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운동의 산증인

강창덕 선생 [사진 : 평화뉴스,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강창덕 선생 [사진 : 평화뉴스,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주말마다 전화하면 특유의 밝은 미소의 자상한 목소리로 한동지 (남북관계) 좋은 소식 없나? 물으시든 선생이, 지난 주말 통화가 되지 않아 불안하였는데 결국 민족통일의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하고 지난 9월 3일 오후 2시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향년 95세
 
한평생 대구‧경북에서 지역을 떠나지 않고 통일운동가로 활동해 오신 강창덕 선생(전 민자통 대구경북 고문, 전 전민련 대구경북 상임공동의장)의 장례식은 9월 5일 대구전문장례식장에서 <통일민주투사 야성(野星) 강창덕 선생 추도문화제> 등으로 엄수되었다.

“강창덕 선생”하면 <대구‧경북 운동의 산증인>과 <인민혁명당(인혁당)>으로 대변된다.

<대구‧경북 운동의 산증인>으로 강창덕 선생은 일제 강점과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독재정권과 국가보안법에 맞서 7차례의 투옥과 13년 복역이라는 투쟁의 역사를 가진 어른이시다.

격동의 해방공간, 당시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리는 대구는 10월 인민항쟁 등 그 어느 지역보다 통일운동의 실천 열기가 높았다. 선생은 미군정하에서 주간은 직장에 야간은 학교 다니면서 민주학생연맹 맹원으로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지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반대, 통일 조선 독립지지, 5·10 단독선거 반대운동 활동을 하신다. 
그러다 1947년 ‘대구 공예당 웅변대회 소요 사건’으로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다. 내용은 ‘미국이 유엔이라는 거대한 도마 위에 우리를 올려놓고 팔다리뿐 아니고 허리를 두 동강 낼라 한다’고 웅변하며 미국을 비방하고 유엔을 비방하였다는 것이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자 그동안 6·25전쟁 전후 피학살 유족들이 억눌렸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5월 23일 4대국회에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된다. 하지만 학살의 주체였던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이 12명이나 조사위원에 임명되어 투명한 진상규명은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피학살자 유족들은 지역별로 유족회를 결성하고 학살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 운동에 나서기 시작하는데 선생은 고향인 경산군 피학살자유족회 결성을 하며 고문으로 활동하신다. 

이후 선생은 4월혁명공간의 3대 운동(한미경제협정 반대운동, 2대 악법 반대운동,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 성사 투쟁) 중 하나인 2대 악법(‘데모규제법’과 ‘반공임시특별법’) 반대 투쟁으로 5차 투옥을 당하며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된다. 
그러나 4월혁명의 반동 5.16쿠데타로 혁검에 의해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 위반’으로 6차 투옥되며 박정희와의 악연이 시작된다.

박정희와 군사쿠데타 주도세력은 ‘반공 국시’를 천명하면서 사회당, 사회대중당, 혁신당,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전국피학살유족회, 교원노조, 통일민주청년동맹, 민주민족청년동맹, 전국민족통일학생연맹 등 18개 혁신계 정당·사회단체의 핵심 인물을 체포하였다.
군사쿠데타 세력은 혁신계는 바로 용공 세력이라 규정하고, 선생을 사회대중당 활동을 구실로 징역 7년 선고받고 2년 8개월을 복역한다.

고 강창덕 선생 [ 사진 : 통일뉴스 자료사진]
고 강창덕 선생 [ 사진 : 통일뉴스 자료사진]

선생의 이력으로 알 수 있듯이 선생의 향학열이 1948년 건국대학교 정치대학에 입학게 한다. 이후 국회의원 서상일 비서를 하며 생계와 학업을 마치고 영남일보사와 대구매일신문사 정치부 기자를 한다. 그동안 경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진보정당에 투신하여 1956년 진보당 창당준비위원과 진보당 대통령후보 조봉암 경산군 선거사무장을 역임한다.
그리고 4월혁명공간에서는 직접 7·29민참의원에 도전하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 경험을 가지고 1967년 “반독재 재야민주세력단일후보 추진위원회” 활동도 하며 진보정당이 없던 시절 야당과 교류하며 재야운동을 한다.
2000년 후에는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 등 진보정당에 깊은 애정을 갖고 당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후진들이 올바른 당 활동과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격려 지지 활동을 한다.

<인혁당>으로 선생은 7번째 투옥된다.

5·16쿠데타 후 4월혁명의 반동, 공안탄압과 고문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것이 소위 1, 2차 인혁당 사건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했던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조작하여 만든 사건이다. 그러다 보니 발표와는 달리 기소권을 가지고 있던 검찰은 고문에 의해 조작된 허구라고 주장하며 기소를 포기하자 담당 검사를 바꿔가며 법원에 기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2차 인혁당 사건은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라고도 불리며, 1974년에 일어난다. 

1972년 ‘탈냉전, 군축’을 표방한 닉슨독트린과 시민사회의 반독재 민주화운동 투쟁으로 위기에 몰린 박정희는 북과 7·4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권력을 맛본 박정희는 7·4공동성명을 외면하고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유신헌법 제정에 대한 국민적 저항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며 각계 민주인사들은 1973년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발족시켜 십여 일 만에 30만명이 넘는 서명이 이루어낸다.
대학생들은 이 기회를 활용해 '민청학련 사건'으로 알려진 유신반대 투쟁을 준비한다.
이렇게 유신반대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박정희는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던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하였다는 혐의로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민청학련 관계자는 대부분 석방된다.

그러나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8명의 사형을 확정한 뒤 다음날 9일 도예종을 비롯한 8명의 열사들을 국가가 살인한다. 
재심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무자비하게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선생은 이 사건으로 1974년 긴급조치1호, 4호 내란예비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년 8개월을 복역한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고문조작 되었다고 발표한다. 
이어 2005년 12월 7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위원회가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의 고문 조작 사실을 인정하고 20일 후, 서울지방법원은 2차 인혁당 사건의 재심을 결정한다. 
뿐만 아니라 2006년 1월23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 1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포한다.

마침내 2007년 1월 23일,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 23부는 사형수 8인에 대해 무죄를 판결한다. 이것은 소위 2차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판과정이 위법하고 부당하였음을 국가가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소위 1, 2차 인혁당 사건은 고문 조작으로 사건이 부풀려졌지만, 선생을 비롯한 국가 살인 당한 열사들은 4월혁명 당시 이론가이자 실천활동가였다. 

특히 살아남은 강창덕 선생은 올해도 노구를 이끌며 사형선고를 당한 후 해마다 열리는 추모식을 동지애로 마지막 가는 날까지 치러냈다.

존경하는 강창덕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조국과 민족 그리고 자주민주통일에 대한 신념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영원히 불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 못다 한 꿈을 우리는 반드시 쟁취할 것입니다.

조국은 기억하리라!

선생님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통일민주 투사 야성 강창덕 선생님 주요 약력

□ 1927년 11월 30일 경북 경산시 하양읍 금락리 출생
□ 1941년 하양초등학교 졸업
□ 194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차 투옥 (17세)
   경산경찰서 하양경찰관 주재소 지하땅굴 구류장에 수감 약 15일 후 석방
□ 1945년 치안유지법 위반 구류 처분 2차 투옥 (18세)
   경산경찰서 유치장에 수감 약 20일 후 석방
□ 1947년 미군정 포고령위반 구속 벌금형 3차 투옥 (20세)
   대구경찰서 유치장 대구형무소(교도소) 수감, 약 50일 후 석방
□ 1948년 대구상업중학교(6년제) 중퇴 (야간부)
□ 1948년 건국대학교 정치대학 전문부 입학
□ 1949년 국회의원 서상일 비서
□ 1952년 건국대학교 정치대학 정치학과 졸업
□ 1952년 국가보안법 위반(무력통일반대, 평화통일 주장) 4차 투옥 (25세)
   대구형무소 수감 약 30일 후 기소유예로 석방
□ 1956년 영남일보사 정치부 기자(공채 1기)
□ 1958년 대구매일신문사 정치부 기자
□ 1956년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진량중학교 교사 사퇴)
   진보당 대통령후보 조봉암 경산군 선거사무장(본부장)
□ 1960년 경산군피학살자유족회 결성 고문
□ 1960년 사회대중당(대표 서상일) 경산군당위원장, 제5 대 민의원 의원 후보
□ 1961년 불법집회 시위 및 공무집행방해죄 5차 투옥 (34세)
   대구형무소 수감. 약 30일후 기소유예 처분 석방
□ 1961년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 6조 위반 6차 투옥 (34세)
   서대문 형무소 수감. 징역 12년 구형 혁명재판부 징역 7년 선고 2년 8개월 복역 
□ 1967년 “반독재 재야민주세력단일후보 추진위원회” 활동
□ 1974년 긴급조치1호, 4호 내란예비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7차 투옥(47세)
   무기징역 선고 후 8년 8개월 복역 (인혁당 재건위 사건) 
□ 1988년 민족자주평화통일회의 대의원 대구경북 고문
□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대구경북 상임공동의장
□ 1990년평민당(김대중총재)신민주연합당(준)통합출범 전당대회 임시의장
□ 1993년 경산민우회 창립 및 초대회장
□ 2006년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국무총리소속)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음

□ 통일연대 고문
□ (사) 4․9인혁재단(4․9인혁열사 계승사업회) 이사장(전)
□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상임고문(현)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대구북구회장
□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현)
□ 남북평화나눔운동본부 고문(현)
□ 한국진보연대 중앙본부 고문(전)
□ 노무현재단 대구경북지역위원회 고문 
□ 전태일의 친구들 준비위원장 및 고문
□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 고문
□ 민주화운동원로회 회장
□ 반일, 통일 민주화운동으로 7차 투옥 13년 복역

(자료 제공-강창덕선생장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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