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13) - 1950년 7월 17일 포항 죽장면

900여 명의 게릴라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해군육전대가 포항 죽장면 일대에서 전쟁 초기인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토벌작전을 벌이던 중 1950년 7월 17일 합덕리, 정자리 등을 공격했다고 한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847~848쪽) 국방부는 국군이 공격한 사람들이 게릴라였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이 남쪽 사람들인지 북쪽 사람들인지 밝히지 않았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이들의 무장 수준은 칼과 도끼 정도였다. 과연 이들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게릴라였다고 할 수 있을까?

▲ 그림 1) 『한국전쟁사』 제2권 848쪽. 죽장면의 “적”은 칼과 도끼로 무장하는 수준이었다.[사진 : 필자제공]

토벌작전을 벌인 해군 육전대 “용호대”

해군 포항경비사령부는 7월 5일 포항기지에 근무 중인 병력을 중심으로 중대 규모의 육전대인 용호대를 편성했으며 7월 9일에는 진해에서 온 병력을 더해 대대 규모의 강호대를 편성했다.
용호대는 7월 14일부터 죽장면 입암리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고 하는데 입암리는 죽장면사무소가 있는 곳이었으므로 이것만으로도 산 중의 게릴라 토벌이 작전의 우선 목표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일 새벽에는 비학산(신광면에 있음)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정찰 활동을 통해 인근에 100여 명의 게릴라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그림 2) 해군육전대인 용호대가 주둔했다는 죽장면 시내 입암리 모습. 토벌작전을 벌였다는 입암리는 죽장면 행정의 중심지로서 당시나 현재나 주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토벌 작전을 벌였다는 사실은 이 작전의 성격이 정치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2019년 10월 15일[사진 : 필자제공]

포항경비사령부는 3중대(중대장 박승도 소위)를 보내 용호대 병력를 강화하였고 용호대는 본부를 기북면 용기초등학교(용기리에 있던 초등학교라면 현 기북초등학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로 옮겼다. 
병력을 강화한 용호대는 7월 15일 새벽 6시 1개 소대가 죽장면 가사리 방향으로 추격을 시작했다. 용호대는 산악 지대에 500명 정도의 게릴라가 숨어있었다고 판단했다고 하지만 구암산을 수색하면서 게릴라 부대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이틀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7월 17일 새벽 4시 30분 용호대가 합덕리를 향해 하산하던 중 입암리 아래쪽인 정자리에 400여 명의 게릴라 부대가 출현했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칼과 도끼로 무장했다는 게릴라 집단

7월 17일 합덕리와 정자리 일대에 게릴라 부대가 집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해군 육전대는 경찰 40명과 함께 마을을 포위한 뒤 오후 2시 30분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공격을 받았다는 이 무리들은 대응 사격 없이 바로 후퇴하였고 이어 국군과 경찰이 도망가는 무리를 추격했다. 
오래 걸렸을 것 같지 않은 이 전투의 전과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7시간에 걸친 격전으로 아군 육전대는 21시 30분 적의 최고진지인 807고지(구암산)을 점령하였던바 동 고지 일대에는 적들의 시체와 버리고 간 취사기구만 남아있었다.”라고 했다. 아무런 대응도 없는 무리를 무려 7시간이나 공격했다는 주장은 과장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수색하면서 걸린 시간을 모두 포함했을 것이다. 
그리고 공격을 당한 게릴라 부대의 모습에 대해 “이 적들은 정예부대가 아닌 게릴라 집단인바 무기도 빈약하였으며 일부 포로들은 칼, 도끼 등을 무기로 소지한 자도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 그림 3) 정자리 전경. 마을 주변이 온통 첩첩 산중이다. 전면전이 발생한 마당에 병력 규모도 앞서는 유격대 형태의 인민군 선발대가 이런 곳에 소규모로 숨어 도망다닐 이유가 있었을까? 2019년 10월 15일[사진 : 필자제공]

아주 특기할 전투?

국방부는 7월 17일에 있었던 이 전투를 “구암산지구 전투”라고 했고 주장을 요약하면 200여 명으로 구성된 해군 육전대와 경찰이 최대 500명으로 추정되는 게릴라 부대를 공격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공격의 결과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피살자의 규모나 소속, 신원 등은 물론 이들이 남쪽 사람인지 북쪽 사람인지도 분명치 않다.
그런데 또 다른 전쟁사 문헌인 『6‧25전쟁과 한국해군전투』 159쪽에서 이 전투의 성과가 확인된다. 당시 아군 피해는 중상 3명, 경상 2명이었는데 비해 전과는 사살 161명, 생포 4명이었다며 “육전대는 비록 보유한 무장이 미약하고 지상 전투의 경험이 적은 해군 장병들이었지만 경찰, 주민의 협조를 통해 입수한 적의 위치, 동태 등을 분석하여 치밀한 작전 계획을 수립한 뒤 미 공군과 경찰 병력의 지원으로 게릴라 부대를 소탕했다”라고 하며 “아주 특기할 전투”로 평가했다. 
이 설명대로라면 사망한 게릴라들은 마치 북쪽 사람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전면전까지 발생한 마당에 인민군 지휘부가 칼과 도끼로 무장한 소규모 게릴라 부대를 포항의 첩첩 산중까지 내려 보내 벌인 작전이 기껏 아무런 공격도 없이 도망만 다니게 만들다가 모두 사살당하게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이없는 이런 식의 설명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남을 누구라도 알 수 있어 거짓 주장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군 161명을 살해하면서 아군 사망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은 전투였다면 이는 전투가 아니라 학살로 보인다. 게다가 칼과 도끼 정도로 무장한 사람들을 게릴라 부대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저항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었다면 이들은 국민보도연맹 학살을 피해 도망 다니던 주민들에 더 가까워 보인다. 

포항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비교

포항경비사령부는 7월 초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좌익분자 처형 명령서를 받은 후 포항․경주․영덕 경찰서의 협조를 받아 명부에 올라있던 각 경찰서 관할지역 주민 400~500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이종환 포항경찰서장, 이강학 경주경찰서장, 박주현 영덕경찰서장, 포항경비부 정보참모 차병엽 중위, 헌병대장 고윤석 중위, 정보장교 박재옥 중위 등이 이중 200여 명을 ‘처형대상자’로 분류했다. 포항경비사령부는 7월 20일 군함 3척에 처형대상 주민을 태우고 영일만 장기등대 동쪽 3~5km 지점 바다로 나가 총살한 후 다시 떠오르지 못하도록 돌을 매달아 수장했다. 총살은 해군 장병과 경찰이 함께 저질렀다. 
포항경찰서로 연행되지 않은 주민들은 7월 17일경 포항시 보도연맹 사무실로 소집되었다. 이들은 영일만 해상에서 수장되지 않고 7월 말에서 8월 11일 사이에 포항 수도산, 연화재길, 포항의료원 골짜기, 달전고개 등에서 총살되었다. 생존 보도연맹원 김미자 씨는 당시 상공회의소 건물에 모인 주민들이 수백 명을 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해놓고 포항시 보도연맹 간사장 박일천과 민간인 복장을 한 다른 사람들 여럿이 명단을 비교해가면서 사람들을 트럭에 실어서 보냈다고 한다. 트럭에는 최대한 많은 인원을 싣기 위해 바닥에 차례로 사람들을 눕게 한 후 그 위에 가마니를 하나 깔고 다시 사람들을 눕게 하는 식으로 여러 겹으로 쌓아서 실었다. 이렇게 트럭에 실린 사람들은 포항의료원 뒷산에 길게 구덩이를 파고 죽 세워져 총살당했다. 포항의료원 골짜기에서 희생된 수는 2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각 지서로 연행된 주민들은 포항경찰서로 이송되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학살당헀다. 
구룡포(대보)지서는 구룡포읍 주민들을 고디굴과 구룡포 앞바다에서 총살하거나 수장했다. 고디굴에서는 8월 9일에서 8월 12일 사이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주민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쏘아 살해했는데 주로 야간에 총을 쏘다보니 옆 사람에게 가려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고디굴에서 전쟁 발발 후 첫 희생 사건이 발생한 8월 9일은 포항 북부 기계면이 인민군에 점령되고 포항시내 역시 함락의 위기에 놓인 때였다. 학살은 8월 12일까지 수차례 있었는데, 그 동안 희생된 주민은 5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외에 구룡포 하정2리 앞바다에서 수장된 희생자들도 있었다. 8월 1일부터 2일 사이에 대보국민학교로 소집된 주민들이 일주일 뒤인 8월 9일 구룡포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 당시 대보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헌병들이 김상대 등 40여 명의 주민들을 운동장에 세워놓고 인원을 확인하였다. 헌병들은 트럭에 사람들의 손을 뒤로 묶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게 하고 총과 몽둥이를 들고 감시하였다. 강사 1리에 차를 세워놓고 골짜기로 올라간 후 총소리가 몇 번 났는데, 이순근 등이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살아 끌려왔다. 헌병들은 다시 이들을 트럭에 태워 구룡포 항으로 끌고가 어선을 징발하여 희생자들의 손을 로프로 뒤로 묶은 채 커다란 돌을 여러 개 싣고 나갔다. 40여 분 후 돌아온 배는 텅 이어 있었다.
포항지역에 대한 지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는 신청 사건에 의해 포항읍내와 해변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신청인이 없었던 죽장면 등 산간 지역은 조사되지 못했다. 전투가 벌어졌다는 7월 17일이면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이다. 이 지역의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조사는 물론 죽장면 지역 주민들의 기억에 대한 구술 조사도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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