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평가와 한국의 당 건설(5)

본문 요지

1987년 7-9월 파업투쟁을 계기로 한국에서 대중적 노동운동시대가 본격 개막되었다. 한국사회는 이로써 노자 간 계급모순이 전면화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1996-97년 노동법개정투쟁은 ‘경제투쟁’ 내지 야당에 기대어 입법개혁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었다. 이로써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과거 민중당처럼 현장에 기반을 갖지 못한 소수 명망가 중심이 아닌, 노동조합과 수많은 현장 대중들이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대중적 토대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1. 지금 왜 민주노동당에 대한 평가가 시급한가? 
2. 민주노동당 성립의 시대적 요인 (1)―정파적 측면 (지난 호)

3. 민주노동당 성립의 시대적 요인(2)―대중운동적 측면 
: ‘반독재’에서 ‘反자본’으로 사회모순의 변화와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은 한국 진보정당 탄생의 또 다른 시대적 배경이자, 이후 진보정당운동 발전에 있어 가장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한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1960년대 초반 경제발전이 시작된 이래로 빠른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도시 임금노동자의 수는 1960년 130만 명에서 1970년에는 340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가 본격화한 이후 그 성장세는 더욱 두드러져 1980년대 중반에는 800만 명에 달하였다. 

이처럼 양적으로 거대 계급으로 성장한 노동자계급은 개발독재체제 하의 군사적 통제와 초과착취를 언제까지 감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1960년대 유아적 형성기를 거쳐, 1970년대에는 초보적인 의식화와 조직화에 성공한 후, 1980년대 들어서서는 더욱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마침내 1987년 7-9월 대파업투쟁을 낳았다. 이로부터 한국사회는 본격적인 노자간의 계급모순이 전면화 하는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에는 3,749개 사업장에서 150만 명이 투쟁에 동참하였으며, 3000여건의 파업이 벌어졌다. 1987년 여름에서 1988년 공안탄압 정국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전국 각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민주노조는 1800여개에 달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한국의 노동운동은 새로운 장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 시기 투쟁의 94%는 실정법으로 따지자면 ‘불법파업’이었으며, 작업거부, 집단농성, 시위 등 87년 7-9월 노동자투쟁의 99.8%가 매우 전투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투쟁의 성과로 1987년 11월 노동쟁의조정법에서 공익사업 범위를 다소 축소하고 유니온숍 제도가 부활되는 등 부분적인 노동법 개정이 이루어졌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민주노조들이 전반적으로 직면해야 했던 것은 여전히 정권과 자본에 의한 지독한 탄압이었다. ‘88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부터 본격화된 노태우 정권의 공안탄압에 맞서, 갓 태어난 민주노조들은 지난한 생존을 위한 투쟁을 겪어야만 하였다. 

민주노조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일차적으로 각 지역 지노협과 1990년 1월 22일 전노협 결성으로 귀결되었다. 정치권에서는 보수세력이 3당 합당선언을 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창립대회를 막기 위해 경찰이 원천봉쇄를 삼엄하게 펼치는 속에서 전노협은 백골단과의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그 역사적인 출범을 하였다. 서노협, 인노협, 경기노련, 성남노련, 부노협, 대전준비위, 전북노련, 광노협, 마창노련, 부양노련(부산양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 대구노련, 진민노협, 포항노협준비위, 울노협 준비위 등 14개 지역조직과 연전노협(연구, 전문기술노동조합 협의회), 병노련 등 2개 업종조직 600여개 노조 19만3,000명이 전노협의 조직원이 되었다. 

전노협은 창립과 함께 1990년 5월 1일~4일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되자 전국 총파업, 1991년 5월 9일, 5월 18일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진상규명을 위한 전국 총파업을 이끌었다. ‘선파업 후교섭’ 투쟁방침 하에 정당방위대(선봉대)를 결성하였으며, ‘민자당 해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정치투쟁에도 나섰다.

이처럼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한 치 타협 없이 전투적으로 맞섰던 전노협은 출범 초기부터 불법조직으로 규정되어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아야 했다. 역대 의장들은 대부분 구속과 감옥행을 경험하여야 했으며, 출범 5개월 간 위원장을 비롯한 200여명 노조간부와 노동자가 구속되었다. 14개 지노협 가운데 10개 지역 의장단을 포함하여 1백여 명이 수배되고, 2백여 명이 고소고발 되었다. 전노협 소속 사업장에 18번이나 경찰이 난입하고, 전노협 중앙위원회장에 경찰 백골단이 난입하여 전원 연행해간 일도 발생하였다. 이 같은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전노협은 결성 1년여 만에 가입 노조 수 48%, 조합원 수 45%가 감소하였다. 

    <그림> 1988~1992년 구속노동자

그러나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노동운동은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전노협 창립과 함께 다른 전국조직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11개 연맹 및 협의회 15만 명이 1990년 5월 30일 ‘업종회의’를 창립했다. 1990년 2월 2일 38개 노조 9만 명은 현(대그룹)총련을 결성하였으며, 1990년 12월 3일 16개 노조 5만 명이 대(우그룹)노협을 창립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이라는 중소사업장, 대공장, 지역 및 업종을 포괄하는 전국 단일조직(총연맹)이 건설되었다.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우리는 인간다운 삶과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조건의 확보, 노동기본권의 쟁취, 노동현장의 비민주적 요소 척결, 산업재해 추방과 남녀평등의 실현을 위해 가열 차게 투쟁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통해 전체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함과 더불어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가열 찬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 (민주노총 창립선언문 중에서)
 
민주노총 역시 ‘비합법조직’으로 정부의 인가를 받지 못한 가운데, 1996년 들어 김영삼 정권이 때마침 추진하던 ‘노동악법 개정’과 마주치게 된다.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등 상시적인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를 지향 하는 그것은 당시 세계적인 조류였던 신자유주의 외형을 빌린 한국 재벌의 새로운 ‘축적전략’이었으며, 이후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제도적 기초가 되었다. 민주노총을 앞세운 노동운동 진영은 이에 맞서 영웅적인 노동법 개정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직후 전평이 조직했던 ‘총파업’ 이래 최초의 정치 총파업을 실현하였다.

▲ 민주노총 96-97년 총파업 [사진 : 노동역사 한내]
▲ 민주노총 96-97년 총파업 [사진 : 노동역사 한내]

1996년 12월 26일부터 시작하여 해를 넘긴 1997년 1월 18일까지 총 24일 동안 3단계에 걸쳐 진행된 총파업은, 모두 528개 노조 40만3,179명이 파업에 참가하였다. 이는 당시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 49만6,908명의 81.1%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이었다. 또 이 기간 동안 하루 평균 168개 노조 18만9,119명이 파업에 참가하였으며, 파업에 참가한 누적 규모는 3,206개 노조 359만7,011명에 달하였다.1)

이 투쟁은 전국적 규모와 전 산업을 포괄한 명실상부한 전국적 총파업이었다. 자동차•현총련•금속•화학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 대오, 사무•전문•언론•건설 등 사무전문직 대오, 병원•지하철•의보•화물 등의 공공부문 대오들이 총망라하여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현총련 등 제조업종과 철도•지하철과 같은 공공운수 부문의 동시 파업이 성사됨으로써 그 위력은 더욱 컸다. 지역적으로는 제주에서부터 부산, 울산, 거제, 광주, 전주, 충청권, 수도권, 강원 등을 망라하였다. 

이 총파업 투쟁으로 민주노총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이 강화되었다. 전국민이 민주주의와 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의 선두에 선 민주노총을 지지하였으며, 각계각층의 격려와 연대가 쏟아졌다. 마침 당시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안기부법’에 반대하는 투쟁도 함께 진행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여론의 지지가 가능하였다. 지도부 농성장인 명동성당에는 매일같이 각계각층의 지지방문과 성금(1억 원 이상 모금)행렬이 이어졌다. 빵집가게 주인은 만두를 날라 오고 수녀님들이 식사를 마련해 주었으며, 국회의원과 신부들은 지도부 사수를 위해 숙박을 하는 등 민주노총은 명실상부한 투쟁의 구심으로 자리 잡았다.2)

그러나 결국 정권의 지속적인 탄압, 야당인 민주당의 배신, 투쟁 지도부의 지도력 한계 등으로 인해 정작 노동법 개악을 막아내는 데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이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은 제도 정치권 밖에서 ‘경제투쟁’ 내지 야당에 기대어 입법개혁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결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아래의 평가는 그 점을 잘 말해준다.

“투쟁은 정부, 여당뿐만이 아니라 노-사를 오락가락하며 정부의 날치기에 항의하면서도 총파업과 연대하는 것을 꺼리는 동요하는 야당의 모습도 폭로하였다. 투쟁은 또 우리 노동자들은 야당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과 투쟁으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하며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만이 유일한 해결방도라는 것을 자각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3)

정치세력화!! 앞으로 노동운동이 나가야 할 이 새로운 목표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이후 민주노동당 창당을 실현시키고 한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귀중한 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그동안 민중의 당, 노정추, 민중당 등 여러 차례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 노력이 거듭 좌절을 맛보았지만, 이제 노동법 개정투쟁의 성과에 기반 한 노동계급의 조직적 뒷받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 높은 벽을 허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민주노총은 이 같은 자각을 실현키 위해 1997년 3월 27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최소 2000년까지를 바라보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다가오는 15대 대선을 활용하고 정치개혁운동을 종합적으로 추진한다는 포괄적 방침을 수립하였다. 같은 해 7월 24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는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후보'를 만들어 제 민주개혁세력과 공동으로 선거대책기구 건설에 나서는 한편, ‘98년 지자체선거 대거 진출→98~99년 정당 건설→2000년 국회 원내진출’이라는 1997년 정기대의원대회 결의를 재확인하였다. 

▲ 국민승리21 출범식 [사진 : 인터넷 캡처]
▲ 국민승리21 출범식 [사진 : 인터넷 캡처]

1997년 10월 26일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1만여 명의 노동자, 시민이 모인 가운데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약칭 ‘국승21’) 결성식을 성대하게 가졌다. 그 여세를 몰아 그해 15대 대선에서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인 권영길씨를 독자후보로 내세웠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1.2%인 30만6026표 득표에 그쳐 현실정치와 제도언론의 높은 벽을 실감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국승21’에 참가한 주체들은 해산하지 않고 대오를 유지한 채 오히려 창당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여기서 당시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전국적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기 위해 지방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특히 한국 노동운동의 메카인 울산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곳의 선진노동자와 활동가들은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와 같은 대공장 투쟁의 활성화와 노동조합의 막강한 조직력으로 인해 일찍부터 노동자계급의 제도권 진출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울산지역에서, 그리고 전국을 통틀어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첫 발을 뗀 것은 현대중공업이었다. 1988년 4.26총선을 앞두고 동구에 위치한 현대중공업 회장 정몽준이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맞서 울산노동자대투쟁 지원 활동을 벌였던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와 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 등이 중심이 되어 노동자 후보를 낼 것을 결정하였다. 노동자 후보로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결성 과정에서 구속되어 수감 중이던 김진국씨가 선정되었다.

김진국 후보는 옥중 출마였음에도 불구하고 2만2641표를 얻어 30.6%의 상당히 높은 득표율을 보여주었다. 비록 4만253표(54.4%)를 얻은 정몽준 후보에게 패배하긴 하였지만, 울산 동구의 국회의원선거는 동일한 현대중공업 소속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4) 

현대중공업이 아직 개별적 차원의 정치적 진출에 머물렀음에 비해, 현대자동차는 좀 더 체계적으로 노동조합 차원에서 정치세력화 사업을 지원하였다. 현대차 노조는 1998년 4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다가오는 6.4 지방선거에서 노조차원의 조직적 대응을 결정하고, 노조 집행부와 현장 제조직 등 17명으로 구성된 ‘정치특별위원회’ 결성을 추인하였다. 선거 참여 목표로 ▲지방선거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둠으로써 본격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토대 구축 ▲고용안정 및 실업대책과 임투 투쟁전선의 확대강화 등이 설정되었다. 여기서 ‘고용안정’ 목표가 들어간 것은 당시로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현대차 노조가 그 무렵 현대재벌 측과 ‘98 구조조정’ 관련한 큰 싸움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차 노조는 6.4 지방선거가 끝난 후에도 당선된 자사 출신의 시, 구의원들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지원을 잊지 않았다. 노조의 관련 자료를 보면, 노조 예산으로 이들의 의정활동에 대한 ‘재정지원’을 수행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예컨대 1998.12.15. 지자체 의원사무실 임대료 명의로 4,000만원을 지원하였으며, 시•구의원 의정활동 보고서 지원비로 700만원, 시의원 1인에게 250만원과 구의원 3인에게 각각 150만원이 지원되었다.5)

당시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기대와 열기가 얼마나 높았는지는 지자체에 출마한 노동자후보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노조의 아래 유인물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들의 힘으로 울산을 장악하자!
울산지역의 특성상 노동자 밀집지역에서는 노동조합이 추천하고 함께하는 후보자가 당선되어야 한다. 시장에서부터 기초의원까지 노동조합이 추천한 후보자가 되었을 때는 어느 누구도 감히 ‘정리해고’라는 말조차 꺼내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노동조합이 추천한 사람이 시장에 당선되어 정리해고를 반대하고 나선다면 회사는 정리해고 뿐만 아니라 부당노동행위조차 마음대로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노동자가 소외받고 따돌림 당한 이유가 바로 정치세력화가 되어 있지를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국회의원 중에 단 한 번도 노동조합이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탄압을 받아왔다. 작은 힘이지만 이제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자. 우리가 지방자치를 장악하고 울산을 장악하면 무서울 것이 없다.(중략)”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비상대책위원회 속보 27호에서)

이상과 같은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노력은 1998년 6월 치러진 제2회 전국동시 지방선거에서 그 첫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민주노총과 국민승리21은 이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모두 49명의 후보를 출마시켜 22명을 당선시켰다. 조승수 울산 북구청장, 김창현 울산 동구청장 등 울산에서만 2명의 구청장이 나왔고, 경남 남해에서도 김두관이 군수로 당선됐다. 또 울산 북구 이상범, 동구 조규대 등이 광역의원에 당선됐으며, 기초의원에 서울 2명, 경기 5명, 대전 3명, 울산 5명, 경남거제, 전남에서 각 각 1명씩 17명이 당선되었다.   
이러한 지방선거의 성과는 진보정당 추진 주체들에게 힘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진보운동 단체와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 단체들은 마침내 함께 힘을 합쳐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을 창당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오늘 민주, 평등, 해방의 새 세상을 향한 민중의 열망을 담아 민주노동당 창당을 선언한다. 민주노동당의 창당 정신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이어져 온  한국 민중의 민족해방, 민주주의, 평화통일, 평등사회를 향한 투쟁의 역사가 깊이 새겨있다.” (민주노동당 창당선언문 중에서)
 
민주노동당 창당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중운동의 성장, 발전을 총괄하는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 민중의 당, 민중당처럼 현장에 기반을 갖지 못한 몇몇 활동가 중심의 진보정당이나 특정 세력 중심의 진보정당이 아니라,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 간부와 조합원, 그리고 수많은 현장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대중적 토대를 지닌 진보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굳게 놓여졌다. 

창당 후 민주노동당은 전농과 한총련 등 각계 단체들을 참여시키면서 조직 확대 사업을 벌여 더욱 외연을 넓혔다. 하지만 아래 당원 분포 표를 보면, 그런 가운데서도 민주노동당의 당원 구성에 있어 노동자가 중심이었던 사실에는 큰 변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민주노동당 창당과 이후 발전 과정에 있어 노동자계급과 민주노총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생산직, 서비스, 사무직을 모두 포함할 경우 노동자 당원의 비율은 민주노동당 전체 당원 수 중 54.3%를 차지하였으며(표1), 그중 민주노총 조합원의 비중은 당의 존속기간 내내 40%(표2) 이상을 유지하였다.

표1 직업별 당원 분포(2002.12~2003.12)6)

표2 전체 당원 중 민주노총 조합원 비중7) 

민주노동당은 창당 후 2002년 지방선거 때부터 당의 지지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공직 당선자도 늘어났다. 민주노동당은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8.1%를 득표하여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에 이어 제3당의 위치를 확보하였으며, 울산 북구청장, 동구청장과 기초의원 34명을 당선시켰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는 득표율 13.1%와 국회의석 10석(지역구 2석, 비례대표8석)을 확보해 원내 제3당이 되었다. 이 같은 진보정당의 국회 진출은 1960년 이후 44년 만에 처음 있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대중의 기대감도 높아져서 원내 진출 이후 1년 넘게 지지율이 두 자리 수를 유지하였으며, 한 때는 20%까지 육박함으로써 한국 정치지형의 변화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노동정치’의 희망을 강력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기록한 이런 성장과 성공의 이면에는 당내 경쟁과 갈등의 격화라는 부정적인 요소 또한 서서히 커가고 있었다. (계속)


본문 주석

1) 민주노총정책연구원, “96-97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 현재적 의미와 과제”토론집, 2012년 1월 18일, p.74.

2)  참고로 당시 민주노총이 한길리서치에 의뢰한 1월 16일자 조사에 따르면, 총파업에 대해 적극 지지 23.3%, 지지 42.3% 등 국민의 65.6%가 총파업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아가 국민들 중 민주노총에 대한 호감도는 66.4%(매우 호감:16.5%+다소 호감:49.8%), 민주노총의 영향력 평가는 77.8%(영향력이 매우 크다:27.0%+영향력이 다소 크다:50.8%), 민주노총에 대한 기대는 69.8%(매우 기대가 크다:28.2%+다소 기대가 크다:41.5%)나 되는 등 총파업 투쟁을 통해서 민주노총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은 매우 높아졌다. “국민들은 공익사업장인 지하철, 병원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총파업을 지지함으로써 그 동안 가해졌던 파업=경제위기, 파업=공익외면이라는 공식이 이번 투쟁을 통해서 깨어진 것이다.” 위 토론집, p79.

3) 위 토론집,  p.80.

4)  1988년 13대 총선에서 울산 동구 지역의 투표율은 80.7%로 전국 평균 투표율인 75.8%보다 4.9% 포인트 높게 나타났다. 선거 후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진국 후보 낙선의 가장 큰 이유로 꼽힌 것은 부녀자 층이 지지하지 않은 점(38%)이었다. 그밖에 상대방 후보 측의 선거부정(25%), 노동조합의 비참여(19%, 당시 현대중공업 노조는 임금교섭에 열중하였음), 돈과 선전력 부족 순으로 나타났다. 부녀층이 지지하지 않는 이유로는 학력과 경력의 부족(50%), 지역 개발 능력 부족(27%)등이 지적되었다.(이상 노동자후보 김진국 선거대책본부,1988) 이는 당시 노동자와 그 가족의 계급의식 성장 상의 한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같은 문제는 ‘일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김진국 후보의 총선 참여 취지가 당선 자체 보다는 선전과 ‘조직화’가 일차적 목표이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만약 애초의 이 같은 취지가 견지되고 그 바탕위에서 제도권 참여를 위한 정치 사업이 계속해서 꾸준히 시도되었더라면, 이후 울산지역의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결과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5)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12차 회계연도(98.09.01-99.08.31) 정기대의원대회 회의자료> 중 “사업계획 및 예산 편성안 감사보고서 채권내역서”, p.20 참조. 이러한 재정지원은 1회성이 아니라 몇 년간 지속된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2001. 구의원 3명 의정활동 지원비(의정활동 보고서 발행비 일부 지원)로 1인당 150만원씩 총 450만원이 지원되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14차 회계연도(2001.1.1.-2001.12.31.) 정기대의원대회 회의자료>, p49. 

6)  정영태, 2011년, <파벌>, 이매진,p85에서 재인용.

7)  위 책 p86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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