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평가와 한국의 당 건설(4)

본문 요지
민주노동당의 탄생은 당시 국제 사회주의운동의 쇠퇴라는 큰 정치적 배경과, 제도권 정치경험이 미천했던 주체적 조건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그간 존재했던 상호 간의 노선 차이는 잠시 덮어졌으며, 사회주의권의 위기와 이념상의 혼란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노선 차이를 희석시키고 진보연합정당을 탄생시키는데 있어 일정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1. 지금 왜 민주노동당에 대한 평가가 시급한가? (지난 호)
2. 민주노동당 성립의 시대적 요인 (1)―정파적 측면

민주노동당은 제 정파조직과 민주노총을 비롯한 대중조직이 함께 결집해 만든 ‘진보연합정당’의 성격을 지녔다. 따라서 왜 이 같은 진보연합정당이 필요했던 것인지, 또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해 그 시대의 주체적 상황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체적 상황과 관련해선 ‘정파’와 ‘대중운동’ 두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우선 정파적 측면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군사독재 하에서 완강하게 전개된 민중들의 민주화투쟁은 마침내 1980년대 후반 들어 일차적인 결실을 맺게 된다. 1987년 6월 항쟁은 통치세력으로 하여금 ‘6‧29 선언’을 하도록 강제함으로써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인 민주화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간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한국의 변혁진영에게 있어선 새로 펼쳐진 합법공간을 활용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크게 두 가지 장애에 부딪쳤는데, 하나는 강력한 보수야당의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 역량의 미약함이었다. 이는 당시 객관적 정세가 제공한 제도정치권의 활용 가능성과 변혁진영의 주체역량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 각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한국에는 신민당, 민주당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자유주의적 보수정당이 존재하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민중진영의 정치적 대변자로 자리 잡아 왔는데, 이는 해방 후 6‧25 전쟁을 겪으면서 좌익세력이 절멸하다시피 하였고, 군부독재에 의해 변혁진영이 집중적인 탄압을 받은 결과였다. 특히 반동보수 세력과 첨예한 정치적 대립을 펼치는 한국적 상황 속에서 ‘소선구제’ 라는 정치제도는 대중들의 투표행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표’를 경계하는 투표심리는 제3당의 존립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선거 국면에 일단 들어서게 되면 현실적인 '당선가능성'이 모든 것을 압도하였다. 

다음으로 변혁진영의 주체적 조건을 보자면, 당시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변혁진영의 위신은 현저히 저하된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활동가들 스스로가 자신감을 상실하면서 전선을 이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원칙하게 이루어지는 기존 정통노선에 대한 수정은 이 같은 정체성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처럼 불리한 조건하에서 추진되는 변혁진영의 제도권 진출을 위한 노력은 매우 지난한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합법정당을 위한 길을 닦았던 세력은 1980년대부터 존재하였던 제 정파들이었다. 인민노련, 사노맹, 삼민, 제파PD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1987년 민주화 대투쟁으로 쟁취한 합법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는데, 그 출발점이 되었던 것은 1987년 대통령선거 당시의 ‘백기완 독자후보’ 전술이었다. 이 전술은 ‘백기완선거대책본부’에 참여하였던 노동자해방투쟁동맹(약칭 ‘노해동’, 사노맹 전신)과 오세철 교수 등 진보적 지식인그룹, 그리고 다수 자발적 활동가들이 주도하였다. 변혁진영은 그동안 기껏해야 선거를 보이콧하거나, 민주당과 같은 보수야당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에 비한다면 독자후보 전술은 확실히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87년 대선에서 나름대로 제도정치권에의 진출 가능성을 확인한 이들 세력 중 일부는 장기표, 이재오, 김문수, 정태윤 등 운동권 명망가들과 함께 이듬해 1988년 3월 ‘민중의 당’을 창당하고 4월 총선에 참여한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13대 총선에서 단 1석의 의석도 건지지 못한 채, 민중의 당은 결국 탄생 50여일 만에 정당법에 의해 등록이 취소되었다. 
당시 정당법에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1석 의석’ 이상 혹은 ‘3% 득표율’ 이상을 얻어야 해산을 면할 수 있는 규정이 있었다. 그것은 매우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으로 느껴졌으며, 이후에도 이 법은 번번이 진보세력이 제도권정치에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는 ‘철벽’으로 작용하게 된다. 

총선 후 평화민주당으로 가지 않고 남은 민중의 당의 잔류파들은 다시 1988년 9월에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정치연합을 만든 뒤 지역의 신당운동세력(‘새정당창당을 위한 임시연락사무소’)과 결합하여 1991년 11월에 민중당을 창당한다.

한편, 원래 비합법조직이었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 1987년11월 결성),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삼민동맹’, 1987년11월 결성), 노동계급그룹(1989년5월 결성) 세 조직은 통합을 추진하면서 이들도 정당 건설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들은 처음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에 기초한 ‘사회주의 전위정당’건설을 목적으로 1991년 8월 ‘한국사회주의노동당창당준비위원회’(이하 ‘창준위’)를 결성하였다. 하지만 창준위는 구성되자마자 얼마 안 되어 바로 합법정당노선으로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당시 월간 <길> 1992년 1월호에 실린 아래 글은 그들의 상황인식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한국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 부르조아 민주주의로의 이행 등으로 이제 더 이상 비합법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 노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합법정당을 통해 의회민주주의의 정치공간을 적극 활용하여 노동자들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해 나가는 방향으로 대대적인 노선전환을 해야 한다.”1)

그리하여 이들은 합법적 노동자정당 건설로의 노선전환을 결의하고 1991년 12월 15일 ‘한국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이하 노정추)’를 발족하고, 1992년 1월 19일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한다. 애초 ‘창준위’와 비교할 때 후자는 당의 명칭에서 ‘사회주의’를 빼버린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노정추는 앞서 소개한 세 조직 중에서 인민노련이 주도하였다. 민주노동당 출범 이후 ‘자율과 연대’라는 정파 모임을 결성한 주대환, 대중 정치인으로 성공한 노회찬, 울산지역 국회의원이 된 조승수, 1990년대 초반 경실련으로 이탈한 뒤 2004년 뉴라이트 조직인 자유주의연대를 결성한 신지호 등이 그 중심인물이었다.2) 

하지만 애초 기대와는 달리, 안기부의 ‘예상치 않은’ 탄압으로 인해 지도급 인사들이 체포되어 조사받으면서 노정추의 창당 시도는 중도에서 좌절되고 만다. 아래 인용문을 보면 그와 관련된 전후 맥락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노정추는 1991년 12월 노정추 결성대회 이틀 전인 12월 13일 안기부와 접촉하여 서로 의사를 전달하고 확인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정추는 12월 15일 결성대회 당일 11월 15일부터 1달 동안 서명받은 241명의 노동자 추진위원 전원의 명단을 공개할 수 있었다. 안기부에서 승인하지 않았다면 하루아침에 수백 명의 노조간부가 잡혀 들어감으로써 노조가 풍비박산될 게 뻔한데 추진위원 명단을 공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사회과학 책 1권만 가지고 있어도 구속되는 판에 반국가단체 조직원들이 구속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안기부는 이렇게 노정추를 인정하는듯하다가 한국노동당 창당발기인대회를 이틀 앞두고 갑자기 주대환 노정추 대표 등 핵심 간부 4명을 구속하고 18명을 수배한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①사회주의 포기 ②전위당 포기 ③합법활동으로 제한, 일체의 비합법 활동 포기 등 이 3가지 사항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면 공소유예하고 수배조치도 해제하겠다’는 것이다. 안기부의 의도는 한국노동당 추진 세력들에게 비합법 변혁노선에서 합법 개량(혁)주의 노선으로 확실하게 전향했는지를 확인하고, 쐐기를 박으려는 것이었다.”3) 

수배된 핵심 18명은 이러한 안기부의 요구에 대하여 몇 차례 토론한 결과 결국 안기부 요구를 대체로 반영하는 탄원서를 제출한다.
이렇듯 ‘한국노동당’은 정식 창당을 하지 못한 채, 목전에 다가온 총선에서 조금이라도 득표율을 높이고자 비슷한 시기에 결성된 민중당과 1992년 2월 7일 통합해 ‘(통합)민중당’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통합)민중당 역시도 1992년 총선에서 의석은 물론 1.5%의 득표 밖에 얻지 못해 정당 존속에 필요한 유효득표율 3퍼센트에 미달하였다. 이리하여 재창당 여부를 둘러싸고 내부 논란이 일어나 갈라지게 되는데, 이재오, 김문수 등은 민자당과 합류하여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되고, 남은 인민노련의 잔존세력은 1992년 4월에 ‘진보정당추진위원회’(약칭 ‘진정추’)를 결성하게 된다. 

다른 한편,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을 지향하면서 대중적 합법 대중정당 건설에 반대하던 민중민주 계열의 또 다른 정파인 ‘민중회의’(위원장 오세철)와 ‘사회당추진위’(사노맹 계열)가 1993년 5월에 통합해 ‘민중정치연합’(민정련)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1992년 5월 지도부의 대량 검거로 사노맹이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민중정치연합 역시 내부 노선 투쟁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사회당(추) 계열 인사들이 많이 이탈하고, 남은 세력은 진정추와 통합하여 1995년 9월에 ‘진보정치연합’(약칭 ‘진정연’)을 결성했다. 진정연은 이후 97년 ‘국민승리21’이 결성되기까지 진보정당운동을 주도하게 된다.4) 

한편, 민주노동당 창당 후 내부에서 PD계열과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는 NL(민족해방)계열의 사정도 당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전국연합, 전농, 한총련을 비롯한 민족해방계열 조직들은 1992년 대선 무렵부터 김대중과 함께 했던 정책연합의 미미한 성과, 문민정부의 출범, 노동조합 등 대중조직의 자생력 제고, 시민운동의 등장, 국민의 의식 강화 같은 1980년대와 대비되는 객관적 조건의 변화와, 대중조직에 대한 지도력 취약, 주요 활동가의 보수 정치권 편입에 따른 인재 부족과 같은 주체적 한계 때문에 조직력이 점차 약해졌으며,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안을 둘러싼 논란이 격화되면서 분열의 길을 걷고 있었다.5)

그러던 중 1996년 12월~1997년 1월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는 총파업을 계기로 민주노총이 1997년 3월 진보정당 건설에 동참키로 공식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러한 민주노총의 진보정당 건설 참여라는 조직적 결의에 고무되어, 1991년 출범 이후 그때까지 김대중과 그 정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고수하던 전국연합도 같은 해 6월에 조직 차원에서 동참하기로 함에 따라 1997년 10월에 국민승리21이 출범하게 된다.

▲ 1997년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당시 국민승리21 대표) [사진출처 : 민주노동당]
▲ 1997년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당시 국민승리21 대표) [사진출처 : 민주노동당]

이리하여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인 10월에 평등파계열의 진보정치연합(진정연)만이 아니라 같은 PD계열의 민중정치연대(민중회의 후신), 민족해방 계열의 전국연합, 그리고 민주노총이 함께 모여 ‘국민승리21’을 출범시키게 된다. 하지만 선거 도중에 민족해방계열의 전국연합은 일부 개인을 제외하고는 조직 차원에서 모두 이탈하고, 선거 국면에서 한시적으로 결합한 민중정치연대도 선거가 끝난 뒤 관계를 청산하였다.
결국 선거 뒤에도 국민승리21에 남아 있던 세력은 진보정치연합과 민주노총이었으며, 이 둘이 2000년 1월에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는 주역이 되었다.

민족해방 계열의 파벌(전국연합의 지역 조직)들이 조직적 결의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최종 합류하는 것은 2001년 9월 전국연합이 민족민주전선 일꾼전진대회를 열어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 정당건설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하여 연방통일조국 건설하자”는 결의를 채택하고 난 뒤였다. 물론 이 문건이 채택되기 전에, 노동자 밀집지역인 울산에 일정한 지역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울산연합과, 1990년대 선거 출마 경험을 통해 지지기반을 어느 정도 확보한 경기동부연합은 전국연합이 조직 차원에서 이탈한 뒤에도 개인 자격으로 1997년 대선 선거운동 기간 내내 국민승리21에 잔류했으며, 민주노동당 창당에도 기여하였다.6)

이렇듯 전국연합이 ‘3년의 계획’을 채택하면서 그동안 참여를 유보하고 있던 인천연합을 비롯한 회원들이 대거 합류하게 되는데, 이로써 2002년 말에는 전국연합의 모든 지역 조직이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인 2001년 말부터 2002년 초 사이에 대학 총학생회의 전국연합체인 한총련이 민주노동당 참여를 결정하였으며, 전국 농민조직인 전농과의 협상이 2003년 10월에 타결되면서 민족해방 계열의 주요 조직이 모두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게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민주노동당의 탄생이 국제 사회주의진영의 약화라는 큰 정치적 배경 속에서, 제도권 정치경험이 미천했던 주체적 조건이 작용했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즉 진보진영 내 어떠한 정파라도 단독적으로 ‘합법정당’을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3% 득표를 못할 경우 강제 해산당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정당법은 진보진영으로서는 좀처럼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이 ‘3%룰’은 모처럼 제도권에 진출하고자 하는 진보세력들이 선거 경험을 점진적으로 축적해가며 발전하는 것을 강력히 가로막았다.7)  

따라서 이 같은 시대적 조건을 감안할 경우 진보진영 내 ‘연합정당’ 탄생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간 존재했던 상호 간의 노선 차이는 잠시 덮어졌다. 비록 훗날 당내 분열이 격화하면서 노선문제는 점차 수면위로 부상하지만, 당시 사회주의권의 위기와 이념상의 혼란은 어찌 보면 노선 차이를 희석시키고 진보연합정당을 탄생시키는데 있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본문 주석

1) 권우철, “노동자정당 건설노선 변경에 대한 긴급제안”, 월간 <길>, 1992년 1월호. 김창우, 2006년,<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 창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p44에서 재인용.

2) 정영태, 2011년, <파벌>, 이매진, p60. 

3) 김창우,2006년,<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 창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pp47-48. 김창우씨는 위 인용문의 주석에서 다음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주대환 대표는 추진위 명단 공개를 요구하는 인터뷰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1991.12.13.- 연구자 주) 저희들 중의 한 분이 안기부요원을 만나고 올 것입니다. 그 쪽에서 연락이 와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 쪽의 반응을 보고서 어느 정도나 공개할 수 있을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기부를 만나본 결과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안기부가 합법정당 추진을 인정했다고 판단하여 추진위원 명단을 공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대환 노정추 대표 인터뷰, 월간 <길> 92년 1월호, 23”

4) 진정추가 진보정당 사업을 주도하던 이 시기는 전체적으로 볼 때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파벌>의 저자 정영대 인하대 교수의 다음 인터뷰 내용은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민주노동당의 창당 과정에서 실무 협상을 담당했던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질문자: 제일 힘들었을 때, 진보정당 운동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시기가 어느 때였어요?) 글쎄요, 95년도, 96년도 정도가 제일 힘들었는데요, 그러니까 진보정치연합이 명색으로는 진정추 계열과 사노맹, 민정련 계열이 합쳤단 말입니다. 그런데 민정련은 지지부진하게 잘 안되면서 점점 없어집니다. 나중에는 상근자가 딱 3명이 남아요. 딱 3명이 남는데 한 분은 총무 하시던 여자분이었고 한 분은 이것저것 국제, 인권 이런 거 하시던 분이었고, 무슨 조직 운동이나 정책위나 이런 거를 하시는 분이 없었어요. (진정추에는 정책이나 조직을 담당하는 사람이) 저 혼자만 있었고요. 돈도 없고, 돈도 하나도 없고 진보정치연합 사무총장이 사직을 하면서 통장을 저한테 넘겨주고 갔어요. 재정도 넘겨주고 갔는데 그 사람이 지금 00학교 교장하는 000씨죠. ……민정련은 통합은 했지만 진정추보다 세가 좀 약했고 돈은 더 없었고요. 그러니까 진정추 사무총장한테서 넘겨받은 통장 가지고 제가 조금 몇 달 유지를 한 거고요. 그러니까 상근자들이 진정추 초기에는 한 50명이 됐었는데 점점 주는 거죠. 민정련도 점점 줄고, 암담했죠(PD-4, 2010년 1월 14일)“ 
    “노회찬 씨가 (진보정치연합) 대표였는데……사표를 저한테 제출했습니다. 사표를 반려할 수는 없고 해서, 그럼 나도 사표를 낸다고 했고, 사표가 자동으로 반려된 거죠. 그래서 뭔가 활로를 찾아야겠다고 제가 조금 생각을 해서, 제가 책임지고 전국연합하고 민주노총을 꼬시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전국연합을 찾아 갔습니다.……진정추 위기와 진정련 때는 굉장히 어려웠죠. 전망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 상근자들도 없고 ……두목들은 ……그만둔다고 그러고 …… (아니면) 시골로 내려가서…… 소리 소문도 없고. 근데 전국연합에 가보니까 거기도 그렇더라고요. 판이 …… 그냥 아무 전망도 없었어요. 그냥 있는 거야. …… 본인들 스스로 이거(전국연합) 점점 죽는다고 느꼈고 …… 민주노동당이 생기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운동권 단체들 …… 활동가들 …… 자연사할 것이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 그러면 한번 합쳐서 해보자는 식(PD-4 인터뷰; 김보현, 2008: 244)” 정영태, 2011년, <파벌>, 이매진, pp67-68.

5) 이하 NL계의 민주노동당 참여와 관련한 내용은, 정영태, 2011년, <파벌>, 이매진, pp61-63 내용 참조함.

6) 참고로, NL진영은 1991년 결성된 전국연합의 지역조직 구성으로 볼 때 원래 경기남부연합, 경기동부연합, 인천연합, 울산연합, 광주전남연합 등 크게 5개 지역조직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경기남부연합은 97년 대선을 거치면서 연합 내부에서 제기된 전선운동 강화론과 새로운 정치(정당)조직 건설론이 대립하면서 제일 먼저 해산하였다. 광주전남연합은 초기에는 NL계열 최대 정파였던 인천연합 간부들의 지도를 받았는데, 이후 경기동부연합이 급성장함에 따라 경기동부연합의 지도를 받는다. 통합진보당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인천연합이 PD파와 함께 떨어져 나가 정의당을 결성함으로써, 지금은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 광주전남연합 3개 지역조직이 남아 있다.

7) “국회의원선거에 참여하여 의석을 얻지 못하고 유효투표총수의 100분의 3 이상을 득표하지 못한 정당에 대해 그 등록을 취소하도록 한 정당법”(소위 ‘3%룰’)은 2005년 2%로 낮추어 졌다.(2005. 8. 4. 법률 제7683호로 개정) 그 후 2014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최종 위헌 판결이 내려져 지금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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