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14) - 1950년 7월 17일 상주 화서면 상곡리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전투 중 이번에 다루는 것은 충주 동락리 전투에 이어 이승만의 명령에 의해 국군 17연대 1개 연대 전원이 1계급 특진했다는 화령장 전투 중 첫날 벌어진 사건이다.

『한국전쟁사』는 7월 17일 40여 대의 우마차와 함께 나타난 인민군이 상주 화서면 상곡리 계곡에서 휴식에 들어가자 국군 17연대 1대대가 이들을 공격하여 250여 명을 사살했다고 밝혔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425~454쪽). 그런데 인민군 측은 공격을 당하는 동안에 “한 발의 저항도 못”했다. 차량도 아닌 우마차를 끌고 나타난 이들이 과연 인민군이었는지, 혹시 피란민 집단은 아니었는지 의심하는 이유이다.

▲ 『한국전쟁사』 제2권 428쪽.

인민군 주력이 이미 통과하다

1950년 7월 중순 육군본부 직속 독립연대에서 국군 1군단으로 배속된 국군 17연대(당시 연대장 김희준 중령)는 예비 부대로써 보은에서 부대를 재편성 중에 육군본부로부터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예비 부대였다는 사실에 대해 “화령전승기념관”은 당시 육군 유일의 경우였다고 자랑스럽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예비 부대로써 부대를 재편성한다는 것은 부대가 전투 능력을 잃었으므로 병력을 충원하여 회복하는 중임을 의미한다. 특별히 자랑스럽게 강조할 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명령에 따라 17연대 1대대가 1950년 7월 17일 새벽 6시 주둔지를 출발하여 보은 마로면 관기리에 도착했을 때, 금곡리를 통해 남하한 인민군이 벌써 관기리를 지나쳐 상주로 향한 뒤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다시 보은을 출발해 아침 7시경 화령장을 통과하면서 다시 주민들로부터 이미 인민군 주력이 화서면을 지나 상주읍으로 지나갔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밤새껏 우리 마을 앞을 지나 상주 쪽으로 갔으니 이 길은 위험하다”고 알려주었다. 이 마을에는 이미 7월 14일부터 국군 정보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군의 정보 계통을 통해서가 아닌 주민 면담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보 부대의 활동에서 얻어낸 정보가 국군 사이에 공유되지 못했던 것이다.

▲ 『화령장지구전적비』 안내문. 인민군 48연대가 선두부대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이 부대의 주력은 이미 상주까지 진출했다. 2019년 5월 15일 조사.

『육군전사』 제3권 41쪽은 인민군 주력이 이미 국군 주둔지를 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대장은 앞서 간 인민군의 후속부대를 공격하기로 했다고 서술했다. 『한국전쟁사』 역시 주력이 국군 주둔지를 지난 사실을 파악한 국군 17연대 1대대는 이어 도착할 인민군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화령장지구전적비”의 안내문은 “북한군의 선두부대인 제48연대를 기습”했다고 적혀있다. 인민군 48연대의 후속 부대를 공격했다는 사실이 마치 선두부대를 공격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안내문이다.

전선이 뒤엉키는 일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었을까?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의 경계인 화령장에 있던 국군 17연대는 인민군에게 포위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지만 이에 대한 위기의식은 전혀 찾을 수 없다.

40여 대 우마차를 발견하다

7월 17일 아침 상주 화서면 신봉리에 있는 화령초등학교에 부대를 주둔시킨 17연대 1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부하들과 함께 상곡교를 정찰하던 중 자전거를 탄 한 인민군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포로는 상주로 진출한 인민군 15사단 48연대 대대장이 연대로 보내는 전령이었고 그가 전달하려던 것은 “대대는 지난 밤 소수의 국방군으로부터 사격을 받았으나 그들을 물리치고 17일 08:00에 상주를 바라볼 수 있는 △273(상주 서쪽 3km)를 점령하였음”이라는 내용이었다. 상주 읍내에서 상곡교까지 거리는 대략 15km이므로 이 인민군 전령은 그 정도를 자전거로 달려오다 사로잡힌 것이었고, 아마 가려고 했던 남은 거리 역시 비슷했을 것이다. 인민군 48연대라면 지난 7월 4일과 6일 충주 동락리 전투에서 한 차례 전멸했다는 그 부대였다.

▲ 자전거를 탄 인민군 15사단 48연대 소속 대대장의 전령이 사로잡혔다는 상곡교는 상주에서 괴산으로 가는 길목이다. 2019년 5월 15일 조사.

인민군이 7월 17일 상주 읍내에 도착한 사실은 소련 군사고문관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라주바예프는 “(인민군 1사단은) 7월 16일 밤 9시 무렵 1개 연대 병력의 적을 섬멸하고 문경을 점령하였다. 사단 선두부대들은 남쪽 방면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7월 17일 오후 늦게 (상주 낙동면) 유곡리를 점령하였다”고 했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제1권, 205쪽). 이에 따르면 7월 17일 저녁 이미 인민군 선두부대는 상주 읍내를 점령하고 낙동강변인 유곡리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전쟁사』는 상대 인민군 부대 소속이 15사단 48연대라고 했는데 이 보고서에는 1사단이었다.

국군 17연대는 인민군의 후방에서 벗어나기보다 후방에 있는 인민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곧 다가올 인민군 48연대 본부대를 매복하고 기다렸다. 오후 4시가 되자 몇 대의 사이드카와 그 뒤를 따라 40여 대의 우마차가 갈령 계곡에서 상곡리 마을 앞으로 모여들었다. 국군은 이들의 우마차에 실린 물건들이 포와 탄약으로 추정했다. 40여 대의 우마차라면 이천 곤지암리 전투와 같은 규모이고, 단양 매포 전투의 100여 대 보다는 규모가 작았다.

목욕하는 인민군 부대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이들 인민군의 행동은 상식적이지 못했다. “우산천(愚山川)에 뛰어들어 목욕”을 하는가 하면, 경계 부대는 “아군이 있으리라는 것을 전연 의식하지 않은 듯”했다. 이들은 공터에 마차를 세우고 경계 부대를 배치한 뒤 개천에서 목욕을 하거나 식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사』는 40개의 마차와 함께 나타난 이들 인민군의 규모를 밝히지 않아 의문을 낳는다. 전투 후 전사한 인민군의 수를 250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인민군의 수는 이 정도로 짐작할 수 있지만, 최초의 목격에서 이를 설명하지 않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오후 4시에 인민군을 확인한 국군은 바로 준비에 들어가 오후 5시부터 공격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박격포탄과 기관총의 탄약이 부족하여 탄약을 공급받은 뒤인 저녁 7시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북쪽 계곡으로부터 포성이 나자 40여 필의 소와 말이 놀라 날뛰었다. 공격은 이후 1시간 동안 계속되었지만 인민군은 한 발의 저항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 우마차를 끌었던 인민군들이 목욕하러 뛰어들었다는 우산천. 지금은 이안천으로 부른다. 국군은 개울 건너편 야산에 진지를 구축했을 것이다. 2019년 5월 15일 조사.

1대대장은 “어두워지기 전에 완전히 섬멸시키겠다”고 했으나 연대장은 본대가 도착한 뒤 하자며 일단 공격을 중단시킨 뒤 “우선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보은을 출발한 17연대 주력 부대가 새벽 4시면 도착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공격 직후인 저녁 8시에 공격을 중단했다가 새벽 4시에 다시 공격하려 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다음날 연대 주력부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다음 날인 7월 18일 1대대장은 “버려진 장비에 비해 시체가 적은 것”으로 보아 남아있는 패잔병이 많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곡리를 소탕하게 했다. 마을에 남아있는 패잔병 처리는 주민들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을 것이니 이 소탕작전에 의해 상곡리 주민들도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주민들이 당한 구체적인 피해 사실은 7월 20일에 있었던 2차 전투에서 확인된다.

1대대는 7월 17일과 18일 이틀 동안 250명을 사살하고 3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포로로 잡힌 자들은 비무장이었다고 하니 이 역시 주민들이 아니었는지 의문으로 남는다. 노획물은 박격포 20문, 45mm 대전차포 7문, 소총 1200여 정, 통신장비 여러 개였다고 한다.

전투를 마친 1대대는 후퇴하지 않고 화령초등학교로 다시 집결하여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고 한다.

의문

국군 17연대가 상곡리에 도착했을 때 인민군 선두부대는 이미 이곳을 지나간 뒤였다. 이때 이상하게도 퇴로가 막혀 포위될 수 있다는 위급함은 국군에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사후에 구술로 재정리하면서 생긴 합리화의 오류일 수 있지만 전공을 조작하거나 과장하려는 의도도 무시할 수 없다.)

주력이 이미 통과한 뒤였고 40대의 우마차가 짐을 나르는 중이었으니 국군 17연대의 공격을 받았던 인민군의 임무는 물자 보급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공격당한 인민군 부대가 보급부대라는 사실은커녕 마치 인민군 48연대의 나머지 2개 대대인 것처럼 주장했다.

전투 현장에서 물을 만났다고 목욕하는 군인들의 태도 역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군인들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이북 역사학자 허종호에 따르면, 인민군은 우마차 수송대를 조직했다고 한다. 그는 “우마차 수송대를 조직하여 우마차에 의한 수송을 체계화하며 그것을 효율적으로 리용”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는 “후방인민들의 강력한 지원 밑에”, “인민들을 광범히 동원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허종호,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사』 제1권, 258~259쪽).

이로 보아 보급물자를 나르던 중이었다면 이들 중에는 민간인이 있을 수 있었다. 적어도 우마차를 끌고 가던 사람들은 인민군이 아니었을 것이니 최소한 40명의 민간인이 이 대열 안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전투를 겪은 군인들이 마을에 주둔한 인민군의 숫자를 밝히지 않은 것도 민간인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던 의도였을 수 있다.

▲ 화령전승기념관 공원 내 상곡리 전투 안내판. 17일 인민군 48연대 주력이 목욕과 낮잠을 자다 섬멸되었다고 서술했다. 2019년 5월 15일 조사.

그런데 이조차도 우마차에 실린 물건들이 군수품이라는 가정 아래 내린 판단이다. 만약 군수품이 아니라면 이들은 40여 대의 우마차를 이용해 남으로 이동하는 피란민 집단일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살당한 인민군이 250명이었음에도 한 발의 저항도 하지 못한 사실이나 남은 자들 대부분이 비무장이라고 밝힌 점은 이들이 피란민이었을 것으로 의심하는 근거이다.

『한국전쟁사』 제2권 434쪽에는 “(7월 19일) 그간 연일연야로 남부여대한 피란민 대열이 갈령 계곡을 메웠는데, 이날을 기해 그들의 발길이 끊기고 이 계곡은 흡사 무인지경과 같은 고요 속에 묻히게 되었다”라고 적었다. 이는 전투 당시인 7월 17일과 18일 전투 현장 부근에 피란민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데, 이 전투로 이들이 희생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1954년에 간행된 『6‧25사변 육군전사』는 이 전투에 대해 “16:00 예기한 적의 후속부대는 상주를 통하는 도로를 따라 아 제3중대 전면을 통과하기 시작하였다. 적은 제48연대 주력인 2개 대대 및 통신중대, 대전차모중대, 기마대대 등이며 금곡리에 도착하자 부락에 침입, 식사를 위하여 휴식하는 호기를 아군은 이용하여 적의 포착 섬멸코저 18:30 제1중대를 조공으로 각 중대는 일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은 이러한 아군의 불의의 습격에 대혼란을 일으켜 송천리 방면으로 도주하고 더욱이 퇴각하는 적 주력이 아 제3중대 공격 전면으로 박두하자 아군은 1시간여에 걸쳐 격렬한 화력을 가하여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라고 서술했다(『육군전사』 제3권, 42쪽).

이 책은 국군이 인민군 48연대 주력 2개 대대 이상의 인민군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인민군 선발부대 1개 대대가 이미 상곡리를 지난 뒤였다는 사실을 누락했으며, 1970년대 간행된 『한국전쟁사』의 전투 내용, 즉 40여 대의 우마차를 공격했다는 내용에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과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책 모두 민간인이 포함된 무리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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