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호 소장의 ‘교과서엔 없는 이야기’

화성의 생산과 유통 기반시설

한편 정조는 화성을 자급자족적인 도시로 성장시키고자 농업생산기반 시설을 건설하였다. 제일 먼저 1795년에는 만석거를 조성하고 이 저수지를 활용하여 대유둔을 조성하였다. 정조는 농민들의 이로움으로 수리(水利)만한 것이 없다며 만석거를 만들기 전까지는 황폐한 땅이었는데 이제는 가뭄에도 풍년을 이루었음을 기뻐하였다. 

▲ 1950년대 수원시가지[사진 출처 : 수원화성박물관 홈페이지]

이에 따라 1798년 4월에는 현륭원 남쪽에 만년제를 완성하였고 1799년에는 만석거보다 규모가 3배 정도 더 큰 축만제를 건설하였다. 이 수리시설로 서둔을 조성하고 각종 과학영농으로 둔전을 일구어 여기에서 수확한 농산물은 화성을 유지 보수하는 비용으로 활용되었다.

화성 성내에 관청과 상가, 민가를 조성하고 생산기반 시설은 성밖의 북쪽과 서쪽에 거대하게 조성한 것이다.

1800년대 당시 중심 상권은 종로를 중심으로 한 북수동 일대의 상설 점포인 시전상가와 반영구적인 가가(假家)시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이른바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성내 시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규모가 작은 시장이 팔달문 밖에 있었다. 바로 ‘성외 시장’이다.

더 나아가 화성은 삼남으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삼남으로 가는 길은 원래 양재역이 시발점으로 광주와 용인을 거처 죽산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1796년 화성 성역이 마무리되는 즈음에 양재역을 영화역으로 고치고 역참(郵治)을 화성 북문 밖에 옮겨 설치하였다.

이는 수백 년 이상 삼남지방으로 물자와 사람들이 오가던 ‘길’에 대한 혁명적 변화였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 ‘1번 국도’로 불리는 도로의 원형이 탄생된 것이다. 이fjs 변화로 광주지역과 용인지역보다 수원이 더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 화성 북서측 성벽 전경[사진 출처 : 수원화성박물관 홈페이지]

이는 양재역을 거쳐 판교의 낙생역을 지나 용인을 통해 죽산, 안성, 평택으로 갈라지는 기존의 도로 개념에서 수원이 중심이 된 것을 의미한다. 즉 청계산과 관악산 동쪽으로 통하던 길이 관악산을 서쪽으로 우회하는 도로로 전환됐음을 뜻한다.

영화역의 조성으로 수원이 삼남으로 가는 요충지가 됨으로써 행궁 앞 중심에 십자로가 조성되고 창룡문을 통해 광주로 가는 도로가 뚫렸다. 장안사거리는 ‘T’자형 도로로 이곳에서 화서문을 통해 안산으로 통하는 도로가 되었으며 팔달문을 조금 지나 동쪽으로는 용인으로 향하고 사도세자가 묻힌 안녕리까지는 능행길이, 그 옆으로는 병점을 지나 오산을 거쳐 진위, 평택으로 가는 도로가 조성된 것이다.

이에 따라 수원은, 삼남은 물론 서울, 광주, 용인, 안산, 남양, 안성 등으로 사방 팔방 뻗어가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물산이 모여드는 상업의 구심점이 되었다.

화성건설의 조직과 인적 자원

정조는 1793년 12월6일에 영의정을 역임한 채제공(蔡濟恭)을 총리대신으로, 훈련대장을 역임한 조심태(趙心泰)를 감동당상으로 임명하면서 화성 건설을 본격화하였다. 이어 12월8일에 화성성역소를 설치하고 낭관(郎官)의 우두머리인 도청에 이유경(李儒敬)을 임명하였다. 그 하위 단위는 작업관리 및 현장감독 분야와 사무관리 및 지원부서로 나누었다. 

▲ 체제공초상 (시복본 보물 1447호) (사진 출처 : 수원화성박물관 홈페이지)

화성 성역에 동원된 기술자는 석수, 목수, 미장이, 와벽장이, 대장장이, 개와장이, 수레장이, 화공, 가칠장이, 큰끌톱장이, 작은끌톱장이, 기거장이, 걸톱장이, 조각장이, 마조장이, 선장, 나막신장이, 안자장이, 병풍장이, 박배장이, 부계장이, 회장이 등 549명이었다.

기술자 동원과정을 보면, 먼저 1793년 12월 6일 각 지역에 거주하는 기술자의 이름과 거주지를 책자로 작성하여 보고할 것을 공문으로 발송하고, 다음은 훈련도감, 수어청, 총융청, 용호영, 내수사, 선공감 등의 석수·목수·대장장이들의 본래 일을 면제하고 화성성역소로 보낼 것을 지시하였다.

석수는 돌을 떼 내는 일, 다듬는 일, 조각하는 일을 맡았다. 이들은 일을 보조해 주는 조역 1명과 함께 2명이 1패가 되었다. 조역에는 어린아이까지 동원되었다. 석수를 기술자들 중에서 제1순위로 꼽았는데 가장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고 성곽의 대부분이 돌로 건설되었기 때문이었다.

석수들은 돌을 조달하는 부석소에 가장 많이 파견되었다. 부석소에서 돌을 떠내고 그 돌을 다듬는 일과 특히 돌이 가장 많이 소요되는 동서남북의 체성과 남수문, 장안문의 돌쌓기에 석수들이 집중 투입되었다.

▲ '거중기' 정약용이 고안한 장치로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에 전시돼 있다, (사진출처 : 수원화성박물관 홈페이지)

목수는 총 335명이 투입되었다. 목수도 석수와 마찬가지로 서울 지역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어 각 읍에 소재한 목수 중에서 공장이건 사장이건 승과 속을 막론하고 솜씨가 뛰어난 자를 택하여 거주지와 성명을 상세하게 책자로 정리 보고하고, 보고된 뒤로는 제멋대로 떠날 수 없다는 뜻을 엄하게 당부하도록 하였다.

1794년 1월30일 화성 문루공사를 위하여 급히 공문을 발송하여 경상도 영천 은해사의 승 쾌성(快性)과 강원도 양양 명주사의 승려 진련(震蓮)을 급히 올려 보낼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미장이는 총 295명이 투입되었다. 이들은 성벽 여장과 옹성, 적대, 공심돈, 노대, 포루, 봉돈 등의 벽돌쌓기에 주로 투입되었다.

석수, 목수, 미장이 이외에도 와벽장이, 대장장이, 개와장이, 수레장이, 화공, 가칠장이, 큰끌톱장이, 작은끌톱장이, 기거장이, 걸톱장이, 조각장이, 마조장이, 선장, 나막신장이, 안자장이, 병풍장이, 박배장이, 부계장이, 회장이 등이 동원되었다.

기술자를 제외한 모군(품팔이)은 화성 성역 현장에서는 자재를 운반하는 담군과 허드렛일을 하는 모군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기초공사, 성벽 쌓기, 석회번조, 흙짐지기, 돌 운반하기, 치도(治道)와 신작로 닦기, 준천 및 연못 파기 등에 고용되었다. 이 외에도 각 지역에서는 벌목, 나무운반, 남양부 구포나루까지의 운반과 뱃사공 등이 고용되었다.

▲ 녹로 - 물건을 들어올리는데 쓰이던 기구 (사진출처 수원화성박물관 홈페이지)

모군 동원방식에 대해 정조는 신하들과 화성 건설 이전과 건설 과정에도 여러 차례 토론을 거치고 있다. 왜냐하면 1789년 수원부 청사를 팔달산 동쪽으로 옮길 때에도 각 도의 백성이 구름같이 몰려든 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당시 농촌을 떠난 유이민(遊離民)과 날품을 팔기 위한 예비노동자가 광범하게 존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 이외의 관료들은 모두 강제 부역을 주장하거나 승군을 강제로 뽑을 것을 건의하였다. 그렇지만 정조는 끝까지 돈을 주고 일을 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화성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화성 건설에 가장 많은 인원이 투입된 시점은 1794년 9월까지이다. 화성 건설 초기인 이 시기에 약 4000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터다지기, 개울치기 등에 집중 투입되고 있다. 이후 1795년과 1796년에는 2000명 내외의 인원들이 투입되어 화성 건설을 마무리한 것이다.

 

이달호 소장은 역사학 박사로 수원화성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장을 맡고 있다. 학위논문으로 <화성 건설 연구>가 있고, 저서로는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화성건설>, <선각자 이준열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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