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12) - 1950년 7월 13일 영천 도유리 구룡산

포항경비사령부 해군 육전대는 1950년 7월 13일 영천 북안면 도유리에 있는 인민군 유격대를 공격하여 8명을 사살하고 3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847쪽) 

도유리에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하던 날이 7월 10일이었으며, 전쟁 중 인민군이 영천 읍내에 진입하여 벌어진 전투는 1950년 9월 4일부터 13일사이가 전부였다. 더군다나 이 전투가 벌어졌다는 북안면은 영천 남부지역으로 한국전쟁 동안 인민군이 진입하지 못한 곳이었다. 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졌음에도 전쟁 초기부터 이런 곳에 인민유격대가 침투하여 활동했다는 주장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 그림 1) 『한국전쟁사』 제2권 847쪽. 유격대라고 하지만 저항 수단이 없는 이들은 피란민에 가까웠다.
▲ 그림 2) 도유리 뒷산에서 본 마을 모습. 저수지 왼쪽에 명주리가 있다. 멀리 보이는 왼쪽 산이 사룡산이며 오른쪽이 구룡산이다. 2019년 10월 15일 조사.

전쟁 초기부터 낙동강 전선 후방에서 인민군 유격대를 토벌했다?

전쟁 발발 직후부터 포항 죽장면 상사리에 있는 구암산을 중심으로 인민군 유격대의 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쉽게 믿기지 않는 이런 주장에 따르면, 보현산을 주된 거점으로 삼은 이들이 1950년 7월 11일 구암산 남쪽에 있는 죽장면 감곡리로 이동한 뒤 죽장면과 기계면 일대에 출몰했다고 한다. 

해군 포항경비사령부는 후방에 출몰하는 이들을 토벌한다며 7월 11일 용호대(대장 정창용 중위)를 안강지구로 보냈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얼마 뒤 1개 중대 규모의 게릴라 부대가 영천 구룡산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사령부는 이들을 다시 영천으로 보냈다. 포항 죽장면에서 영천 북안면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30km 떨어져 있으니 당시 산악지대의 교통 환경으로 보아 그리 가깝다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게릴라 1개 중대 규모라면 2백 명에서 3백 명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할 텐데 이들을 지방폭도라고 불렀다면 이는 구룡산에 활동한다는 빨치산이 곧 그 지역의 주민들이었음을 의미한다. 

안강에 주둔하던 용호대가 7월 12일 오후 4시 30분 영천 북안면 도유리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먼저 척후대를 산으로 들여보내 조사하게 했는데 척후대가 산 속에서 들리는 송아지 소리를 듣고 유격부대의 위치를 파악했다고 한다. 토벌 계획을 세운 이들은 다음날인 7월 13일 새벽 4시 구룡산 중턱에 있는 무리를 공격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아직 잠에 취해있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고 분산 도주하였는데 2시간에 걸친 추격으로 8명을 사살하고 30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라고 서술했다. 반면 용호대는 1명의 부상자도 없이 낮 1시 포항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 그림 3) 멀리 보이는 구룡산 정상에서 도유리까지 약 4.5km 떨어져 있지만 구룡산의 산자락은 도유리까지 이어져 있다. “구룡산 중턱”이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아니었을까?

같은 시기에 북안면 도유리에서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주민 11명이 국민보도연맹원이라며 1950년 7월 10일 북안면 도유리 뒷산, 명주리 계곡(명주리는 도유리 옆이다)에서 총살당했다고 밝혔다.(진실화해위원회,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5권, 74쪽)

위원회의 조사에서 참고인 권영탁은 “당시 영천경찰서 경찰이 11개 면의 각 리와 마을에서 보도연맹원들을 몇 명씩 끌고 가서 구금했다가 한 트럭 정도에 실어 북안면 명주동 골짜기로 갔다고 들었다.”라고 진술했다.(진실화해위원회, 앞의 보고서, 56쪽) 그리고 “연행된 도남동 주민 중 가장 연장자이자 주동자급인 안경수 등은 1950년 7월 10일 북안면 도유동 뒷산에서 1차로 살해되었다. 안경수는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남로당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신원미상자 10명과 함께 사살되었으며 가족이 시신을 수습”했다면서 희생자 안경수의 아들 안병완(1936년생)의 진술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 그림 4) 정희태(85세, 당시 16세) 노인이 국민보도연맹원 주민들이 죽은 “도유리 뒷산”을 가리켰다.

“아버지는 6.25 전에 경찰에 자수했다가 고문당하고 풀려난 적 있으며, 6.25 이후 소집당해 경찰서로 자진 출두했다.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끌려간 며칠 뒤에 갔다. 아버지는 경찰서로 간 지 2~3일 만에 다른 마을의 10명과 함께 총살당했다. 

아버지는 북안면 도유동 뒷산에 그쪽 마을 주민들이 장으로 드나드는 길목에서 살해되었다. 그래서 그쪽 마을 동장이 시신 때문에 냄새도 나고 무섭기도 하니, 마을 사람을 시켜서 현장에다 흙을 대충 덮어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이때 동장이 시신마다 1번, 2번, 3번, 번호를 매긴 뒤, 각 시신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금니를 했는지 안 했는지 등을 적은 뒤 매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가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수소문하다가 그 마을에 가서 이것을 읽어보고 2번 시신이 아버지 시신이다 싶어 파보니 어머니가 아버지 조끼에 달아준 단추가 나왔다. 그래서 시신을 찾았다. 그때 듣기로는 그 산에서 11명이 총살당했는데 1명은 도망가다가 죽어 건너 산에서 묻혔고, 이쪽에는 10구의 시신이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 그림 5) 도유리 뒷산 국민보도연맹원 집단 희생 추정지

유격대 또는 피란민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한 곳에서 인민군 게릴라들이라며 누군가 또 사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군이 말하는 이들 유격대는 과연 누구였을까?

피살자들이 인민군 유격대가 맞는지부터 의심스럽다. 용호대에 부상자가 없었다는 점을 비롯해 전투 상황에 대한 서술로 보아 유격대 측의 대응사격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들이 유격대라기보다는 피란민들이었을 것으로 짐작케 한다. 보초가 없이 잠에 취해 있던 중 공격을 받았다는 점이나 노획한 무기가 없었다는 점, 유격대의 위치가 발각된 것은 가축 소리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피살자들이 유격대였다기보다는 체포를 피하기 위해 숨은 피란민에 가까워 보인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보고에 따르면 인민군 유격대의 활동이 활발했다는 시기와 지역은 영천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하기 시작하던 시기와 지역이 일치한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을 인민군 유격대 활동으로 은폐하려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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