15일 밤에 갑자기 빙하가 갈라져 호수로 쓸려 내려오는 현상이 발생했다. 마치 화산이 분출하듯 빙하도 ‘약동(跃动)’한다니 신기하다. ‘활빙하’라 해도 좋지 않은가? 중국에는 4만6천여 개의 빙하가 있는데 단 두 개만이 ‘살아있는’ 빙하다. 또 하나는 200km 떨어진 난자바와(南迦巴瓦) 산 줄기에 있다.

▲ 미퇴빙천의 말과 빙하
▲ 미퇴빙천이 반영된 호수

호수 위에 쏙 들어온 설산이 참 예쁘다. 데칼코마니를 이룬 모습, 그 반영은 본디 모습보다 더 경이롭다. 잔잔한 흐름을 따라 오는 바람도 어느덧 숨을 멈춘다. 다시 긴 호흡을 내쉬면 호수는 몸서리를 치고 설산은 대칭이면서도 자기 모습을 감추듯 살짝 비튼다. 주름 같은 흐느낌은 짜릿한 오르가슴 같다. 빙하와 호수는 그렇게 한 쌍의 나비처럼 훨훨 날아갈 것 같다.

눈은 호수를 정화하고 도랑으로 흐르다가 개울이 돼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미퇴하(米堆河)는 논밭과 삼림을 적시고 란우호에서 내려온 팔룽짱보(帕隆藏布) 강에 합류한다. 대부분의 티베트 물줄기처럼 티베트를 남북으로 가르는 젖줄인 얄룽짱보(雅鲁藏布) 강으로 들어선다. 근원을 알아야 하는 법, 사람이나 자연이나 마찬가지다. 설산의 DNA는 어느 바다에 머물지 몰라도 그냥 H2O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빙하 마을 미퇴촌
▲ 미퇴촌에서 만난 설연화

시리도록 눈부신 설산을 뒤로하고 도랑을 따라 내려온다. 연기가 모락모락 솟는 지붕, 관광지로 변한 마을에도 저녁이 온다. 공예품을 파는 가게 몇 집 보이고 좌판에는 티베트 특산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마치 눈꽃이 피기라도 한 듯 아담한 설연화(雪莲花)에 눈길이 간다. 해발 3~4천m 바위에서 자생하는 국화이다.

<본초강목습유(本草纲目拾遗)>에도 기재됐으며 부인병에 탁월한 약재로 쓰인다. 차로 마셔도 좋고 분말로 사용하면 미용효과도 뛰어나다. 식용으로도 쓰이며 담근 술로도 먹을 수 있다. 눈 속에서 폈을 때가 정말 예쁘다는 설연화는 꽃말이 ‘순결한 사랑’이다. 그 어떤 말로 설연화를 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순수가 공존하고 있는 빙하 마을에서 하룻밤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보미(波密) 현에는 아직 3시간을 더 가야 한다. 어두운 산 너머 여전히 햇살이 발버둥 치는 하늘을 응시한다. 흔들리는 차량에 나른한 몸을 맡긴다. 소르르 졸음에 빠지다가 언뜻언뜻 설산 그림자를 따라 눈을 떠보기도 한다. 빙하의 인상이 강해서인지 차마고도를 잠시 잊은 듯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지는 듯하다. 꿈에라도 마주하고 싶은 마방 행렬인데…. 하늘에 이르는 길, 별처럼 높디높은 고개를 지나 호수와 빙하를 만난 날이다. 오늘 밤 꿈에는 별이 오려나 보다.

▲ 보미 가는 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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