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호 소장의 ‘교과서엔 없는 이야기’

▲ 1950년대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사진 출처 : 수원화성박물관 홈페이지]

돌은 숙지산과 여기산 두 산에 각각 2곳, 권동에 1곳 등 모두 다섯 군데에서 채취하였다. 그러나 공사 중 팔달산에서도 석맥을 발견하여 서쪽 성은 제자리에서 캔 돌을 사용하여, 돌을 캐낸 곳은 모두 6곳이 된 셈이다.

그중에서 숙지산 돌은 8만1100덩이, 여기산 돌은 6만2400여 덩이, 권동의 돌은 3만200여 덩이, 팔달산 돌은 1만3900여 덩이 등 모두 28만7600여 덩이가 축성에 소요되었다.

석맥이 있는 논과 밭은 국가에서 매입하고 이곳에 석수를 투입하여 돌을 떠내었다. 석맥을 잘 골라 결을 살펴 정으로 구멍을 파고 밤나무나 물푸레나무를 박고 물을 부어 나무가 팽창하는 힘으로 돌을 떠내었다.

돌 뜨는 일은 석수 1명과 조역 1명이 1패가 되어 진행되었다. 돌 뜨는 데는 정철과 강철 그리고 숯, 쇠가죽, 생칡, 청태목이 필요하였다. 돌을 뜬 다음에는 이를 다듬어 그 크기를 줄여 운반하였다. 돌을 운반하는 데는 여러 운반도구가 활용되었는데 유형거 11량, 대거 8량, 평거 76량, 동거 192량, 발차 2량, 썰매, 굴림판 등이 사용되었다.

▲ 화성성역의궤에 나와있는 '구판'이라는 기구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수레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숫돌같이 판판한 도로[治道]가 필요하였다. 운반된 돌은 어느 수레 몇 채가 몇 덩어리를 운반했는지, 담기로 운반한 것은 몇 담기가 몇 덩이를 운반했는지에 대해 매일 작업일지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돌 표면에 각각 길이와 넓이, 부석소 이름, 편수와 석수의 성명을 써 넣어 이를 기준으로 건별 기록을 작성하도록 하고 돌 값을 지불하였다.

▲ 화성성역의궤에 나와있는 '동차'라는 기구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 화성성역의궤에 나와있는 '발차'라는 기구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목재는 국가에서 관리하던 재목을 베어 오거나 사오는 두 가지 방식으로 조달하였다. 먼저 국가에서 관리하던 안면도·장산곶·강원도 지역에서의 조달은 직접 베어내어 운반하였다. 안면도에서는 방풍림을 베어 내었는데 치수대로 베어 내 포구로 끌어내고 충청수사가 관할하는 수영의 방·병선은 물론 각 읍진의 방·병선 총 30척에 나누어 1000주를 발송하였다.

안면도에서 수원부의 구포까지 운반하는 기일은 2일이 걸렸으며, 30척에 달하는 배의 재목은 2월9일부터 시작하여 3월3일까지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모두 실어 날랐다.

황해도에서는 장산곶의 재목을 오차포(五叉浦) 앞바다에서 취합하여 구포로 수송하였다. 강원도의 경우 금성(현 금화)에서 벤 재목은 낱개로 금성천에 떠내려 보내면 북한강을 거쳐 낭천현 방현포(芳峴浦 : 지금의 화천군 화천읍 아리)로, 양구에서 밴 재목들도 강을 따라 낭천현으로 집산되었다. 여기서 대개 55개를 한 묶음으로 묶어 뗏목으로 춘천을 거처 가평·청평·양수리로 띄워 보냈다.

이 목재들은 경강에 집결되었다. 경강부터는 조운선으로 수원부까지 운반하게 되는데, 경강 → 인천 팔미도 앞바다 → 안산 옥구도 앞바다 → 화성유수부 쌍서도 → 우음도 구포로 운반하였다. 조운선은 팔미도 바깥 바다로 왕래하는데 익숙하여 팔미도 앞바다로 나오는 분기점에서 안산 옥구도 앞바다까지 군사가 인수인계한다. 원활하고 신속한 운반을 위하여 감색을 정하여 배를 타고 멀리까지 바라보다가 재목을 실은 배가 경계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착실히 호송하여 시각이 지체되는 폐가 없도록 하였다. 이렇게 모여든 재목들은 치목소(治木所)에서 다듬거나 성역소에서 각 시설물에 필요한 대로 재단 절단하여 활용하였다. 

▲ 화성성역의궤에 나와있는 기와가마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화성 성역에서 기와와 벽돌은 왕륜면 백운동 성역소에서 땔나무를 마련하여 조달하였다. 왕륜면과 사근평 두 곳에 기와는 6개소, 벽돌은 3개소에 나누어 설치하고 장교 2명, 색리 2명을 정하여 감찰·독려하였다. 지붕에 올라가는 모든 건축 재료는 ‘와자(瓦子)’로 표현되고 이는 암키와, 암·수막새, 용두, 취두, 토수, 잡상, 연가 등이다. 기와가마는 왕륜과 서봉동에 설치하였다. 와자로 멋을 낸 대표적 시설물은 영롱담이다.

전(甎)으로 표현된 재료는 대방전(大方甎), 소(小)방전, 반(半)방전이고, 벽(甓)으로 표현된 재료는 종벽(宗甓), 귀벽이[耳甓], 개벽(蓋甓), 홍예벽 등이다. 이것으로 보아 방전은 벽체를 쌓거나 바닥에 까는 데 사용되었고, 벽(甓)은 벽체를 쌓고 시설물의 섬세한 부분을 처리할 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벽전은 왕륜과 서봉동, 그리고 북성 밖 등 3곳에서 조달되었다. 벽돌가마는 모두 20좌가 설치되어 1좌당 1일 62.5장을 구워 총 1250장의 벽돌을 생산하였다.

화성 성역에서 철물은 그 사용 용도가 다양하였다. 철물은 해서(황해도), 호서(전라도), 관동(강원도), 서울, 수원부 등 각처에서 사왔다. 특히 철의 운반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는데 영월에서 조달된 3만 근의 각종 철은 물길이 좁고 여울이 얕아 새로 만든 배로는 실어 나를 수 없었다. 그래서 작은 토박이 거룻배로 적당한 양으로 나누어 싣고 차례로 갈라 실어서 충청도 경계로 운반하였다. 이 철물은 10월28일에 여주 초입에서 겨우 내려 보냈는데 여주 경계인 월계강과 상심진(上沁津)이 모두 얼어 배가 다닐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얼음이 풀리는 봄까지 기다려 수송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 화성성역의궤에 나와있는 활용도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다산 정약용의 발명품인 거중기는 왕실에서 1부를 내려주었다. 유형거는 왕실에서 1량을 내려주고 10량을 새로 만들었다. 유형거는 저울과 같이 좌우로 움직이는 독특한 수레로, 끝부분이 뾰족하여 이를 돌 밑에 찔러 일정하게 돌을 수레로 이동하고 손잡이를 누르면 별 힘을 안 들이고 들어 올릴 수 있는 특수 수레였다. 녹로 2좌는 역소에서 새로 만든 것인데, 이 녹로는 돌을 묶어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기계로 이전 시기에도 활용되었고 특히 화성 성역에서 돌을 쌓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외에도 화성 성역에서는 각종 재료와 잡물이 조달되었다. 숯, 석회, 장기산 뇌록, 종이, 붓, 먹, 벼룻돌, 숙마, 느릅나무 껍질인 유피, 쇠가죽, 빈 가마니, 숫돌 등이 조달되었다.

 

이달호 소장은 역사학 박사로 수원화성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장을 맡고 있다. 학위논문으로 <화성 건설 연구>가 있고, 저서로는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화성건설>, <선각자 이준열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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