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호 소장의 ‘교과서엔 없는 이야기’

1) 화성건설 비용

정조는 1789년 7월11일 장헌세자의 원침을 이전하기로 하고, 4일 만인 15일에 수원의 읍(邑) 소재지를 전격적으로 팔달산 동쪽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양주 배봉산의 장헌세자 원침을 수원부 구읍치로 옮기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구읍치에 있던 주민들의 가사(家舍)와 전답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졌다. 

▲ 1950년대 팔달문 [사진 출처 : 수원화성박물관 홈페이지]

보상은 민가 319호에 총 2417칸으로 원가 4818냥에 4394냥을 더 주어 총합 9212냥이 들었다. 그리고 원침조성 등을 포함한 총 경비는 돈이 18만4600여 냥, 쌀이 6320석, 목면이 279동 남짓, 베 14동 등으로 돈으로 환산하면 총 24만5500냥이 지출되었다. 이렇게 해서 현륭원의 모든 공역은 1789년 10월16일에 완공되었다.

정조대 국가 수입 총규모는 호조·선혜청·균역청·환곡·병조와 5군영·장용영 등에서 거두어들이는 790만 냥에 달하였다. 그렇다면 화성신도시 건설 자금 조달은 어떤 형편에서 진행되었는가. 당시 주요 재정 재고는 은자(銀子), 전문(錢文), 면포(綿布), 미(米) 등이었다.

은자는 1년 재고가 항상 40만 냥 전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은 1냥의 가치를 전 4냥으로 환산하면 160만 냥이다. 그리고 전문이 100만 냥 이상을 유지하고 있고, 면포는 50만 냥, 미는 140만 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성 성역 기간인 1794년부터 1796년 사이에 전문과 미의 재고가 급격히 준 점이 주목된다. 이 시기에는 자연재해에다가 화성 축성에 따른 재정 부족으로 중앙재정이 현저하게 줄고 있었다.

▲ 수원 화성 건축 노역모습 [자료 출처 : 문화재청 해리티지채널 켑처]

화성 성역에 구획(區劃)된 총금액은 전(錢) 87만3517냥7전9푼과 경기회부미 쌀 1495석11두4홉이었다. 그중에서 직접 배정된 전은 24만3517냥7전9푼이고, 빌려온 돈의 총액은 63만 냥이었다.

화성 성역에서 실제 자금염출 기관은 어영청 20만3000냥, 금위영 13만3000냥, 기영과 완영이 각각 10만 냥으로 호조와 선혜청과 같은 중앙재정기관에서는 단지 5000냥과 1만 냥이 투입되었을 뿐이었다. 이 외에 경상도감영에서 5만 냥, 통영 5000냥, 4영문 1만8000냥 등이었다.

화성행궁은 1789년 7월부터 시작하여 1790년 5월에는 340여 칸에 달하는 규모로 완공되었다. 처음에는 수원행궁이던 것이 1793년에 행정구역명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되면서 ‘화성행궁’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1794년부터 화성행궁을 확장 증축하였다. 총비용은 5만5734냥1전1푼이 들었다.

그리하여 총체적인 화성 건설에는 1789년 원침 이전과 구읍치 보상비용에 약 24만5500냥, 1790년 용주사 창건에 8만7505냥1전,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위한 1795년(을묘)의 원행에 지출된 10만38냥6전8푼, 화성 건설에 약 93만4028냥 등 총 136만7071냥7전8푼이 지출되었다.

▲ 김홍도 풍속도 '지붕잇기' [사진 출처 : 다음백과사전]

이러한 공사비는 호조 1년 수입과 맞먹는 금액으로, 공사기간이 10년 계획에서 2년9개월로 줄면서 일시에 많은 양이 필요하게 되어 정조대 재정압박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2) 보다 진전된 세상

화성 건설에서 특별히 강조해야 할 사항은 임금지불 방식에서 날품팔이들에게 성과급제를 시행한 것이다. 이는 하루에 일정 액수를 정하여 임금을 지불하는 일당제가 아니고 짐을 옮긴 거리와 크기 그리고 회수에 따라 차등 지급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정조와 다산 정약용이 화성 건설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진행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비용 절약의 방법으로 정조에게

“한 걸음마다 표시하는 나무를 세워 3600단으로 나누고, 그 다음 인부를 모집하여 개울의 자갈을 지고와 1단을 채우는데 따라 품삯을 얼마씩 준다면, 그들은 자신이 계산하여 많이 져 나를수록 이익이 많으므로 힘껏 일을 하여 며칠 안되어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날품을 주는 것과 비교하면 비용이 절약되고 공정도 빠를 것입니다”

이라고 건의하자 정조 또한 맞장구를 쳤다.

“품삯을 날짜로 계산해서 주지 않고 짐을 단위로 해서 거리의 원근을 헤아려 차등을 둔다면 강한 자는 넉넉히 백전을 취할 것이요 약한 자도 제 한 몸 가리기에는 족할 것이다.”

화성 건설에서 모군들의 노임 지불방식은 날품이나 날짜로 계산하여 주는 소위 ‘일당제’가 아니고 위 글의 표현 그대로만 보면 정량을 많이 져 나르고 원근을 헤아려 차등을 두는 도급제적 성과급제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 하루에 2전 5푼 정도 일당에 해당하는 임금을 지불하였다. 2전 5푼이란 쌀 1가마에 5냥으로 치면 20일 정도 일하면 쌀 1가마를 살 수 있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당이었던 것이다.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에 도성을 쌓았는데 화성 건설이 되기 약 400년 전이었다. 화성 건설에서의 일꾼 부리는 방식은 한양도성을 쌓을 때 사람을 부리는 방식과는 아주 판이하게 달랐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는 사람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그러다 보니 농사일이 바쁜 계절을 피해 주로 겨울철과 가을에 공사할 수밖에 없었다. 1396년(태조 5) 각도의 민정(民丁) 11만80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1월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94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일을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일을 끝냈다.

▲ 수원 화성 건설에서 노임 지불방식은 날품이나 날짜로 계산하여 주는 일당제가 아니고라 일의 성과에 따라 노임이 차등 지급되는 성과급제였다. [자료 출처 : 문화재청 해리티지채널 켑처]

1422년(세종4년)에는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흙으로 만든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2400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쳤다.

조선 초기 강제로 동원되어 일을 하던 방식에서 화성 건설 시 돈을 주는 방식으로 변화된 것은 보다 세상이 발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본주의적’인 사회로 변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임금 지불방식이 월급에서 일당 지급으로 변화된 것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이는 조선 중기까지의 강제부역보다는 보다 진전된 노임 지불방식인 반면 노동조건과 노동 강도가 더욱 가혹해진 것을 의미한다.

화성 건설의 노임 지불방식에서 봉건적 유제도 남아 있었다. 즉 하루 정식화되어 있는 노동량을 어기는 담가군(擔架軍)을 곤장으로 다스리도록 한 것이다. 이는 ‘경제 외적 강제’의 봉건적 관행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달호 소장은 역사학 박사로 수원화성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장을 맡고 있다. 학위논문으로 <화성 건설 연구>가 있고, 저서로는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화성건설>, <선각자 이준열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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